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 (6)
"여기 입니다."
최기석이 일어나서 부르자 정장을 부른 사내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낯선 인물의 등장에 박광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녕하세요. 박상현 국회의원의 보좌관 강진현이라고 합니다. 이쪽이 최기석 선생님이고 이쪽이 박광수 기자님이시죠?"
"네. 맞습니다만……."
"반갑습니다."
강진현이 두 사람에게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최 선생님 이게 대체……."
"지금부터 설명드릴게요."
최기석은 미소 띤 채 강진현을 응시했다.
이번 엘리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원 박상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얼마 전 박상현 딸의 천식 발작을 막으면서 박순재에게 소원권을 얻었다.
지금이 그것을 활용하기 좋은 시기다.
"의원님께서는 이번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강진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제대로 된 자료만 확보된다면 이 일을 수면 위로 띄우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의원님께서는 보건 복지 분야에 관심이 많으시니까요."
"그야 물론 잘 알죠."
박광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젤리에라는 신약의 부작용을 폭로한 사람이 바로 박상현이다. 이번 일에도 박상현이 나선다면 엘리타를 끌어내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 계획을 정리해 볼까요?"
최기석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우선 김철우에게 얻은 자료를 박광수에게 넘겨 엘리타의 부작용을 이슈로 만든다.
이후 묻혀 있던 부작용 케이스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여 박상현이 나서는 게 최종 계획이다.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지만 저는 찬성입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최기석의 제안에 강진현과 박광수가 동의했다.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진행 중에는 자주 통화했으면 좋겠네요."
최기석은 추가적인 합의를 끝내고 두 사람과 헤어졌다.
후련한 마음으로 로비를 걷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그의 팔을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외국인 여성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신경외과가 어디 있죠?"
여성이 영어로 물었다.
"오늘이 진료받는 날인가요?"
"네. 처음 오는데 너무 복잡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그럴 만도 하죠. 따라오세요."
최기석은 여성과 대화하며 에스컬레이터에 탔다.
"억양을 들어 보니까 영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맞나요?"
"맞아요. 웨일스에서 왔어요. 선생님은 영어를 잘하시네요? 아까 마주친 의사 선생님은 길을 물었더니 도망치던데."
"저는 시간 내서 따로 공부하고 있거든요. 저기 보이는 곳이 신경외과입니다. 간호사에게 말하면 따로 통역 코디네이터를 불러 줄 거예요."
"친절도 하셔라. 정말 감사합니다."
여성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메이죠를 향해서 임무를 부분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① 영어를 마스터하라. 영어 능력치를 전부 중급 이상으로 올리세요(완료!)
- 현재 능력치
- 독해: 중
- 회화: 하 --> 중
- 리스닝: 하 ---> 중
② 송명진의 제안이 올 때까지 의진대병원에서 버텨라(진행 중)
[임무 성공 시 원하는 스킬의 레벨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스킬 북이 주어집니다.]
[송명진의 도움을 받아 메이죠 클리닉에 입성할 수 있는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귓가를 스치는 알림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송명진의 말대로 의진대를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 * *
일과가 끝났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병실을 돌았다.
일반 병실과 소아 병실은 별다른 이상이 없기에 중환자실을 찾았다.
'휴우…….'
노우드 수술을 받은 나재현을 확인한 순간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재현은 수술 후 두 시간이 지나서 발작을 일으켰다.
다행히 지금은 이상이 없지만 오늘밤은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하리라.
최기석은 중환자실 간호사들에게 나재현을 주의 깊게 봐 달라고 부탁한 후 당직실로 복귀했다.
"어. 교수님? 퇴근 안하셨어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건데? 너 때문에."
윤지혜가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저 때문이라고 하니까 괜히 뜨끔하네요."
"당연히 뜨끔해야지. 저번에 로봇 수술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 오늘 기회가 생겨서."
"그럼 오늘 배울 수 있나요?"
"응."
"감사합니다."
윤지혜는 최기석이 방방 뛰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통의 레지던트라면 가르쳐 준다고 해도 힘들다며 거절할 텐데, 최기석의 태도는 정반대다. 그게 바로 최기석의 매력이지만 말이다.
'잘하는 거겠지?'
윤지혜는 중얼거리며 쓰린 속을 달랬다.
2주 전쯤일까.
운동하러 가던 중 여자 의사와 팔짱끼고 걷는 최기석을 목격했다.
그때의 충격을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의술밖에 모르는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을 거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윤지혜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일부러 최기석과 거리를 뒀다.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지만 최기석을 볼 때마다 같이 있고 싶은 애틋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로봇 수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심포지엄의 은혜를 갚는다기보다는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가자."
"네."
두 사람은 당직실을 벗어나 수술실 D 로젯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로젯과 달리 D 로젯에는 수술대 옆에 로봇이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 폐암 1기 또는 MIDCAB 등의 비침습적 로봇 수술이 진행된다.
'이런 날이 오는 구나.'
최기석은 로봇을 훑으며 자신의 운에 감사했다.
일반적으로 펠로우 1, 2년 차는 되어야 로봇 수술을 배운다. 그런데 고작 레지 1년 차에 로봇 수술을, 그것도 로봇 수술의 달인에게 배우게 되었다.
"첫날이니까 로봇의 구조와 간단한 작동법만 알려 줄게."
윤지혜가 써전 콘솔 앞에 섰다.
"너도 잘 알겠지만 이게 우리가 로봇을 조종하는 콘솔 부위야. 콘솔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 첫째는 내시경의 영상을 전송하는 모니터 부분, 로봇 팔을 조종하는 핸들 부분, 마지막이 패들이야. 패들을 통해서 시야를 조종할 수 있어."
윤지혜는 설명을 마치고 수술대 위에 거즈 한 장을 올려놓았다.
"한 번 조종해 볼래?"
"저야 좋죠."
"일단 시야부터 움직여 봐."
최기석은 콘솔에 앉아 왼쪽 패들을 밟았다.
그러자 모니터 시선이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거즈가 보이지 않았다.
"우와. 신기하네요."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윤지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패들의 동작 패턴은 상하좌우, 이렇게 네 개밖에 없으니까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네."
최기석은 패들을 밟으며 시야전환을 익혔다.
"다음은 핸들. 로봇 팔은 일곱 개지만 써전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세 개까지야. 일단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봐."
"네."
최기석은 조정장치를 손에 쥐었다.
이렇게 핸들을 손에 쥐고 있자니 만화 속 주인공이 되어 로봇을 조종하는 느낌이 들었다.
위이이잉.
조정장치를 위로 당기자 로봇팔이 위로 움직였으며,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자 로봇팔에 연결된 기구가 오므라들었다.
그의 조작을 로봇이 그대로 따른다는 게 신기했다.
"거즈를 들어 볼게요."
자신감을 내보이며 핸들을 움직였다.
이윽고 오른쪽 로봇팔로 거즈를 움켜쥐어 번쩍 들어올렸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왼쪽 로봇팔로도 거즈를 붙잡았다.
"잘하는데?"
"아무래도 교수님의 실력을 벌써 이어받았나봐요. "
최기석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말했다.
[로봇공학 Lv.1]
- 로봇 수술을 할 경우 로봇을 다루는 능력과 로봇 처치 속도가 1.5배 상승합니다.
- 레벨이 증가할수록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 최대 레벨은 5단계입니다.
윤지혜의 MIDCAB 수술을 도우면서 스킬을 얻었다.
첫 조작이라도 남들보다 월등할 수밖에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벌써 배운 거 아니지?"
"당연하죠. 그러면 왜 교수님께 부탁 드렸겠어요?"
"농담이야. 네가 워낙 괴물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잠깐만 기다려 봐."
윤지혜는 로봇팔의 세팅을 바꾸고 수술대에 봉합사와 곰 인형을 올려놓았다.
"교수님, 설마?"
"맞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봉합까지 해 봐. 제대로 된 봉합이 가능하면 로봇 수술은 완성이나 다름없어. 절제나 지혈할 때는 봉합할 때만큼 정교한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오른쪽 로봇팔로 봉합침을 쥐고 곰 인형의 복부에 밀어 넣었다.
"아…… 이런."
처음부터 실수가 나왔다.
곰 인형의 하얀 배 부분에 침이 들어가야 하는데 엉뚱한 목 부분에 바늘을 꽂고 말았다.
확실히 단순한 움직임을 할 때와는 조작감이 달랐다.
"로봇 수술이 힘든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직접 봉합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감각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동작이 세심해야 한다는 거지."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최기석은 봉합침을 빼고 다시 로봇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 도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좀 전보다 팔을 내리다가 실수로 다리 근처에 바늘을 꽂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배 쪽에 바늘을 꽂았다.
이후 왼쪽 로봇팔로 바늘을 끌어당겨 조직을 적당히 당겼다.
"안 되겠는데요?"
최기석은 한숨 쉬며 핸들에서 손을 뗐다.
매듭을 짓다가 실이 꼬였다.
운침까지는 억지로 성공했지만 이 이상 진도를 빼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히 보는 거랑 하는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네요.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처음치고는 엄청 잘했어. 너무 자책하지 마."
윤지혜와 최기석이 자리를 바꿨다.
위이이잉. 덜컹. 위이이잉. 덜컹.
윤지혜는 로봇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봉합을 진행했다.
가장 기본적인 단순 단속 봉합부터 고난도 봉합을 전부 선보였으며 도중에 페달을 밟으며 시야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로봇 여제는 달라도 달랐다.
"교수님. 진짜 대단하세요."
"나도 알아."
윤지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술실 수간호사님께 부탁해서 일주일에 두 번까지 로젯을 빌렸어. 다음 주까지는 나랑 같이 연습하고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 연습하면 될 것 같아."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세심하게 신경 써 준 윤지혜가 고마웠다.
"앞으로 열심히 연습해서 꼭 교수님처럼 조작할 수 있도록 할 게요."
"너라면 가능하겠지. 정리하고 들어가자."
두 사람은 주변을 치우고 수술실을 나왔다.
"기석아."
"네."
"우리…… 아니야. 됐다."
"왜 궁금하게 만들고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이건 반칙이에요."
"됐어. 신경 쓰지 마. 난 먼저 들어갈 테니까 당직 잘 서고."
"슬슬 배고프실 것 같은데 야식 같이 드실래요?"
"……괜찮아."
윤지혜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1층으로 내려갔고 최기석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났다.
의진대 흉부외과는 많은 일을 겪었다.
심장 클리닉의 리모델링이 끝나면서 대대적인 홍보와 진료가 이뤄졌다.
세이버 팀은 한 차례 더 케이스 환자를 수술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으며 노우드 팀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두 번째 수술을 성공시켰다.
그동안 최기석은 로봇 수술을 익히며 양천제약에 한 방 먹일 시간만을 기다렸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최기석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아지트로 향했다.
유독 가벼운 발걸음, 오늘로 100일 당직은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