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
"형, 무슨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별거 아니야."
최기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대기 중인 인원들이 많았다. 번호표를 먼저 뽑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강성범과 잡담을 나누다 보니 금방 차례가 돌아왔다.
최기석은 번호표를 발급받고 신원확인을 마쳤다. 이후 로카 룸에 들어가서 검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참 나."
환복하고 거울 앞에 서자 웃음부터 터졌다.
수술복에 의사 가운을 걸쳤던 그가 지금은 병무청 로고가 찍힌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채 슬리퍼까지 신었다. 이 모습을 동료들이 봤으면 자지러졌으리라.
최기석은 강성범과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향했다.
"나라사랑카드랑 계좌 발급해 드릴까요?"
"계좌는 필요 없습니다."
강성범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계좌랑 연동이 안 되면 공중전화 이용과 사이버지식정보방의 이용 등이 불편하세요. 10명에 9명은 다 발급받는 카드예요."
"전 상관없어요. 현역으로 안 갈 거니까요."
"아…… 네."
강성범의 대답에 여직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최기석은 강성범과 달리 계좌를 연동한 나라사랑카드를 발급받았다.
현역으로 뛸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발급받아서 손해될 것은 없었다. 혹시라도 4급이 나온다면 신병교육대에서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윽고 기초 신체검사가 시작되었다.
대기열이 길었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다.
"근데 형도 어디 아프세요?"
강성범이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켰다.
"나 심장이식 수술 받았다."
"우와, 대박. 진짜요? 몸은 괜찮아요? 일상생활은 할 수 있어요?"
"약 먹고 관리만 잘하면 괜찮아."
"그럼 형도 면제네요. 크크크큭. 불쌍한 자식들."
강성범이 채혈 검사 받는 남자들을 응시했다.
시간이 흘러 소변 검사, 혈압 측정, 엑스레이 검사 등이 끝나고 각 과별 판정이 남았다.
건강에 이상 없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고 의무기록을 가져온 사람만 병무청 신체검사의와 마주했다.
최기석은 다른 과를 전부 통과한 후 심장내과의 앞에 앉았다.
"어디 아파요?"
이태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심장이식이요? 자료는요?"
"여기 있습니다."
최기석이 봉투를 내밀자 이태진이 의무기록을 쭉 훑었다.
이태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이태진의 판단에 병역이 갈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쪼그라들 수 밖에 없었다.
"고생 많겠네요. 면역억제제는 잘 챙겨 먹고 있죠?"
"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대학원생이에요?"
"그게…… 의진대 흉부외과 레지던트입니다."
"의사를 하고 있다고요?"
이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상생활도 쉽지 않을 텐데 의사라니…… 그것도 흉부외과라……."
"이식 수술을 받고 나서 흉부외과에 더 가고 싶어졌습니다."
"흐음…… 경과가 그만큼 좋은 건가?"
이태진이 턱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가 봐요."
이태진의 손짓에 자리를 떠났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병역판정만이 남았다.
최기석과 강성범은 나란히 앉아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판정은 잘 받았어?"
"그럼요. 의사가 제 말을 잘 들어주던데요. 분위기가 완전 화기애애했어요."
강성범이 웃으며 대답했다.
삐비비빅.
[축하드립니다. 현역 대상 1급입니다.]
삐비비빅.
앞서 불려 간 사람들이 축하 속에 현역판정을 받았다. 대부분이 담담하게 돌아섰지만 일부는 실성한 듯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마치 고전 격투 게임 캐릭터 아가미 이오리처럼…….
"강성범 씨. 앞으로 나오세요."
"네!"
강성범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데스크로 향했다.
디스크 수술 및 후유 장해 자료는 완벽하게 준비했으며 검사의와의 분위기도 좋았다. 그래서 현역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나라사랑카드를 인식기에 대자 전자음이 들렸다.
삐비비빅.
[축하드립니다. 현역 대상 3급입니다.]
"역시…… 엥?"
강성범은 모니터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내가 3급이라니!
"저기요.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요."
"판정은 제대로 됐습니다. 돌아가세요."
"아니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확인 좀 하게 해 주세요."
"모니터에 나온 그대로예요."
여직원의 말에 강성범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가 나서 정형외과 검사의에게 다가가 따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제 풀에 지쳐 자리에 앉았다.
"최기석 씨."
"네."
최기석은 데스크로 이동해서 나라사랑카드를 인식기에 댔다.
삐비비빅.
[불합격입니다. 제2국민역입니다.]
모니터를 확인한 순간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제2국민역은 기초훈련을 받지 않으며 1년에 한 번씩 민방위 훈련만 받는다. 불참할 경우 과태료만 내면 되기 때문에 해외 생활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우와. 불합격이래."
"부럽다."
대기 중인 사람들이 감탄 섞인 시선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불합격, 그것이 바로 징병검사장에서 받는 불합격이다.
"형…… 진짜 부럽……, 아.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넌 4급 나올 거라고 장담하더니 왜 그래?"
"모르겠어요. 정치인 아들 자리 하나 빼줄려고 절 떨어트린 게 아닐까요?"
강성범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거……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
최기석이 강성범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환복을 끝내고 병무청을 나왔다. 지루하고 길었던 검사가 끝나고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 내가 살게."
"형이 사 주는 건 안 먹을 거예요."
강성범이 장난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건 농담이고 선약이 있어서요. 먼저 갈게요."
"그래. 고생했다."
최기석은 강성범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고 강성범 역시 그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스쳐 가는 인연이라는 걸 서로 잘 알았다.
지이이이잉.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도중 정설화에게 메시지가 왔다.
[학회 뒤풀이가 생겼는데 빠질 수가 없어. 미안. 오늘은 못 볼 것 같아.]
최기석은 괜찮다는 답변을 보내고 한숨을 쉬었다.
약속이 깨지면서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 오프 마지막 날인데 푹 쉬자.'
마음을 편하게 먹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라서 자신도 모르게 등을 곧추세웠다.
"여보세요."
[최 선생. 잘 지냈어?]
"누구시죠?"
[나야, 나. 응룡이 아빠.]
상대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한승우다. 100일 당직 중 성형외과의 대신 그의 상처를 꿰맨 적이 있었다. 이후로 몇 번 통화를 했지만 번호 저장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웬일로 전화하셨어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 응룡이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최 선생이 생각나서.]
한승우가 호탕하게 웃었다.
[괜찮으면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하지? 내가 통 크게 쏠 테니까.]
"통 크게 쏘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죠."
[일단 서초동으로 넘어와서 다시 전화해. 내가 애들 보낼게.]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택시를 탔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기 아쉬웠는데 마침 연락이 잘 왔다.
서초역에 도착해서 전화하자 곧 고급 승용차가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췄다.
"혹시 최 선생님이십니까?"
한 남자가 조수석에서 내려 물었다. 남자는 정장을 입었으며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워낙 풍채가 좋아서 그쪽(?) 사람이라는 걸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아, 네. 맞는대요."
"타시죠.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자의 안내를 받아 후방 좌석에 탔다.
이윽고 승용차가 좁은 골목을 지나 유흥가에 도착했다.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이트클럽과 술집 간판들이 요란한 빛을 뿜어냈다.
"최 선생님이 의사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형님 마음에 드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단둘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지만 형님이 병원에서 깽판 치고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저랑 만났을 때도 입이 조금 험하긴 했죠. 그래도 난리 칠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거야 최 선생님이 치료를 잘했기 때문이죠. 형님한테 맞아서 이가 부러진 의사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승우 형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가 아는 한승우의 정보는 단편적이다.
응급실에서 본 외모나 대화에서 은근히 풍기는 분위기로 봤을 때 조폭이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다.
"형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빽도 없이 말단에서 행동대장까지 올라오셨거든요. 성격이 불같기는 하지만 아랫사람들을 잘 챙겨 주셔서 다들 좋아합니다.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죠."
남자가 먼저 내려 에스코트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일식집 분위기를 풍기는 주점에 도착했다.
주방은 오픈 되어 있었으며 몇몇 손님들이 식사 중이다.
남자를 따라 가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 커다란 룸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최기석이 안으로 들어가자 한승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선생. 왔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룡이는 잘 지내고 있죠?"
"암. 물론이지. 이젠 친구 응칠이까지 생겼어."
한승우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양쪽 팔을 내밀었다. 한쪽 팔에만 있던 용 문신이 양팔에 새겨져 있었다.
"친구도 잘 생겼네요."
"그렇지? 어여 앉아."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고급 회와 밑반찬이 깔렸다.
더불어 가슴과 허벅지가 드러난 복장을 입은 여성들이 두 사람의 옆에 앉았다.
"한 잔 할까?"
"네.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서 술은 많이 못 먹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그거야 어쩔 수 없지."
한승우의 눈짓에 옆에 앉은 여자들이 술을 따랐다.
채애애애앵.
최기석은 잔을 부딪치고 술은 단번에 털어 넣었다.
"이거 맛이 특이하네요?"
"당연히 그래야지. 큰형님이 중국 갔다가 사온 비싼 술이니까."
"오빠, 이분은 뭐하는 분이에요? 귀엽게 생긴 게 내 스타일이다."
"현경이 이년은 꼭 누구만 데리고 오면 자기 스타일이래. 근데 이 친구는 네가 손댈 사람이 아니다."
"왜요? 내가 어때서요?"
옆에 앉은 이현경이 최기석을 보며 눈웃음 쳤다.
진한 화장과 강렬한 향수 냄새.
고혹적인 얼굴과 야한 복장이 한데 어울러져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머. 방금 눈 돌린 거 맞죠? 진짜 귀엽다."
"헛수작 부리지 말라니까? 최 선생은 의사야. 우리 같은 부류랑 완전히 다르다고."
"의사요? 어디 병원이요?"
"넌 몰라도 돼."
한승우가 선을 긋자 이현경이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한승우와의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최기석은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한승우의 말을 들어 주었다.
조폭인 그와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술은 첫 잔 이후로 손도 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도 친해지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최기석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화에 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람은 술자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왔다.
"주량이 대단하시네요. 혼자서 두 병은 비우신 것 같은데."
"암, 그래야지. 내가 그동안 이 바닥 생활하면서 깨달은 건데 술 잘 마시는 놈치고 일 못하는 놈 없어. 아. 물론 최 선생은 제외하고."
한승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건 그렇고 현경이 별로야? 우리 업소 에이스를 붙여 줬는데 반응이 영 신통치 않네?"
"제가 이런 쪽으로는 밝지 않아서요. 여자친구도 있고."
"허! 순진하기는. 그건 그렇고 아깝네. 현경이 반응을 보아하니 거기까지 갈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승우가 엄지로 등 뒤의 모텔을 가리켰다.
"2차는 어때?"
"이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최 선생은 출근해야지?"
한승우가 발로 꽁초를 비벼 껐다.
그런데 바로 그 때다.
세 명의 덩치 큰 남자가 골목에 들어섰다.
불안하게도 그들의 발걸음은 정확하게 두 사람을 향했다.
"우리 승우.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
눈 찢어진 사내가 이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