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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45화 (144/407)

해방 (4)

"딱히 없는데?"

정설화와의 여행이 취소된 이상 하고 싶은 일은 없다.

할 일이 몇 가지 있을 뿐.

"괜찮으면 저녁에라도 잠깐 볼까? 우리 사귀고 나서 바깥에서 본 적은 없잖아."

"시간 되겠어? 학회, 저녁에 끝나잖아."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

"알았어. 끝날 때쯤 전화해."

그의 말에 정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라디오를 켜고 서로에게 기댔다.

환자와 동료, 타 과 스태프와 전쟁을 치르는 병원 생활.

그 각박한 생활 중에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뿐이다.

최기석은 정설화의 머리를 쓸어 주며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잠시 후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이영호가 열심히 곰 인형을 꿰매고 있었다.

"오늘 당직이야?"

"아, 선배. 당직은 아니고 그냥 연습 중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다 몸 축난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영호가 걱정 말라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시간을 쪼개서 연습하는 그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이 겹쳤다.

"그럼 어디 보자."

최기석은 이영호 옆에 앉아서 인형을 살폈다.

봉합사가 인형에 주는 장력은 적당했으며 봉합간의 간격은 균일했다.

얼마 전에 비해 또 실력이 올랐다.

일취월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단순 단속 봉합하고 연속 봉합은 이제 흠잡을 데가 없네. 다른 것만 조금 신경 쓰면 되겠다."

"정말요?"

"그래. 힘내라. 너도 금방 멋진 써전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 때가서 모른 척하면 안 된다?"

"당연하죠. 선배가 장 교수님처럼 팀을 만들면 꼭 들어갈 게요."

"말만으로 고맙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기석은 이영호와 대화를 나누다가 격려를 걸어 주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타다다다닥.

장혁필 아이디로 수술기록지를 작성했다.

이후 USMLE(미국의사시험)에 관해 알아보았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려면 이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USMLE step 1과 USMLE step 2 과정을 치를 수 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미국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사실 시험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의사들이 미국을 찾지 않는 이유.

그것은 USMLE 합격 후에도 미국 병원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즉 시험보다 언어 장벽과 복잡한 지원절차가 더 큰 문제다.

다만 최기석은 케이스가 달랐다.

송명진이라는 든든한 보호자가 메이죠에 있기에…….

"지금부터는 USMLE이랑 토플과 전쟁이구나."

그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논문 읽기와 집도 연습을 끝내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일찍 나오셨네요?"

"알잖아, 그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김태식이 멋쩍게 웃었다.

"당직 끝나니까 어때?"

"후련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하네요."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입원 중인 황기정 환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이버 대기 환자? 왜?"

"그 환자 내시경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문진을 해 보니까 연하곤란(음식을 삼키기 힘듦)이 있다고 하던데."

"안 그래도 오늘 오더 내릴 생각이다. 요새 체중도 쭉쭉 빠진다고 해서."

"역시 김 선생님이세요."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내시경을 예약한다면 식도암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검사 후 나올 암의 병기다.

"딱히 인수인계 할 거 없으면 먼저 들어가. 루틴 잡은 주혁이 시킬 테니까."

"아니에요. 어차피 퇴근하고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요."

"집에서 쉴 것이지. 어딜 돌아다니게?"

"그건…… 비밀이에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흉부외과 병동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수술 스케줄 잡기, 입원환자 브리핑 준비 등의 기본적인 일을 처리했고 이어지는 오전 회의와 회진에도 참석했다.

"이틀 동안 푹 쉬고 맛있는 거 먹어라."

"그동안 고생했다."

"네,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으며 병동을 떠났다.

기숙사에 도착해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자 그제야 오프라는 것이 실감났다.

"아침 햇살이 이렇게 눈부셨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빛나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도로 위의 자동차들, 그 밖의 풍경들이 너무나 새로웠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잠시 후 지하철을 타고 진성대 병원에 도착했다.

과거 레지던트 생활을 했던 추억의 장소, 옛 기억이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성에 젖었다.

최기석은 의무기록 복사실을 찾아서 대기표를 뽑았다.

꽤 이른 시간임에도 의무기록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복사실 내부를 둘러보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이 갔다.

남자는 20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정장을 입었다.

손에는 두꺼운 의무기록지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남자를 보고 있자니 알림이 귓가를 스쳤다.

'아…… 미치겠네.'

고세윤은 의무기록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제대 후 전문대 졸업을 마치고 손해사정 회사에 취직했다.

전공과는 무관했지만 집안형편 때문에 하루 빨리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피보험자를 만나거나 서류 때는 일은 익숙해졌는데 의학용어가 발목을 잡았다.

용어 해석에 한 세월이 걸렸던 탓이다.

'어쩐다?'

고세윤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손에 들린 피보험자의 의무기록을 분석하고 오늘 중으로 보고서를 지급심사 직원에게 넘겨야한다.

장기미결 건이라서 더 미뤄두면 팀장에게 깨질 게 분명했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옆에 있던 남자가 고세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제 발을 밟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고세윤은 고개 숙여 옆에 앉은 남자에게 사과했다.

초조해서 다리를 떨다가 옆 사람의 발을 밟은 모양이다.

"보험회사 직원이신가요?"

"아. 네. 종부화재에서 사고조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차트 때문에 애를 먹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보시다시피 이건 아무나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반영어랑 의학용어는 또 달라서요."

고세윤은 검지로 차트의 한 단어를 가리켰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위궤양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gastic이 위라는 뜻이고 ulcer는 궤양이니까요. 참고로 전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 진짜 의사세요? 죄송한데 괜찮으시면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죠. 뭐. 어차피 진료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고세윤은 남자와 통성명을 나눴다.

남자의 이름은 최기석으로 의진대 흉부외과 레지던트라고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의사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잠시만요. 이야기는 차트 떼고 나서하죠."

최기석은 대기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직원에게 서류를 받아서 필요한 기록지 목록을 작성하고 다시 대기했다.

이후 비용을 지불하고 인쇄된 기록지를 받았다.

"1층 카페로 가시죠."

"네."

최기석은 고세윤과 카페에 자리 잡았다.

솔직히 남의 일에 껴들 생각은 없었지만 돌발 임무가 생겼다. 완수 시 보상이 있는 만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무래도 저는 최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딱 좋은 타이밍에 만난 걸 보면 말입니다."

고세윤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선생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차트 해석을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도와만 주신다면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세요."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고세윤이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고 최기석은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서류는 총 두 종류.

동네 의원 두 곳에서 복사한 초진기록지와 대학병원에서 얻은 각종 검사 및 수술기록지다.

"고생하실 만하네요."

서류를 훑는 최기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렇죠? 특히 의원에서 뗀 초진기록지는…… 아휴!"

고세윤이 말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의원에서 복사한 기록지는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전자의무기록을 사용하지 않는 탓에 글씨가 삐뚤빼뚤 했으며 약어들이 넘쳐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호조무사와 간호사조차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답답해서 의사를 찾아가자 보험회사 직원이 알아봐야지 그걸 나한테 왜 묻냐며 역정을 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네요."

최기석은 고세윤을 옆자리로 부른 후 기록지를 차근차근 분석해 주었다. 대학병원의 기록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의원의 기록지조차 문제될 게 없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요."

고세윤이 무릎을 탁 쳤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 피보험자 만났을 때부터 진상이더니 역시……."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중에 보험 쪽으로 곤란한 일이 생기신다면 제가 두 발 벗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고세윤이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돌발 임무, '친절한 기석씨'를 완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200 P.

P와 레어 젬을 지급합니다.

NEW [레어: 환자 친밀도 1.5배 상승]

[고세윤과 특수 관계 결초보은을 맺었습니다.]

[결초보은: 고세윤은 오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합니다.]

최기석은 알림창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투자한 것에 비해 보상이 후했다.

고세윤과 헤어진 후 흉부외과 외래를 찾았다.

이십 분 정도 기다리자 차례가 돌아왔다.

똑. 똑. 똑.

노크하고 들어가서 이민식에게 인사를 건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기석 씨였군요."

이민식이 최기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진성대 흉부외과 부교수로 최기석의 심장이식 수술에서 제1보조였다.

"교수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별 탈 없이 잘 지내죠. 소문을 듣자니 기석 씨는 의진대에서 대활약 중이라면서요?"

"스태프들이 잘 봐준 덕분입니다."

"다행이네요. 하늘이 도운 겁니다."

이민식이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심장이식 수술만큼 중요한 게 수술 후 관리다. 면역억제제는 항상 챙겨 먹어야 하고 심장에 무리가 갈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심장병이 도질지 모른다.

그런데 최기석은 힘든 의사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건강해 보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로 100일 당직이 끝났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100일 당직까지 끝냈다니……. 정말 대단해요."

이민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흉부외과는 무슨 일이죠? 진료를 볼 거라면 굳이 올 필요가 없을 텐데……."

"진단서를 발급 받으러 왔습니다."

"진단서라…… 그거야 어렵지 않죠. 혹시 보험회사에 제출한 건가요?"

"아니요. 다른 일에 쓰려고 합니다."

"으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기왕 온 김에 간단하게 진료도 받아요."

이민식은 진단서를 발급한 후 최기석에게 상의를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청진기로 최기석의 심음을 들었다.

쿵. 쿵. 쿵.

건강한 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별 이상은 없네요. 그래도 항상 관리에 유념해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외래진료실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 둔 본인의 의무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그날.

내일은 과연 폭풍을 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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