메이죠를 향해서 (6)
[알아요, 알아. 그만큼 경쟁이 심하다는 거니까 기분 상하지 말고요.]
"아. 죄송합니다. 저도 그만."
최기석은 서둘러 사과했다.
오랜만에 느낀 호승심으로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었다.
[오히려 패기가 마음에 드는 걸요?]
송명진이 말을 이었다.
[다음 주까지 병원 일 잘 마무리하고 공부에 집중해요. 컨디션 조절도 잘 하고. 내가 추천서를 써 줘도 최 선생 인터뷰가 엉터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네.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끝나자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경쟁심과 투지가 샘솟았다. 미국에서도 자신의 실력이 먹힌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터벅. 터벅.
생각을 정리하며 아지트로 향했다.
"기석아!"
안으로 들어가자 정설화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평소보다 격한 환영인사에 최기석은 잠깐 어리둥절했다.
"설화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있었지. 우리 둘이 계속 떨어져 있었잖아."
정설화의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그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학회는 어땠어?"
"좋았어. 김 교수님이 다른 병원 스태프도 많이 소개해줬고 발표도 유익했어."
"다행이네."
"미안. 오프 때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알고 있으면 다음 오프 때 잘해 주겠지, 뭐."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아…… 이를 어쩐다.'
최기석은 심난한 표정을 감추며 어깨에 기댄 정설화를 응시했다.
메이죠로 떠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미뤄 두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해질 텐데…….
"쉴 때 뭐하고 지냈어? 첫째 날부터 말해 봐."
"첫째 날에는 하루 종일 푹 쉬다가 가족하고 저녁 먹었어. 둘째 날에는 병무청 다녀온 다음에 아는 사람하고 식사했고."
"오랜만에 가족 보니까 좋지?"
"응. 다들 건강해서 한시름 놨어."
"앞으로 오프 때는 웬만하면 집에서 쉬어. 아…… 흉부외과는 그게 안 되려나?"
"교수님들이 그렇게 꽉 막히지는 않으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걸?"
"그건 그렇고 우리 이번 주 오프 맞추자. 나는 토요일인데 괜찮아?"
"대박. 나도 토요일인데. 역시 우리는 뭔가 통한다니까."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미소 지으며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 여행은 강원도로 가자. 가족들하고 매년 가는 리조트가 있는데 주변 경치도 좋고 시설도 좋아. 벌써부터 기대된다."
들뜬 정설화의 모습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내가 그동안 못해 준 것까지 정말 잘할게. 기대해."
정설화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고 정설화의 두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설화야, 나 오늘 할 말이 있어."
"뭔데?"
최기석의 태도에 정설화가 앉은 자세를 고쳤다.
화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듯했다.
"그게…… 말이야.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송 교수님이 날 잘 봐주셔서 메이죠 클리닉에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거 알지?"
"응. 기억해. 기석이 너도 메이죠에 엄청 가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최기석은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정설화의 눈을 피하면서.
"얼마 전에 교수님 콜이 있었어. 그래서 여기 레지던트 그만두고 메이죠로 가려고."
"벌써? 아직 1년 차밖에 안 됐잖아."
정설화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니. 갈 거면 빨리 가는 게 좋아.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수련 시간도 길어."
미국 외과의 지망생은 인턴이 끝나면 각종 외과를 돌며 수련시간을 갖는다.
특히 흉부외과는 그 시간이 5년으로 가장 길다.
5년의 수련이 끝나야 흉부외과 레지던트로 들어가며 이후 2년간의 레지던트 생활을 끝내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그…… 그럼 언제 가는데?"
"병원은 다음 주까지. 출국은 이번 달 말일에."
"아……."
정설화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설화야. 정말 미안해. 이제야 같이 지낼 여유가 생겼는데 떠나게 돼서. 사실 조금 일찍 말할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용기가 안 났어."
"괜찮아. 나도 같이 가지 뭐."
정설화가 고개를 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설화? 너도?"
"왜? 기석이 네가 가는데 나라고 못갈 이유가 없잖아. 학교 성적하고 영어실력은 원래 내가 좀 더 나았다고."
"난 반대야."
최기석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굳이 나 때문에 미국으로 갈 필요는 없어. 메이죠 병원으로 가고 싶은 건 내 꿈이야. 내 꿈에 너를 희생시킬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순환기내과를 선택한 건 너 때문인 걸?"
정설화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설화야. 네 마음만 받을게.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같이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
"솔직히 내가 힘든 건 상관없는데 나 때문에 미국에 넘어간 네가 힘들어하면 절대 못 참을 것 같아."
최기석은 처음으로 정설화의 눈을 마주하며 진심을 전했다.
이후 오래도록 이어진 침묵, 마침내 정설화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기석이 네 뜻대로 할게."
"고마워. 설화야."
"네 꿈이 외국 병원에 있다면 응원해 줘야지."
정설화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쳤다.
"어…… 갑자기 왜 그러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하게 보내줘야 하는데…….
아쉬움이랄까, 서러움이랄까, 원망이랄까.
갖가지 감정들이 잠깐의 빈틈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설화야. 미안."
최기석이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최기석의 따스한 가슴과 손길에 억눌렀던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너무해. 진짜! 같이 하고 싶은 일, 잔뜩 적어 놨는데."
"미안."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윽고 정설화는 흐느낌을 멈추고 최기석을 바라봤다.
실컷 울고 나자 마음이 개운해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지켜본 최기석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좇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 그를 끝까지 지켜봐 줘야 한다.
앞으로 더 멀리 너 높이 갈 수 있도록.
"이제 좀 괜찮아?"
"응."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오늘 당직인 정설화가 전화를 받았다.
"나 응급실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내 걱정 너무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알았어."
정설화가 떠나면서 아지트에 최기석 혼자 남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응시했다.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USMLE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오랜 만에 의사 고시 때 공부했던 내용들을 훑는 중이지만 그 다지 위화감은 없었다.
대충 훑어도 웬만한 내용이 머리에 쏙쏙 박혔다.
논문이 가장 쉬웠어요 칭호 효과까지 공부에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STEP 1 교재를 대충 살피고 토플책을 들었다.
"역시……."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토플 교재라고 해서 USMLE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동화를 보는 느낌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탁!
책을 덮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깐 여유가 생기자 정설화의 슬픈 표정이 머릿속에 아른 거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흉부외과으로서 갈 수 있는 길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바라는 꿈이자 목표였으니까.
"으라차차차!"
최기석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VIP실을 찾았다.
장왕유는 침대에 기댄 채 TV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의 인사에 장왕유가 어설픈 한국말로 답했다. 그제야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괜…… 찮아요. 한국말 초금 할 수 있어요."
장왕유의 귀여운 대답에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좋아요. 아픈 데 없어."
"혹시 모르니까 좀 살펴보겠습니다."
최기석은 청진기로 장왕유의 폐음과 심음을 살폈다. 그리고 포터블 심전도기를 가져와 검사를 진행했다.
P- QRS- T 그래프가 정상을 그렸다.
혹시 몰라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지만 경과 또한 좋았다.
VIP 환자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건강하시네요. 한 주 정도만 더 입원하시다가 퇴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쎄쎄. 고마읍습니다."
장왕유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책상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바로 부적이다.
"이걸 왜……."
최기석은 받은 부적을 이리저리 살폈다.
부적은 황금색 바탕이었으며 붉은색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그려졌다.
"선생님. 가져. 이거 가지고 있으면 복 마니 와."
"괜찮습니다. 환자분이 쓰세요."
"이미 늦었어요. 다시 받으면 복 없어."
장왕유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신규 아이템 길흉화복을 획득하셨습니다.]
NEW [길흉화복]
-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고 불행한 일이 가면 행복한 일이 온다.
- 소모성 아이템으로 상점에서 비밀의 열쇠를 구입해야만 효과를 확인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필요 포인트: 5,000 P.
P)
"그럼 편히 쉬세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VIP실을 떠나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현재까지 보유한 소모성 아이템은 불사신 칼라일, 시간을 넘어서, 길흉화복이다.
이 중에서 P.
P가 필요한 것은 나중에 얻은 아이템들이다.
'아니. 됐다.'
최기석은 길흉화복의 효과를 확인하려다가 참았다.
모아 놓은 P.
P는 35,000.
조금만 더 기다리면 레전드인 시간의 넘어서를 사용할 수 있다. 일단은 레전드 아이템에 필요한 P.
P를 모은 후 확인하는 게 좋으리라.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별관을 나와서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본인이 주치의인 환자를 살피던 중 한 병실 앞에 걸음이 멈췄다.
세이버 수술 대기자인 황기정이다.
황기정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들어오세요."
황기정이 그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대화 중인데 실례하는 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최기석은 안으로 들어가 베드 앞에 섰다.
"아니에요. 때마침 잘 오셨어요. 이 친구가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했거든요."
"안녕하세요. 송미나예요."
곁에 있는 여자의 인사에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그가 아는 송미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송미나다. 송미나는 개그 음악회 출신의 미녀 개그우먼으로 나홀로 산다에 출연해 인기몰이 중이다.
'그렇게 된 거였나?'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기정이 이전에 말한 약혼녀가 바로 송미나인 모양이다. 두 사람 다 나홀로 산다에 출연했는데 아마 촬영 중에 사랑에 빠진 듯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금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송미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기정 씨의 세이버 수술, 성공률은 얼마나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