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1)
아지트에 도착한 최기석은 문 앞에 놓인 스티로폼 박스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박스 안을 열자 혈관이 살아 있는 새끼 양 심장과 소 심장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당장 연습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녁 로봇 수술 연습 때 쓸 것이다.
"조만간 찾아뵈어야지."
최기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육점 아저씨는 그를 도운 1등 공신 중 한 명이다.
매일 싱싱한 소 심장을 보내 주었으며 중간중간 궂은 부탁까지 들어주었다.
수술 세팅을 마친 후 새끼 양 심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휴우……."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늘의 연습과제는 노우드 수술.
어젯밤 동영상으로 수술 과정을 전부 외웠기에 집도에 문제는 없다.
[용의 눈 스킬을 사용합니다. 줌 인 모드를 통해 수술 부위를 구체적으로 살핍니다.]
스킬을 통해 최적의 시야를 맞추었다.
권일수에게 배운 소아심장 수술의 핵심.
그것은 다소 과하다 할 정도로 시야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제 됐다.'
스으으윽. 치이이익.
메스로 상행대동맥의 옆면을 가르고 흐르는 피를 석션기로 흡입했다.
이어서 폐동맥에도 같은 작업을 진행했다.
단순한 절개처럼 보이지만 다른 혈관이나 미주신경을 건드리면 문제가 생긴다.
끼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며 상행대동맥과 폐동맥을 봉합해나갔다.
본격적인 집도에 들어가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오늘을 위해 수없이 노우드 수술 영상을 돌려 보았다.
봉합 실력은 어느 수준에 올랐다고 자부했지만 진행이 더디기만 했다.
'미치겠네.'
최기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폐동맥에 운침한 바늘을 상행대동맥으로 찔러 넣었다. 그리고 엄지 매듭법을 이용해 혈관 끝부분의 봉합을 끝냈다.
찰칵!
가위질과 함께 1차 작업이 간신히 끝났다.
한숨 돌릴 겸 시계를 보니 올라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하아…….'
심장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조가 없다는 걸 감안해도 형편없는 수준.
최기석은 새삼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며 뒷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가기 전 호흡기내과를 찾았다.
"어르신. 깨어 계셨네요?"
"총각 왔어잉?"
최미순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엘리타를 투약 중지한 후 폐암 치료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오늘이 대망의 퇴원일이다.
"안 그래도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혔는디 잘 왔구먼. 늙으니께 잠이 없어져."
"저희 할머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상태와 경과 모두 좋았기에 마음 편히 최미순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간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브려잉. 올 때마다 민폐만 부리가꼬."
"그런 말씀 마세요. 어르신하고 제가 어디 보통 사이인가요?"
"하긴 그것도 그라제."
최미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고마우이. 의사 총각이 없었으면 난 진작 죽었을 겨. 미친 년놈들이 날 뛰었을 때도 그라고, 이번에 병원에 왔을 때도 그라제."
"……."
"그게 다가 아니여. 신기하게 총각이 왔다 가면 아픈 게 사라졌어잉. 그게 아니었으면 내사 마 치료를 끝까지 못 받았을 거여."
"아닙니다. 다 어르신의 복이죠."
"아니여. 난 다 알아부렸어. 의사 총각이 다른 의사들하고는 다르다는 걸 말이여. 어짰든 너무 고맙구먼."
최미순이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톡!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손등으로 떨어진 순간 알림창이 울렸다. 최기석은 알림창을 확인하는 대신 최미순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흐느껴 우는 한 노인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르신. 저와 한 약속 잊지 않으셨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아직 둘째 아드님 손주 못 보셨잖아요."
"그랴. 그랴."
"죄송해요. 퇴원하실 때 배웅은 못 해 드릴 것 같아요."
"아따 나 말고 다른 병자들 봐야지. 괜찮혀."
최기석은 포옹을 끝내고 최미순의 꼭 잡아 준 후 병실을 떠났다.
더 있다가는 그마저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 * *
그날 오후.
일과가 끝날 무렵이다.
최기석은 회의실에서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도중에 콜폰이 울려 확인하자 심장 클리닉에서 전화가 왔다. 중국에서 온 V.
I.
P 환자가 입원하는데 주치의가 그라는 것이다.
"금방 갈게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환자의 차트를 살폈다.
환자의 이름은 장왕유.
진단명이 원발성(다른 장기에서 전이되지 않은) 심장 종양이다.
자주 접하는 케이스가 아니라서 호기심이 생겼다.
환자 정보를 확인하고 심장 클리닉을 향했다.
최기석은 가는 동안 아침에 최미순에게서 얻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특이한 아이템이네.'
NEW [영혼의 눈물(유니크)]
-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거짓 없는 마음에서 새로운 기적이 만들어진다.
- 영혼 활성을 완료하면 특수효과 초각성을 얻습니다.
- 영혼 활성(0/700): 집도에 성공한 경우나 직접적인 수술 보조를 할 경우, 영혼 활성 스택이 상승합니다(단순 보조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 특수효과 초각성: 일시적으로 모든 처치 능력치 2단계 상승합니다. 지속시간은 반나절이며 초각성 효과가 끝나면 일시적으로 탈진에 빠집니다.
최기석은 아이템 정보를 살피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당장 쓸 수는 없는 아이템이라는 게 아쉬웠다.
무엇보다 영혼 활성을 마쳐야 특수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데, 영혼 활성의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그래도 2단계 상승이면 매력적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심장 클리닉에 도착하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대기 중인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면서 봤던 다른 과들의 특수 클리닉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
조지환의 전략은 과연 먹혀들었다.
세이버 수술과 노우드 수술에 성공한 병원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환자들은 심장 클리닉을 찾지 못해 안달이 났다.
듣기로는 진료 예약은 벌써 몇 주치가 다 찼다고 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V.
I.
P 환자분은 어디 있죠?"
"저쪽이요."
스테이션 간호사가 창가 쪽 자리를 가리켰다.
다소 캐주얼한 복장의 중년 남성이 정장 입은 여성과 대화 중이다.
옆에 있는 여성이 통역인 듯싶었다.
최기석이 다가가서 헛기침을 하자 통역 코디네이터가 그를 응시했다.
"주치의 선생님. 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코디네이터가 장왕유의 말을 통역했다.
"장왕유라고 합니다."
"주치의 최기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 최 위층에 있는 VIP 라운지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는 보안 요원부터 내부의 휘황찬란한 인테리어까지, 언제와도 적응이 안 되는 곳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실 겁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네요."
장왕유가 병실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정말 괜찮은 겁니까? 폐암이나 위암도 아니고 심장에 종양이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장에 있는 종양은 양성이고 종양이 수술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장왕유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수술은 누가 하는 겁니까? 노우드 수술을 성공했다는 의사에게 받고 싶은데."
"그분은 소아심장 수술 전문이십니다. 환자분의 집도의는 세이버 수술을 성공시킨 장혁필 교수가 맡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있다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최기석은 VIP실을 떠나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양천제약 엘리타 사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엘리타 정. 식약처장이 직접 나서서 사과한다.]
기사를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 전 박광수가 엘리타 부작용에 대해 쓴 논평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더불어 논평 이후 각 병원에서 쉬쉬하던 엘리타 부작용 사례가 드러났다.
국회의원 박상현이 가세하면서 엘리타의 주된 부작용이 피부발적과 급성 심근경색이라는 점, 식약처가 안일하게 임상 시험을 승인했다는 점, 일부 병원에서 엘리타로 인한 사망환자를 은폐했다는 점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현 흐름이라면 엘리타는 조만간 시장에서 사라지리라.
'약을 팔고 싶으면 제대로 된 약을 팔아야지.'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벌컥 문이 열리고 장혁필이 들어왔다.
외래진료를 끝내고 바로 휴게실을 찾은 모양이다.
"쉬고 있어?"
"네. 교수님."
최기석은 고쳐 앉으며 장혁필을 응시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당연히 피곤하지. 심장 클리닉에 환자들이 말도 못하게 많으니까."
장혁필이 털썩 주저앉았고 최기석은 그에게 커피를 뽑아서 건넸다.
"잘 마실게."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낮에 송 교수님이 나한테 전화했더라?"
장혁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보고 슬슬 준비하라고 하시더라."
"무슨 준비를요?"
"인마. 바로 너다. 너. 조만간 너를 부르게 될 것 같으니까 사람 구해 놓으라고."
장혁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송 교수님 앞에서 대동맥 박리 수술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네."
"미치겠다. 진짜. 그럼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잖아. 레지던트 1년 차가 대동맥 박리 수술이라니……."
최기석의 행보는 상식을 벗어났다.
최기석은 이제 간신히 100일 당직을 끝내는 레지던트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녀석이 고난도 수술을 성공했다니 기가 찰 따름이다.
"관상동맥 우회술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대동맥 박리는 너무했다."
"……."
"송 교수님이 허튼소리 할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는걸."
"장 교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만약 제게 집도할 기회가 오면 잘할 자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장혁필이 장난스럽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메이죠로 갈 생각이야? 회식 때 내가 했던 말은…… 생각 없어?"
"말씀 듣고 많이 고민했지만…… 메이죠에 가 보고 싶습니다."
최기석은 담담하게 의견을 드러냈다.
사실 의진대 흉부외과에 남는다는 선택도 메리트가 있다.
우선 외국 생활에 힘들게 적응할 필요 없다.
지금의 수련을 꾸준히 이어 가면 실력은 자연스레 오른다. 하지만 최기석은 그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송명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메이죠는 레지던트 집도에 상당히 호의적이라고 들었다. 즉 메이죠에서는 집도할 기회를 더 일찍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눈을 보니까 벌써 결정했구나.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 어차피 네가 중간에 빠진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시기가 생각보다 빨라서 당황스러운 것뿐이지."
장혁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참고로 오늘 외래에서 세이버 수술 환자 받았다. 웬만하면 넘기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하도 난리를 쳐서 말이야. 이거 실패하면 완전히 똥 밟는 건데."
"환자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
"상태도 상태고 실패하면 뉴스에 대문짝 만하게 실릴 환자를 받았다."
"환자가 누구길래……."
"그게 말이다."
장혁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황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