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2)
"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황기정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 육상 금메달을 딴 마라토너다.
은퇴 후 대표팀 코치 생활을 하다가 최근 예능에 출현해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황기정 씨라면 좌심실류를 앓을 만한 것 같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흉부외과를 찾는 사람 중에 육상 선수나 마라톤 선수가 꽤 되니까."
달리기 선수들은 일반인에 비해 맥박이 낮다.
훈련으로 심장 근육이 발달했기에 심장이 한 번 펌핑으로 많은 양의 혈액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부정맥이 찾아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운동을 중단하면 단련된 좌심실이 점점 힘을 잃고 딱딱하고 두꺼워진다.
이것이 좌심실류의 원인이 된다.
"과장님은 황기정 씨를 치료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수술만 성공한다면 심장 클리닉은 완전히 자리를 잡을 테니까요."
최기석은 담담하게 소감을 말했다.
정치력이 올라간 덕분일까.
조지환의 속뜻을 읽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신 실패하면 날 죽이려고 들겠지."
"……."
"세이버하고 노우드 수술로 재미를 보더니 도박적인 수를 많이 던지네."
장혁필이 한숨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시간이라도 잘 부탁한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혁필이 휴게실을 떠났고 최기석은 조금 더 쉬다가 아지트로 향했다.
그리고 아지트에서 소 심장을 챙겨서 수술실로 향했다.
일과가 끝난 후라서 로젯이 많이 비어 있었다.
"수선생님. 안녕하세요."
"최 선생님. 왔어요?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일과 끝나면 제일 먼저 쉬고 싶을 텐데."
수술실 수간호사 김용선이 그를 칭찬했다.
친분이 있는 윤지혜의 부탁으로 최기석에게 로봇 수술이 가능한 로젯에 출입을 허용하였다.
그 기회가 일주일에 단 두 번뿐이지만 말이다.
그동안 최기석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로봇 수술을 익혔다.
"오늘은 K 로젯으로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K 로젯에 들어가서 세팅에 들어갔다.
로봇 팔에 필요한 장치를 부착했으며 수술대 위에 방포를 깔고 심장을 올려놓았다.
'시작해 볼까?'
콘솔 앞에 앉아서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오늘 연습할 수술은 관상동맥 우회술.
손으로 하면 가장 자신 있는 수술이지만 로봇 수술은 걸음마 수준이다.
위이이잉.
조작을 시작하자 기계음이 울렸다.
최기석은 가장 먼저 이식혈관 채취에 나섰다.
왼쪽 로봇팔로 갈비뼈 연골 사이를 벌리고 오른쪽 로봇팔에 달린 메스로 근막층을 갈랐다.
스으으윽.
근막이 갈라지면서 숨어 있던 내흉동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상태에서 다시 메스로 내흉동맥의 끝부분을 살짝 잘라 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조심하자. 조심.'
모니터를 보며 최대한 섬세하게 핸들을 움직였다.
3주 가까이 콘솔을 다루며 깨달았다.
촉감을 느낄 수 없기에 핸들을 다룰 때는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힘겹게 내흉동맥을 얻은 관상동맥 쪽으로 늘어트렸다.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다.
우선 협착을 가정한 관상동맥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자리를 선택하고 내흉동맥과 관상동맥을 연결해야 한다.
최기석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발로는 패들을 밟아 시야를 조종했으며 눈은 모니터에서 떼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력으로 얻은 수술 스킬들은 로봇 수술에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진검 승부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후아……."
최기석은 용수철에 튕기듯 콘솔에서 일어났다.
연습이 끝나면서 인내심이 폭발했다. 콘솔을 섬세하게 다루는 일은 좁은 바늘구멍에 두꺼운 실을 꿰매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었다.
띠링!
[새로운 수술 마스터리가 형성되었습니다.]
[로봇을 이용한 관상동맥 우회술(CABG) (1/5)]
[이 마스터리는 다른 로봇 수술과 비침습적 수술에 영향을 끼칩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수술대에 섰다.
보상 알림은 좋았지만 반대로 수술 결과는 형편없었다. 운침할 때 힘 조절을 못해서 일부 내흉동맥이 찢어졌다.
봉합한 부위 간의 간격도 균일하지 못했다.
만약 환자에게 이런 식으로 수술했다면 차후 혈관이 터져서 사고가 생겼으리라.
"오늘은 완료에 의의를 둬야지."
뒷정리를 끝내고 흉부외과 당직실을 찾았다.
이틀 뒤 한국흉부외과 협회에서 진행하는 초음파 강의가 있었기에 강의 신청을 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얼마 전 언급한 대로 송명진이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는 그가 메이죠에 입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자세히 적혔다.
USMLE(미국의사시험) 공부법이나 원서 접수법, 기타 비자에 관련된 부분까지.
송명진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최 선생. 병원 생활은 이번 달로 마무리 짓는 게 좋겠어요. 시험공부에 넘어올 준비까지 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메일을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나 메일을 남겨요. 조만간 또 연락할게요.]
마지막 문장을 본 순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곧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 번 떠나면 정들었던 스태프들과 가족, 그리고 정설화를 오랫동안 보지 못할 텐데…….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욕심.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
이 두 가지 충돌하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최기석은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지이이잉.
때마침 콜폰이 울려서 통화를 연결했다.
[기석아. 나 건우다. 빨리 응급실로 내려와!]
"왜?"
[흉부외과 응급환자다.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튀어 와.]
김건우가 먼저 통화를 끊었고 최기석은 그대로 응급실로 달렸다.
"무슨 일인데?"
"교통사고 환자인데. 상태가 영 좋지 않아."
김건우가 초조한 듯 다리를 떨었다.
"바이탈은 어느 정도 잡았는데 혈흉이 심각해. 하도 급해서 일단 흉관삽입을 했는데 그걸로도 어림없어."
김건우가 검지로 배액병을 가리켰다.
콸! 콸! 콸! 콸!
피가 흉관을 타고 폭포처럼 흘렀다.
때마침 블러드 팩이 다 떨어져서 인턴이 블러드 팩을 새로 달았다.
"알았으니까 침착해."
최기석은 김건우를 진정시키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가슴 부분이 시퍼렇게 멍들었으며 팔과 다리에 부목이 있었다.
환자 감시 장치를 살피자 호흡이 분당 10회를 간신히 유지했으며 체온이 정상보다 낮았다. 혈압은 수축기 80mmHg, 확장기 50mmHg으로 상당한 저혈압이다.
체력: 2/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아픈 부위: 횡격막 / 폐
진단명: 혈흉 / 횡격막 손상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흉관삽입만으로 이 환자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최기석은 환자 검사 결과를 살핀 후 휴대폰을 들었다.
집도가 가능한 스태프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령 전화를 받은 이들도 당장 병원에 돌아오기는 힘들었다. 강철대병원 흉부외과 과장의 부친상에 갔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마지막으로 장혁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이야?]
장혁필의 목소리가 유난히 반가웠다.
"교수님. T.
A 환자가 응급실에 왔습니다. 엑스레이 상에서 혈흉과 횡격막 손상이 보이는데 수술에 들어 가야할 것 같습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콜 안 돼? 집에 막 도착해서 병원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이정훈 과장님 부친상 때문에 남은 스태프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 제일 마지막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노우드 팀도?]
"네. 오늘은 연습이 없는 날이라 레지던트를 제외한 스태프가 전부 퇴근했습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장혁필이 침묵을 지켰다.
"교수님. 지시를……."
"……어쩔 수 없다. 집도, 네가 해라."
"진심이십니까?"
"대동맥 박리 수술이 가능하면 그 정도 수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널 믿어."
장혁필이 수술 과정을 설명했고 최기석은 이를 유심히 들었다.
"어때? 할 수 있겠지? 정 못하겠으면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최기석은 환자 감시 장치를 살피고 입술을 깨물었다.
장혁필을 기다릴 여유는 없다.
이 이상의 출혈은 위험하다.
"곧바로 수술 들어가고 모르는 거 있으면 그때 그때 물어봐. 계속 통화 대기할 테니까. 알았지?"
"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수술실을 잡았다. 그리고 서지훈과 이영호를 응급실로 불렀다.
민주혁은 오프라서 출근하지 않았다.
타다다다닥.
세 사람이 침상을 끌며 수술실로 이동했다.
최기석은 도중에 환자의 상태와 집도를 본인이 직접 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뭐? 네가 집도를 한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 교수님께 허락은 맡았습니다."
"허락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정도 수술을 하려면 레지 4년 차는 돼야 된다고. 수술에 대해서 배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수술을 한다는 거야?"
"최 선배. 그냥 장 교수님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나요? 저도 서 선배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이영호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지금 배액통에 피 차는 거 보이시죠? 교수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환자는 죽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너도 죽어."
서지훈이 침상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잘났고 세이버 팀에서 인정받는 걸 백번 이해한다고 치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수술 했다가 환자가 죽으면 너만 병신 되는 거라고."
"아니요. 선배 말은 틀렸습니다."
"뭐라고?"
최기석과 서지훈의 눈빛이 팽팽하게 충돌했다.
중간에 낀 이영호만이 어쩔 줄 몰라 할 따름이다.
"환자도 살고 저도 삽니다. 이번 수술로 누구도 죽지 않지 않아요."
최기석의 대답에 서지훈이 몸을 움찔거렸다.
'뭐야? 이 자식?'
근거 없는 말임에도 묘하게 믿음이 갔다.
마치 권일수나 장혁필 같은 실력 있는 써전이 스태프를 다독이는 느낌이랄까. 한순간 최기석이라면 수술에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들었다.
"난 모르겠다. 집도의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서지훈이 길을 트자 최기석이 감사 인사를 했다.
수술실에 도착한 세 사람은 스크럽을 끝내고 환자와 로젯으로 들어갔다.
"바이탈이 전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이영호가 환자 감시 장치를 보며 말했다.
"에피네프린 원 앰플 정맥으로! 바이탈이랑 블러드 팩, 배액량 체크는 전부 너한테 맡긴다."
"네!"
"선배는 저를 도와주세요."
최기석은 서지훈과 함께 환자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눕혔다.
돌봐주는 스태프가 없는 첫 집도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이이잉.
문이 열리고 든든한 지원군이 도착했다.
바로 강하나다.
강하나는 별다른 말 없이 최기석 뒤에 서서 수술 도구를 준비했다.
이미 최기석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오늘일 줄은 몰랐네요. 초 레지 쌤의 보조를 하게 되다니……."
"잘 부탁해요. 강 쌤."
"당연하죠. 써전들이 실수를 해도 저는 실수 안 한다고요."
강하나의 너스레에 최기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게 바로 팀의 힘이리라.
잠시 후 마취의 신아름이 로젯에 들어와 전신마취를 시행했다.
이것으로 수술 준비는 끝.
최기석은 흉관이 있는 부위를 넓게 소독했고 서지훈이 그 위로 방포를 씌었다.
"지금부터 혈흉 처치 및 횡격막 재건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스으으윽.
메스가 환자의 피부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