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를 향해서 (2)
'훌륭하네.'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총 보상은 1,500 P.
P.
신체강화를 2배 상승시켜 주는 유니크 젬.
마지막으로 한승우와의 라포 1단계 상승이다.
추가로 현금 500만원까지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다.
잠시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들. 왜 이렇게 늦었어?"
"갑자기 약속이 잡혀서. 아빠는 아직 안 왔어?"
"오늘 회식 있어서 늦어. 준기는 원래 자정 다 돼야 오고. 저녁은 먹었어?"
"먹기는 했는데 또 배고프네."
"그럴 줄 알고 갈비찜 해 놨어. 엄마랑 같이 먹자."
어머니가 식탁에 푸짐한 상을 차렸다.
식탁에 놓인 반찬을 한 번씩 먹은 것 같은데 밥 한 공기가 어느새 뚝딱 사라졌다.
"엄마. 한 그릇 더."
"그래. 우리 아들 많이 먹어."
최기석은 갈비찜을 한 점 뜯고 밥을 한 숟가락 들었다.
병원 밥, 나가서 사 먹는 밥에서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진짜 맛있다."
"정말?"
"역시 준기는 엄마 손을 닮아서 요리하겠다고 한 거라니까."
그의 말에 어머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엄마가 미안했어.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막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미국에 간다니까 걱정이 돼서."
"괜찮아."
최기석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사실 미안한 건 나지. 일방적인 결정이고 미국에 가면 계속 떨어져 지내야 하잖아? 얼굴 보기도 힘들고."
"……."
"하지만 엄마."
그는 본인의 손을 어머니에 손에 포갰다.
"난 진짜 실력 있는 흉부외과의가 되고 싶어. 할 수 있는 한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 고집불통이라도 엄마가 이해해 줘."
"그래.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렴. 끝까지 지켜봐 줄 테니까."
"고마워."
최기석은 어머니의 따뜻한 눈빛을 받으며 밥 두 공기를 비웠다.
* * *
이른 아침.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환복하고 병동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한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 속에 있는 것은 바로 USMLE와 토플 교재다. 짜투리 시간에 최대한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다.
얼마 전 봉제 인형 임무를 끝냈고, 당분간 논문을 보내지 않겠다는 송명진의 메일을 받았다.
모처럼 생긴 여유시간.
거기에 100일 당직 해방으로 생긴 시간까지.
공부하기에는 최적이다.
"안녕하세요."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이예림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최 선생님. 괜찮으면 시간 좀 내주실래요?"
"그럼요."
두 사람은 스테이션과 제법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있잖아요. 그…… 그 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요."
이예림이 말을 꺼내고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최기석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박에 눈치챘다.
"어때요? 잘 진행되고 있죠?"
"네. 최 선생님 덕분에 문제없이 진행 중이에요. 브랜치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그 사람 얼마 전 병원에서 잘렸대요."
"고소당한 것 때문에요?"
"그것도 한 가지 이유고 한 선생이 처치한 환자들이 계속 죽을 뻔했대요. 스크럽 때는 졸다가 환자 쪽으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최기석이 혀를 찼다.
한민우의 의료사고는 예정된 수순이다.
본원에서야 민주혁이나 그가 한민우의 몫까지 책임졌지만 브랜치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워낙 일손이 부족해서 치프까지 자잘한 처치에 나서야 하기에.
"어쨌든 잘됐네요. 어쨌든 그 인간 앞으로 흉부외과 쪽으로는 발붙이지 못할 겁니다. 그건 제가 맹세할게요."
"고마워요. 최 선생님. 최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전 나쁜 마음을 먹었을지 몰라요."
"아니에요. 다 이 선생님이 잘 이겨 낸 덕분이죠."
"그런가요?"
이예림이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최기석은 대화를 마치고 병동 복도를 걸었다.
드르르륵.
당직실에 들어가자 서지훈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는 중이다.
지난 이틀간의 당직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서지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성대 시절의 100일 당직은 지옥이었다. 2, 3시간 쪽잠을 자며 하루를 버티는데 체력이며 정신력이 제대로 붙어있을 리 없었다.
최기석은 서지훈을 보며 새삼 환자 바라기에 감사했다.
환자 바라기가 없었다면 그동안의 초인적인 스케줄을 이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당직실 문을 닫고 회의실을 찾았다.
"선배, 안녕하세요."
이영호가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안녕."
"이틀 동안 잘 쉬셨어요?"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다. 딱히 쉰 것 같지 않은데?"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지훈 대신 당직의 루틴 잡을 처리해 나갔다.
"으음…… 제 생각에 선배는 오프 중에도 환자를 치료했을 것 같은데 맞죠?"
"……너 족집게다?"
"선배가 워낙 환타니까요."
이영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주고받고서 서로의 일에 몰두했다.
'아…… 역시.'
루틴 잡을 끝내고 황기정의 차트를 살폈다.
그는 내시경 검사와 조직검사를 통해 식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이걸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문득 장혁필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영호가 자리를 비우면서 회의실에 최기석만 남았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예요?"
최기석이 먼저 물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혹시 장혁필이 구한 세이버 수술 대타인가.
"안녕하세요. 저는 황지연이에요. 최 선배 안 계실 때 온 인턴입니다."
황지연이 머리를 쓸어내리며 눈웃음 쳤다.
"내가 없을 때 왔다고?"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알기로 이번 달 흉부외과 인턴은 픽스턴인 이영호와 권정석이다. 그런데 황지연에 말에 따르면 그녀가 권정석 대신 일하게 됐다는 것 아닌가.
매우 드문 일이다.
과를 처음부터 바꾸는 경우는 있지만 중간부터 바꾸는 일은 거의 없기에.
"특이한 케이스네?"
"네. 정석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스태프들 허락받고 옮겼습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데?"
"제가 병동 일을 하는데 ABGA가 잘 안 돼서요. 영호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자리에 없어서……."
"그럼 같이 가자."
"감사합니다."
황지연이 씽긋 웃었다.
최기석은 그녀와 병실로 이동했다.
ABGA를 놓아야 할 환자는 60세 여자 환자로 팔목이 가늘었다.
"피 검사 해야 하는 거 아시죠? 안 아프게 금방 해 드릴게요."
"안 아프게? 세상에 안 아픈 주사가 어디 있어?"
환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조금 다를 겁니다."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알렌 테스트를 했다.
팔 아랫부분 바깥 쪽 있는 요골동맥에 폐쇄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다.
"실린저."
"네."
최기석의 말에 황지연이 드레싱 카트 위에 놓인 주사기를 건넸다.
"……선배. 왜 그러세요?"
"아니. 별거 아니야."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주사기를 받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는 뭘까.
분명 뭔가 이상한데 그 이상한 게 무엇인지는 잡아낼 수 없었다.
"멍 때리지 말고 잘 봐 둬. ABGA 못하면 인턴 내내 고생하는 거 알지?"
"네."
푸우우욱.
최기석은 혈관을 소독하고 주사침을 60도 각도로 삽입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가 발동됩니다.]
[주사와 관련된 처치를 100퍼센트 성공하며 환자의 통증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주사기를 가볍게 당기자 붉은 피가 차올랐다.
최기석은 주사기를 황지연에게 건네고 알콜솜으로 혈관을 지그시 눌렀다.
"어르신. 5분 정도 누르고 계세요."
"오메. 근데 진짜 안 아프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안 아플 거라고."
최기석은 처치를 끝내고 황지연과 휴게실로 향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황지연이 그가 건네 캔 커피를 받아 소파에 앉았고 최기석이 그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잘 봤어?"
"역시 선배는 대단하세요. 손을 한 번도 안 떠시던데요?"
"그래야 엄한 부위를 안 찌르지. 정 손이 떨리면 잠깐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바늘을 찔러. 그러면 성공률이 올라갈 거야."
"네. 명심할 게요."
황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바로 옆자리로 다가왔다.
갑자기 거리가 좁혀지자 당황스러웠다.
"선배는 어떤 스타일의 여자 좋아하세요?"
"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요."
말과 달리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딱히 이상형 같은 건 없어."
"그럼 저는 어때요?"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러는데?"
"솔직히 저는 선배가 마음에 들거든요. 잘생긴데다가 실력도 좋고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선배랑 사귀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황지연의 당돌한 대시에 최기석은 말문을 잃었다.
"너 진짜 당돌하구나."
"의대 다닐 때부터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하아……."
그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의대 후배라고는 하지만 황지연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했다.
아무래도 이영호에게 황지연이 어떤 인간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관심은 고마운데 난 여자친구가 있어. 오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자."
"아…… 여자친구가 있으시구나. 근데 그게 뭐 어때서요?"
"뭐라고?"
"애인이 있다고 이 세상에 있는 여자를 안 만나실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선배도 알다시피 연인 사이라는 건 의외로 쉽게 깨지기도 하고."
"난 더 할 말 없다."
최기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당직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서지훈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아…… 기석이냐?"
서지훈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선배. 피곤하시죠?"
"겨우 이틀째인데 죽을 것 같다. 앞으로 이 짓을 98일이나 더 해야 한다니……."
"힘내세요. 선배는 할 수 있습니다."
최기석이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격려를 사용하자 서지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회의 시간 다 됐으니까 같이 가시죠."
"벌써? 나 루틴 잡 못했는데?"
"그건 제가 했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고맙다."
두 사람은 곧바로 회의실을 찾았다.
* * *
오전 회의와 회진이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스케줄을 확인하고 성형외과로 내려갔다.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어서 성형외과가 협진 요청을 냈다.
성형외과 병동 복도를 지나 한 병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흉부외과에서 온 최기석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30대 남자 환자 허윤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허윤후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이마 부근의 피부는 누런빛을 띠었으며 얼굴 왼쪽 면은 빨갛게 익었다.
"한 이틀 정도 된 것 같은데요.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힘들어서."
"병원에서 아픈 걸 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최기석은 허윤후의 환자복 상의를 들췄다. 몸에는 화상이 없어서 심음과 폐음이 전부 정상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순환기내과에서 포터블 EKG를 빌려 병실로 가져왔다.
이어진 심전도에서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최기석은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입을 열었다.
"심전도 결과도 확인하고 엑스레이 찍은 것도 살폈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왜 아픈 거죠? 너무 답답한데."
"제 생각에는 심리적인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시고 갑자기 불안하지 않은가요?"
"맞아요."
"아마 화상을 입으셨을 때의 심리적인 충격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심장이나 폐질환이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시고요. 주치의와 이야기해서 추가적인 처치를 해 드리겠습니다."
"……네."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 때마침 반대편에서 주치의가 다가왔다.
반갑지 않은 얼굴이자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남강준을 이용했던 비열한 인간이.
"오랜만이다."
조태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