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46화 (145/407)

해방 (5)

"드디어 왔구나."

최기석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섰다.

무려 1년 3개월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감회에 젖어 제자리에 서 있다가 뒤늦게 걷기 시작했다.

출근시간이 지난 아침, 아파트 단지는 고요했다.

빗질하는 경비아저씨와 산책하는 몇몇 중년 여성만 보일 따름이다.

삐비비빅.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서서 도어락을 열었다.

집은 고요했다.

부모님은 출근했으며 동생은 유명 레스토랑에서 근무 중이다.

앞으로 반나절은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

"왈! 왈! 왈!"

장군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가 그를 발견하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너무 하잖아."

최기석은 손에 든 봉투를 소파에 던진 후 두 손으로 장군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등장이 못마땅한지 장군이는 시선을 피하며 혀로 코를 핥았다.

"못 본 사이에 진짜 돼지 됐네."

피식 웃으며 장군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자 장군이가 창가 쪽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웠다.

이른바 개무시.

하지만 오늘은 개무시마저 반가웠다.

최기석은 욕실에서 샤워하고 편안한 복장으로 집 안을 훑었다.

그사이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거실 한쪽 벽면에 붙은 스크랩 기사들이다.

전부 그에 관한 기사다.

매스컴을 탄 아들이 자랑스러웠는지 어머니가 따로 작업 한 모양이다.

최기석은 기사들을 훑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쉬웠다.

고아였던 예전 삶과 달리 지금은 가족이 있다.

그럼에도 의사 생활로 가족과 정을 나누거나 추억을 쌓지 못하고 있었기에. 거기다 메이죠에서 수련한다면 같은 상황이 반복되리라.

최기석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진정한 흉부외과 의사가 되는 길, 그 과정 중에서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방에 들어가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다들 일하고 있기에 전화는 꺼려졌다.

"후아……."

최기석은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당직실 침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푹신했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콜폰이 없는 지금, 세상 편하게 자 보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평소에 일하던 시간이라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파에 두었던 교재를 챙겨 왔다.

제일 먼저 살핀 것은 USMLE 교재다.

Step 1은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등의 의료 기초 과목들을 평가한다.

시험시간은 8시간으로 총 322개의 문제를 푼다.

Step 2 CK는 한국의 의사고시와 비슷하다. 다만 한국 의사고시의 문제가 내, 외, 소, 산, 정에 집중된 것과 달리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가 출제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정도야, 뭐."

최기석은 교재를 훑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한국에서 보는 미국 의사고시는 두렵지 않았다. 의대 시절 공부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토플 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토플 교재 역시 무난하게 읽혔다.

외국어 학습 능력 2배 상승 젬과 외국어 회화 능력 2배 상승 젬.

이 두 가지 젬 그동안의 공부로 영어 수준이 확 올라갔던 덕분이다.

"시험은 문제없겠는데?"

최기석은 피식 웃고 말았다.

* * *

그날 저녁.

고급 승용차가 레스토랑 주차장에 멈췄다.

이윽고 최기석과 가족들이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의 오프를 축하하기 위해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분명 다들 좋아할 거예요."

동생 최준기가 자신 있게 앞장서고 그 뒤를 가족이 따랐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2층 창가에 도착했다. 주변 경관이 다 보이는 명당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생 덕분에 이런 데도 와 보네?"

최기석은 주변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곳은 유명 셰프가 운명하는 곳이자 최준기의 일터였다.

아버지가 코스 요리를 주문한 후 본격적인 가족들의 시간이 찾아왔다.

"병원 생활은 어떠냐?"

무뚝뚝한 아버지가 먼저 물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지금은 할 만해요. 앞으로는 더 할 만해질 거예요."

"그거 다행이구나."

"엄마는 우리 기석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도 그 힘든 의사 생활을 잘 이겨 내고 있잖아. 주변에서도 다 대단하다고 하더라."

"다들 걱정해 준 덕분이지."

최기석은 멋쩍게 웃으며 부모님과 동생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모두 건강한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그는 평소에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 민감한 편이다.

건강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그 사실을 병원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면역억제제는 잘 먹고 있어?"

"한 번도 빠트린 적 없어."

"요즘 의진대 흉부외과가 이슈가 많이 되던데, 바쁘지는 않니?"

아버지가 화제를 돌렸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바쁘지만 견딜 만한 수준이에요."

최기석은 눈을 마주치며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실제 업무량을 알려 주면 다들 까무러칠 것이다.

"아버지 일은 어떠세요?"

"나도 별 문제 없다."

아버지가 짧게 대답하고 물을 마셨다.

"엄마는요?"

"내가 무슨 일이 있겠니? 그리고 있었으면 벌써 네 귀에 들어갔겠지."

어머니의 말에 최기석과 최준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성격이 정반대다.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반면 어머니는 활발한 성격으로 본인의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나도 잘 지내. 아직은 설거지하고 재료 준비가 일이지만 바로 윗선배가 기술도 조금씩 알려 주고 있고."

"그래. 잘 됐다."

"기석이가 잘나가는 흉부외과 의사 되고 준기가 유명 셰프 되면 우리 집안 활짝 피겠네."

"꼭 그렇게 되어야지."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은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 자리, 이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에피타이저 나왔습니다."

여종업원이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지현 씨, 소개는 내가 할게요."

최준기의 말에 여종업원이 윙크를 날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건 표고버섯이 들어간 게살 스프고, 이건 키위 드레싱이 들어간 연어 샐러드, 이건 더블크림치즈를 얹은 마늘빵이에요."

"역시 예비 셰프는 다른데?"

"이 정도야, 뭐."

최기석의 칭찬에 최준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최기석은 처음 맛보는 고급 코스요리에 혼을 빼앗겼다.

나오는 음식들이 각기 다른 미각을 뽐내며 그의 혀를 농락했다. 코스요리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던 게 미안할 정도였다.

나중에 정설화와 다시 찾아오면 좋으리라.

시간이 흘러 디저트 타임이 찾아왔다.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최기석은 운을 떼자 가족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전 메이죠 병원 흉부외과 과장님께 연락을 받았어요. 메이죠 병원에서 수련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메이죠? 처음 듣는 이름인데…… 외국 병원이니?"

"네.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 병원이에요. 쉽게 미국 최고의 대학병원이라고 보시면 돼요."

아버지의 질문에 답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의진대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메이죠 병원에 가 보고 싶어요."

최기석의 폭탄선언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족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최고의 병원에서 수련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반대야."

어머니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데 미국까지 가는 건 무리야. 언어 문제도 있을 거고 인종 문제도 있을 텐데…….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마."

"엄마.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갈지 몰라."

사실 그가 메이죠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송명진의 덕이다.

송명진이 아니라면 레지던트 1년 차조차 끝내지 못한 동양인이 어찌 메이죠에 들어가겠는가.

만약 송명진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메이죠 행은 영영 불가능하다.

"가서 생활할 계획은 다 세워 뒀니?"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네. 국내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면 되요. 송 과장님 집에서 생활하다가 인터뷰 합격하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되고요."

"……그럼 해 봐라."

"여보!"

"당신 기석이 수술 받을 때 우리 둘이 약속했던 거 잊었어?"

아버지의 언성이 처음으로 올라갔다.

"기석이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잖아. 살아 돌아온 것도 기적이니까, 다시 또 쓰러질지 모르니까 본인 인생은 본인이 즐길 수 있게 해 주자고 말이야."

"……."

"애초에 의사하겠다는 걸 말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 아니었나?"

"그거야……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하게 내버려 둡시다. 우리가 할 일은 기석이를 지켜보는 일이지 갈 길을 정해 주는 게 아니에요."

"……알았어요."

"저도 찬성이에요. 어차피 두 분이 말린다고 해도 안 갈 형이 아닐걸요?"

최준기가 최기석을 보며 씽긋 웃었다.

"그럼 이제 정리 끝났어. 네 미국행은 온 가족이 찬성이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북받치는 감정을 참았다.

가족들의 믿음, 반드시 결과로 보답하겠다고 다짐하며.

* * *

다음 날.

최기석은 서울정모병원 대강당을 찾았다.

한국흉부외과협회에서 주최하는 초음파 연수 강좌를 듣기 위함이다.

대강당에는 제법 많은 흉부외과의들이 모였다.

의외라는 생각에 수를 세어 보니 대략 200명이 넘는 듯했다.

각박한 생활 속에 활로를 찾는 흉부외과의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회자의 진행으로 강좌가 시작되었다.

1차 강좌는 흉부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는 이유, 검사 방법, 판독 요령 등에 관한 것이었다.

2차 강좌는 실습.

의사들이 5인 1조를 이루어 실무자에게 검사 방법을 배웠다.

최기석은 용의 눈으로 실무 수업 과정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연수가 끝나자 정오가 지났다.

'바쁘다, 바빠.'

바쁜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100일 당직 후의 첫 오프가 이렇게 숨 가쁠 줄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웬 남자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저기요. 병무청 가는 거 아니에요? 빨리 내려요."

남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기석은 재빨리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간 신체검사 시간에 늦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남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병무청 가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이 시간에 이 버스 타고 가는 남자들이야, 다 뻔하죠."

남자가 피식 웃었다.

"괜찮으면 같이 가실래요?"

"그러죠, 뭐."

최기석은 병무청까지 남자와 동행했다.

통성명을 하면서 남자의 이름이 강성범이며 22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불어 강성범의 성격이 워낙 싹싹해서 금방 형, 동생이 되었다.

'별일 없겠지?'

그의 시선이 가까워지는 병무청 건물에 고정되었다.

미국에서 수련하기 전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 진성대 병원에서 의무기록을 복사하고 오늘 신체검사를 받기로 했다.

"형. 있다가 절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왜?"

"저 디스크 수술했거든요. 아마 4급 정도 나올 거예요."

"그래? 나는……."

최기석은 말을 하려다가 중간에 끊었다.

병무청이 어느새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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