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를 향해서 (4)
장혁필이 판막륜 성형술에 나섰다.
심장판막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려면 판막륜과 판막엽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문으로 비유하자면 판막륜은 문틀, 판막엽은 문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푸우우욱.
바늘침이 판막륜을 꿰뚫었다.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바늘침. 최기석은 포셉으로 바늘침이 판막륜을 통과하도록 도왔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혁필의 컨디션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승모판막 재건술까지는 체력이 버텨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마저 오산인 듯싶었다.
[잘했다. 고맙다.]
문득 마주친 장혁필의 시선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계속 가자."
장혁필이 판막륜에 운침하고 힘없이 늘어진 부분을 꿰매 나갔다. 평소답지 않게 속도가 더뎠지만 그 어떤 스태프도 토를 달지 않았다.
"교수님. 수술 시간이 생각보다 지연됐습니다. 적어도 30분 안에는 끝내야 부작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취의 신아름이 한마디 했다.
인공심폐기 사용이 길어질수록 환자에게 부담이 간다.
전신에 염증이 일어날 수 있고 심장 기능과 폐 기능이 떨어진다. 그래서 인공심폐기 사용 시 수술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30분이라, 빠듯한데?"
장혁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봉합에 나섰다.
찰칵!
최기석이 봉합사를 지르면서 판막륜 성형술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판막엽 성형술과 유두근육과 건삭의 복구다.
남은 시간에 비해 갈 길이 구만리다.
"판막륜은 어떻게 끝난 것 같은데 나머지도 성형술로 할 수 있다고?"
"네. 가능합니다."
"그럼 오랜만에 기석이 실력 좀 볼까?"
장혁필의 시선이 참관용 수술실을 응시했다.
참관용 수술실은 텅 비었다.
본래라면 조지환이 참관을 왔어야 하지만 급하게 미팅이 생기면서 자리를 비웠다. 즉 유동적으로 최기석에게 집도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
"가 볼까?"
"네!"
최기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볼까는 장혁필이 중책을 맡길 때 쓰는 신호다.
오늘 같은 경우 표면적으로 장혁필이 수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기석에게 집도를 맡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끼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쥐고 스킬을 사용했다.
[고속집도를 사용합니다. 수술에 관련된 처치 및 봉합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집니다.]
최기석은 봉합침으로 과감하게 판막엽을 찔렀다. 판막엽이 꿰뚫리면서 손에 야릇한 촉감이 남았다.
바로 운침할 때만 느낄 수 쾌감이다.
'30분 안에 끝내 주겠어.'
최기석의 두 눈에 뜨거운 열망이 감돌았다.
그는 봉합침에 이어 봉합사를 통과시키고 너널너덜해진 반대편 판막륜에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판막엽 성형술.
최기석은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우선 판막륜과 판막엽의 연결 부위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었고 너널너덜해진 판막엽의 형태를 잡아 나갔다.
'참 나. 미쳤군.'
장혁필은 최기석을 도우며 혀를 찼다.
피부 봉합과 달리 심장판막 봉합에는 훨씬 더 섬세한 손기술이 요구된다.
잘못하면 심장판막이 파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기석은 심장판막 봉합을 피부 봉합하듯이 해치웠다.
손놀림은 무심하면서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포셉으로 봉합한 부위를 건드려 봤는데 봉합사의 장력이 잘 살아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최기석의 판단력이다.
솔직히 승모판막 성형술을 할 생각은 없었다.
판막륜과 판막엽 성형만 하고 최기석을 설득해서 인공판막 치환술을 할 계획이었다.
'정말 가능했구나.'
장혁필의 시선이 최기석의 손에 고정되었다.
최기석은 유두 근육을 끌어 당겨서 망가진 건삭(유두 근육에 붙어서 판막이 좌심방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는 부위)의 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성형술의 핵심.
복구하기 힘든 건삭에 집중하지 않고 주변 근육으로 건삭을 돕는 것이다.
그 발상의 전환이 놀랍다.
찰칵!
가위질에 봉합사가 잘렸다.
"휴우…… 어떻게든 시간은 맞춘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계를 응시했다.
다행히 20분 만에 승모판 재건술을 끝마쳤다.
수술 부위를 빠르게 닫는다면 인공심폐기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기왕 신세진 김에 마무리까지 부탁해."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수술 과정의 역순을 따라 봉합 부위를 닫았다.
핵심적인 처치가 끝나서인지 뒤처리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봉합사, 거즈, 커튼 볼 카운팅 이상 없습니다."
"인공심폐기 오프합니다."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환자감시장치에 집중되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환자감시장치의 수치들이 서서히 올라갔다. 환자의 바이탈이 정상수치를 유지하자 스태프들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최초로 심장종양 수술을 성공시켰습니다. 보상으로 2,000 P.
P를 제공합니다.]
[세이버 팀의 수술 숙련도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신규 패시브 스킬, 식스센스가 형성되었습니다.]
[영혼의 활성 스택이 상승하였습니다.]
[영혼 활성(40/700).]
쉴 새 없이 알림이 터졌다.
* * *
본관 1층 카페.
장혁필과 최기석, 이영호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병동 콜을 받은 황지연만 자리에서 빠졌다.
"고생 많았다. 덕분에 한 고비 넘겼어."
장혁필은 웃으며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최기석은 누가 뭐래도 오늘 수술의 1등 공신이다.
김태식의 빈자리를 잘 메워 주었으며 본인 대신 승모판막 수술까지 마쳤다.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살펴도 이만한 능력을 가진 레지 1년 차는 없으리라.
"아닙니다. 고생은 교수님이 더 심하셨죠. 컨디션도 안 좋으셨는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중간에 수술실 뛰쳐나오고 싶은 걸 여러 번 참았다."
장혁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봉합 속도가 장난이 아니던데?"
"예전에 곰 인형으로 연습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믿기지 않아. 곰 인형을 봉합하는 거랑 심장판막 봉합하는 건 아예 급이 다른데……."
"운도 많이 따라 준 것 같습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늘 수술에 수훈장은 고속집도 스킬과 유니크 젬이다.
고속집도로 수술 속도를 단축시켰고 거기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를 유니크 젬으로 보완했다.
첫 CABG 집도를 성공시키고 얻은 봉합의 견고함을 2배 증가시켜 주는 젬 말이다.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는 시너지가 참 좋다.
"그럼 저도 열심히 하면 선배처럼 할 수 있는 거죠?"
잠자코 있던 이영호가 대화에 껴들었다.
"당연하지."
"헤헤.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한 인물이 자리에 합석했다.
대동맥 파열 환자 수술 때문에 중간에 로젯을 비웠던 김태식이다.
"수술은 잘 끝났어?"
"네. 무사히 끝났습니다. 환자가 응급실에 일찍 와서 파열 정도가 심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이라면 해내실 줄 알았어요."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가진 고속집도의 원조가 김태식이다.
그래서 김태식이 응급수술에 실패할 거라는 걱정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수님도 VIP 수술은 잘 끝내셨습니까?"
"물론. 나 대신 기석이가 고생하기는 했지만."
장혁필은 김태식이 자리를 비웠을 때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기석이가 그 정도까지 올랐을 줄은 몰랐습니다. 할 수 있다면 수술 동영상을 보고 싶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칭찬에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저기……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저번에 메이죠 병원 이야기를 드렸는데 의진대를 떠나는 시기가 앞으로 당겨질 것 같습니다."
"얼마나?"
"스케줄이 된다면 다음 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말에 USMLE 시험과 토플 시험을 치고 다음 달 초에 미네소타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뭐야? 그렇게 빨리? 그렇게 의진대를 떠나고 싶었어?"
"그…… 그건 아닙니다. 단지……."
"됐어. 농담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장혁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붙잡아도 소용없는 거 안다. 과장님한테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다음 주에 그만두는 걸로 알고 있어."
"감사합니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버 팀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에 쏙 빠지게 되었다.
장혁필이나 다른 팀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이번 주에 있는 세이버 수술까지만 잘 도와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를 대체할 사람은 찾으셨나요?"
"당연하지. 섭외하느라 애 먹었다."
"혹시 그게 누구인지……."
"잘 생각하면 답이 나올 걸?"
장혁필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은 일과 잘 마무리하고 태식이는 나랑 연구실로 가자."
"네."
최기석은 이영호와 병동으로 향했다.
"선배. 너무 하세요!"
이영호가 얼굴을 찌푸렸다.
참아 왔던 감정이 뱃속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그동안은 간신히 눌러왔지만 최기석이 다음 주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저한테 처치랑 술기 가르쳐 준다고 하셔놓고 이렇게 메이죠로 가는 건 반칙 아니에요?"
"미안하다."
"솔직히 선배 보고 흉부외과로 왔는데……."
변명할 여지가 없는 상황, 최기석은 그저 말없이 이영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영호야."
"……."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네가 나한테 실망해서 욕해도 받아들일게. 하지만 말이야. 비록 내가 네 옆에는 없다고 해도 우리 관계가 끊어지는 건 아니야. 난 여전히 네가 실력 있는 흉부외과의가 되기를 바라고 네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거니까."
"정말이…… 요?"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미국에 가서도 논문은 계속 보낼 테니까 읽고 감상문 보내.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봉합 연습하는 것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 주고."
"……."
"그러면 내가 네게 부족한 부분들을 알려 줄 수 있잖아? 미국에서도 있는 힘껏 너를 도운다고 약속할게."
"……네."
진심이 통했는지 이영호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약속 안 지키시면 선배, 진짜 미워할 거예요."
"짜식. 걱정 마."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저도 이제야 말하는 건데 솔직히 예전부터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어떤 느낌?"
"선배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을 떠날 것 같다고요. 우리나라 흉부외과는 미래가 없잖아요. 실력도 있고 기회도 있다면 굳이 우리나라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정말 그럴까? 난 뜻이 있는 사람들이 뭉치면 바뀔 여지는 있다고 봐."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나도 예전부터 너한테 받은 느낌이 있는데……."
"무슨 느낌이요?"
"네가 멋진 흉부외과의가 돼서 나를 도와주고 내가 못 한 수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에이.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떻게 선배를 이겨요?"
"그치? 그건 아무리 봐도 하극상이지?"
최기석의 농담에 이영호가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침에 지연이랑 휴게실에 있던데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별 이야기는 안 했는데? ABGA를 못하겠다고 해서 요령 좀 알려 줬지.
최기석은 황지연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행동은 상당히 미심쩍다. 아침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는 깨달았기에.
"지연이 의대 시절에는 어땠어?"
"지연이요. 아휴. 말도 마세요."
이영호가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