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를 향해서 (5)
"걔 완전히 여왕벌이었어요. 남자애들을 몰고 다녔죠. 사귀는 건 그중에서 배경 좋은 애들하고만 했고요. 학기 내내 남자애들이 끊이질 않았다니까요."
"그 정도야?"
"외모만 보면 그럴 법하지 않아요?"
"으음…… 듣고 보니까……."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연은 연예인 뺨칠 정도로 예뻤다.
더불어 은근한 애교와 남심을 사로잡는 섹시한 매력까지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나서 지켜본 결과, 남자 환자들과 남자 스태프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배도 조심하세요. 어쩌면 다음 타깃은 선배일지 몰라요. 흉부외과에서 잘나가는 걸 알고 어떻게든 엮어 보려는 걸 수 있어요."
"비슷한 생각이다."
최기석은 황지연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침에 보여 준 그녀의 행동은 수상하기 짝이 없다.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첫 만남에 그리 당돌할 수 없다.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그렇고……."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짝턴이 지연이 인데 너는 의외로 담담하다? 별로 안 설레는 것 같아?"
"그게…… 의대 시절에 한 번 까였거든요."
이영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이런 이야기 들으려고 물어본 건 아닌데."
"괜찮아요. 다 옛날이야기인데요, 뭐. 아 참. 그리고 지연이에 대한 소문이 한 가지 더 있어요."
"또?"
"떠도는 소문이기는 한데…… 지금 생각하면 지연이한테 원한이 있는 남자애가 지어낸 것 같아요."
이영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말인 즉 저번 달 흉부외과 인턴이었던 강상중에게 흉부외과 인턴을 판 게 황지연이라는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흉부외과에 오기 싫어서 돈을 주고 팔았다면 지금 와서 다시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말씀드린 거예요. 낭설인 것 같다고."
"잠깐만. 어쩌면……."
어떤 생각이 번쩍 그의 머리를 스쳐 갔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대화를 나누는 사이 흉부외과 병동에 도착했다.
일과 종료까지 40분, 두 사람에게 모처럼 여유가 찾아왔다.
"회의실에서 봉합 연습할 거지?"
"네."
"같이 가자. 쓸 만한 봉합법 몇 개 가르쳐 줄게."
최기석의 제안에 이영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메이죠 병원에 간다고 했을 때 지었던 울상은 온데간데없는 모습. 처치나 술기에 환장하는 걸 보면 이영호도 천상 외과의다.
두 사람은 회의실 탁자에 나란히 앉았다.
"요즘은 거의 단순 단속 봉합하고 연속 봉합하고 매트리스 봉합 정도만 하더라?"
"제일 많이 쓰는 것부터 확실하게 익혀 두려고요."
"지금부터 슬슬 종류를 늘려 놔. 뛰어난 외과의라면 환자 상태에 가장 적합한 봉합을 골라서 쓸 줄 알아야 하니까."
"네!"
이영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최기석은 곰 인형을 들고 함몰 봉합과 유치 봉합, 쌈지 봉합을 차례대로 펼쳤다. 이영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속도를 늦추고 중간중간 설명을 덧붙였다.
"이젠 제가 해 볼게요."
이영호가 니들홀더를 들고 봉합에 나섰다.
그동안 봉합 실력이 올라간 덕분일까.
처음 해 보는 봉합임에도 제법 그림이 나왔다.
봉합 간의 간격이 균일한 편이고 조직에 가해지는 장력도 적당했다.
"잘하는데? 진짜 나중에는 날 따라잡을지도 모르겠다?"
"헤헤…… 정말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영호의 미소에 최기석도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영호를 가르치다 보니 일과가 끝났다.
드르르륵.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때마침 황지연을 마주쳤다.
"선배.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황지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와이셔츠 단추 몇 개가 풀어져 있어서 가슴골이 다 보였다.
"너도 수고했어."
최기석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오늘 수술실에서 정말 대박이셨어요. 레지 1년 차인데 퍼스트 자리에서 활약하셨잖아요. 다른 과에서 선배 이야기 들었을 때는 다 뻥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황지연이 방긋 웃으며 그의 곁에 섰다.
"일과도 끝났는데 저 커피 한 잔만 사 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최기석의 똑 부러진 대답에 황지연이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아잉. 선배. 다음부터는 이런 부탁 안 드릴게요. 아니면 제가 살까요?"
"둘 다 싫어. 난 바빠서 이만."
최기석은 철벽을 치고 당직실로 들어갔다.
"야. 문 좀 살살 열어."
서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해요, 선배.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당직실에는 웬일이야? 나한테 할 말 있어?"
"그게 아니라 당직 서려……."
최기석은 말을 하던 중 손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100일 당직이 이미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나 대신 당직이라도 서 주려고? 요즘은 101 당직이 유행인가?"
서지훈이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최기석의 실수를 알아차린 모습이다.
"봐주세요. 선배. 저도 힘들어요."
"농담이야, 농담. VIP 환자 수술은 잘 끝났다며?"
"김 선생님이 중간에 응급수술로 자리를 비웠는데 다행히 무사히 끝났어요."
"그럼 네가 퍼스트를 섰겠네?"
"네."
"괜히 노우드 팀에 들어간다고 했나 봐. 노우드 팀은 세이버 팀처럼 자리가 유동적이지 않거든. 나도 퍼스트 한번 서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서지훈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수술 난이도는 노우드가 몇 배나 높잖아요. 배우실 게 많을 것 같은데."
"그거야 그렇지. 권 교수님이 워낙 FM이니까. 오프는 잘 보냈고?"
"편히 쉬지는 못했어요.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메이죠 가는 것 때문에 그렇지? 솔직히 아쉽다. 너랑 붙고 싶어서 흉부외과에 왔는데."
"그런 거라면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 아닐까요?"
"무슨 뜻이야?"
"선배는 의진대에서 흉부외과 일을 시작했고 저도 곧 메이죠에서 일하잖아요. 출발선상은 같은 것 같은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
서지훈이 턱을 쓸어내렸다.
"수련 끝나고 미국에 계속 있을 거냐?"
"아니요.
다시 돌아올 거예요."
"이 악물고 공부해서 돌아와. 안 그러면 너 내 밑에 있을 거니까."
"선배도 긴장하시는 게 좋을 걸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선의의 경쟁심을 불태웠다.
서지훈과 대화를 나누다가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은 로봇 수술을 연습하는 날이다.
최기석은 도중에 생각난 것이 있어 상태창을 열었다.
NEW 패시브 스킬
[식스센스 Lv.1]
- 초감각을 통해 환자의 경과 및 수술 과정의 경과를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 경과에 대한 원인은 파악할 수 없으며 20퍼센트 확률로 발동됩니다.
- 이미 최대 레벨입니다.
'이거였구나.'
스킬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VIP 집도 중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승모판 치환술을 해야 하는데 성형술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 자신감이 없었다면 장혁필을 따라 치환술을 했으리라.
최기석은 상태창을 끄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식스센스.
발동확률이 높지 않고 원인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충분히 좋은 패시브다.
식스센스의 감각이 100퍼센트 확실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K 로젯으로 가면 돼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수술실 수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로젯에 들어갔다.
수술 세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로봇팔에는 필요한 장치들이 설치되었고 수술대에는 아침에 챙긴 소 심장이 놓여 있었다.
덜컹. 덜컹.
페달을 밟으며 소 심장에 시야를 맞췄다. 그리고 두 손에 핸들을 쥐고 본격적인 집도에 나섰다.
MIDCAB 같은 수술은 언감생심이었기에 여전히 기초적인 봉합에 초점을 맞췄다.
지이이이잉.
기계음과 함께 로봇팔이 심장을 향했다.
최기석은 왼손에 들린 메스로 심장 표면에 상처를 낸 후 봉합에 나섰다.
푸우우욱.
오른팔에 들린 바늘침이 상처의 단면에 파고들었다.
'휴우…….'
시야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봇 수술의 경우 촉감을 느낄 수 없기에 조작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한다.
다행인 것은 지난 삼 주간의 수련 덕분에 조작에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는 점이다.
상처에 봉합사를 통과시킨 후 왼손으로 바늘침을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봉합침을 다시 오른손으로 옮겨 상처 부위를 지그시 당겼다.
이어지는 한손 매듭.
신중한 동작으로 단순 단속 봉합을 성공시켰다.
페달을 움직여 봉합을 살피자 손으로 했을 때와 완성도가 비슷했다.
최기석은 자신감을 가지고 로봇 수련에 나섰다.
수직 매트리스 봉합, 수평 매트리스 봉합, 피부밑 봉합 등을 골고루 펼쳤으며 매듭법에도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이윽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수술대 앞에 섰다.
심장을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비록 속도는 느렸지만 봉합의 완성도가 급상승했다.
이만하면 간단한 로봇 수술은 직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기석은 수술대와 로봇을 정리하고 병원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야외 벤치에 앉아서 밤하늘을 응시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곧 의진대 병원을 떠나 메이죠에 간다는 사실이.
누군가가 이 모든 게 꿈이라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 사이에 상황이 급변할 줄은 몰랐으니까.
최기석은 벤치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쉬는 동안 틈틈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것은 고난이 따로 없다고 했다.
의사소통 문제부터 인종차별 문제,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불편까지.
한국에서는 문제가 아니었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다.
굳이 미국에 가서 사서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스스로에게 수차례 물어봤지만 정답은 예스다.
최기석은 색다른 환경, 색다른 사람들 속에서 의료 실력을 키워 보고 싶었다.
외과의를 키우는 것이 경험이라고 하면 경험은 최대한 많을수록 좋다.
더군다나 수련할 병원은 삼류병원도 아니고 메이죠 클리닉이다. 최신 의료의 집합체라 불리는 미국에서 최근 몇 년간 병원 평가 1위를 차지한 그 병원 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송명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메이죠에 가야 한다고.
안 그러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지이이이잉.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고서 그는 피식 웃었다.
이런 게 바로 이심전심이 아닐까 싶었다.
"네,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나야 별 일 없이 잘 지내죠. 최 선생은 준비 잘 하고 있어요?]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최기석은 오프 때 처리했던 일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병역 문제가 잘 해결돼서 좋네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메이죠가 저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송명진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 선생 실력이면 USMLE나 토플에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시험 치고 바로 미국으로 넘어와요. 결과 나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숙식하고 결과 나오는 대로 인터뷰 보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긴장되고 떨리죠? 내가 괜히 메이죠에 간다고 했을까 후회도 되고 말이에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장담합니다. 메이죠에서 수련을 시작하는 순간 분명 오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을 거예요.]
송명진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리고 여기서는 한국과 달리 경쟁하는 재미가 있어요.]
"경쟁하는 재미요?"
[메이죠에 실력 있는 수련의들은 흉부외과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어요. 대학병원에서조차 지원자가 없는 한국 흉부외과와는 완전히 다르단 말이죠.]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송명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최 선생이 분발하지 않으면 흉부외과 전공을 택할 수 없다는 거예요.]
송명진의 말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