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 (4)
"판을 짠다고?"
김철우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최기석은 고작 레지던트 1년 차다. 제약회사와의 싸움에서 판을 짤 만한 힘은 없다.
본인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 텐데 이런 말을 태연하게 꺼낼 줄은 몰랐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닙니다.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최기석은 차분히 계획을 설명했고 김철우는 침묵을 지킨 채 이야기를 들었다.
"하…… 벌써 그런 계획까지 짜 뒀을 줄이야. 게다가 그런 인맥은 다 언제 만들었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인맥은 결코 운으로 생기는 게 아니야. 아무래도 그동안 사람 관리에 신경 쓴 모양이군."
김철우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됐건 좋아.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엘리타의 부작용 케이스를 모아 주지. 내 할 일은 거기까지인가?"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하고 싶은데? 안 그래도 엘리타를 만든 양천제약이 꼴 보기 싫었거든."
"그런데 교수님,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데?"
"어제 발작을 일으킨 최미순 환자에게는 더 이상 엘리타가 안 들어가는 겁니까?"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엘리타가 급성 심근경색의 원인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투여가 계속될 경우 악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 됐다.
"당연하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 약은 당장 중지야.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지?"
"……."
"외과가 메스로 사람을 살린다면 내과는 약으로 사람을 살린다고. 외과에서 녹슬거나 망가진 메스를 쓰지 않는 것과 우리가 투약을 중단하는 건 같은 이치다."
"네."
최기석은 김철우와 대화를 마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첫 단추는 잘 꿰맸다.
지금부터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양천제약을 압박할 차례다.
최기석은 KTB 기자 박광수와 한국흉부외과협회 부회장 박순재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말하자 두 사람 모두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최 선생님."
"어?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유병세와 마주쳤다.
"어디 가세요?"
"병동으로요. 할 일이 아직 남아서. 유 선생님은 수술실 가시죠?"
"네. CABG 있어요."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동승한 사람들의 대화가 두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얼마 전에 친척이 인도 여행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괜찮다고 하더라."
"인도? 인도 갈 바에는 차라리 동남아시아 쪽이 낫지 않아."
"지역을 잘 고르면 문제없대. 친척이 갠지스 강 코스를 따라갔는데 의외로 볼만하게 많다고 하더라."
"게…… 겐지?"
유병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요. 어쩐지 그리운 이름을 들어서요."
"한조랑은 다른 느낌인가 보죠?"
"최 선생님! 한조랑 겐지를 비교하는 건 모독입니다."
"아, 네. 미안해요."
유병세의 정색에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지이이잉.
어색한 침묵 속에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응급실이다.
통화를 연결하자 인턴의 보고가 이어졌다.
T.
A(교통사고) 환자가 도착했는데 흉부외과 처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 다시 내려가야겠네요. 콜이 와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어요.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유병세가 사과하고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최기석은 그대로 1층을 향했다.
한 침상에 부목과 목 고정기를 착용한 환자가 누워 있었다.
전자의무기록과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흉관삽관이 필요한 환자다.
최기석은 인턴에게 흉관삽관 준비를 시키고 이영호를 불렀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너 실력 좀 키워 주려고."
"그게 무슨 말인지……"
"저 환자, 흉관삽관을 해야 하는데 네가 해 봐."
최기석의 말에 이영호가 입을 쩍 벌렸다.
"진심이세요? 천자도 아니고 삽관이요?"
"너라면 할 수 있어. 내가 옆에서 봐줄 거니까 문제될 것도 없고."
"저 자신 없는데……."
이영호는 최기석의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처치와 술기에 대한 욕심으로 흉부외과를 찾았지만 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흉관삽관을 하게 된다면 메스를 손에 쥐고 봉합까지 펼친다.
어찌 보면 미니 수술이라고 할까.
"괜찮아. 자신 없는 게 정상이야. 처음 하는 처치인데다가 난이도도 있으니까. 하지만 무섭다고 도망치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어."
"……."
"써전을 키우는 건 구 할이 경험이다. 그게 송 교수님이 내게 해 준 말이야."
최기석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영호는 대답 없이 조금 떨어진 환자를 응시했다.
"정 자신 없으면 내가 할게. 강요는 아니다."
"아…… 아니에요. 선배. 제가 할게요."
이영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정도 두려움도 이겨 내지 못하면 앞으로 고난도 수술은 어떻게 배울까.
"잘 생각했다."
"네."
두 사람이 환자에게 다가가자 인턴이 막 흉관삽관 준비를 끝마쳤다.
이영호는 환자에게 흉관삽관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수술용 장갑을 착용했다.
'이상하네.'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 것만 같았던 심장박동이 잦아들었다. 하얗게 비었던 머릿속에는 흉관삽관의 과정이 차례대로 스쳐 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 힘든 변화다.
문득 최기석을 바라보자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스으으윽.
이영호는 포비돈 용액으로 가슴 부위를 넓게 소독하고 방포를 덮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턴이 국소마취제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다.
푸우우욱.
바늘이 거침없이 피부를 꿰뚫었다.
"천자는 이쯤이면 될까요?"
마취를 끝낸 이영호가 검지로 갈비뼈의 7번과 8번 사이를 가리키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호는 오케이 사인을 받자마자 바늘을 찔렀다. 이어서 주사기 몸통을 당기자 새빨간 피가 딸려 들어왔다.
첫 흉강천자에 성공한 것이다.
뿌듯함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이건 랩으로 보내."
주사기를 인턴에게 건네고 메스를 손에 쥐었다.
최기석의 도움을 받아 진행한 본격적인 처치, 이영호는 깔끔하게 흉관삽관을 마쳤다.
메스로 피부를 가르고 갈비뼈 근막을 떼내는 일.
튜브를 흉막 안에 삽관하는 일.
마지막으로 튜브 주변 부위를 봉합하는 일까지.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처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응급실 바깥으로 나왔다.
"선배. 해냈어요! 제가 흉관삽관을 했다고요!"
이영호는 참았던 감정을 드러냈다.
제 손으로 환자를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지금은 환희로 바뀌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오늘처럼 짜릿한 적은 처음이다.
"거 봐. 내가 잘할 수 있다고 했지?"
최기석은 웃으며 이영호에게 캔 커피를 내밀었다.
"그래도 선배 없이 저 혼자서는 못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알면 됐어. 그리고 앞으로 이런 기회 자주 만들어 줄 테니까 열심히 해 봐."
최기석은 커피를 마시며 이영호를 응시했다.
언젠가 이영호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을 그리며.
* * *
이른 아침.
권일수가 흉부외과 병동 회의실을 찾았다.
노우드 수술이 있는 날이라서 그런 걸까.
새벽에 깬 후 좀처럼 다시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일찍 출근해 버렸다.
권일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노우드 수술의 A부터 Z까지를 찬찬히 되새김질했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군."
권일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눈을 떴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 노우드 수술이 두려웠다.
수술 자체가 워낙 고난도에다가 사망률조차 높았기에.
사실 권일수는 그동안 네 번의 노우드 수술을 실시했다. 그중 두 명은 수술 중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수술 후에 사망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환자는 한 명뿐이다.
환자의 이름은 유건우.
유건우만이 노우드 수술을 견디고 그 뒤에 이어지는 상대정맥 - 폐동맥 단락술과 폰탄 수술까지 마치고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고얀 녀석."
권일수는 장혁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새파란 녀석이 그와 맞먹겠다고, 부교수를 하겠다고 덤비는 게 짜증났다.
장혁필이 수술을 잘하며 수완이 좋다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와 비교하면 아직 한참 아래다.
노우드 팀을 성공시켜서 꼭 장혁필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권일수는 벽시계를 힐끔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침 당직실에서 나오는 최기석이 보였다.
"100일 당직 서느라 고생이 많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최기석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날이 날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아침부터 어딜 가니?"
"소아흉부외과 병동에 가려고 합니다."
"이유는?"
"원래 병동 일 전에 소아과 병동 환자부터 살핍니다."
"좋은 습관이구나."
권일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최기석은 보면 볼수록 탐났다. 실력은 물론이요,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갖췄다. 송명진이 괜히 제자로 삼은 게 아니었다.
"교수님도 소아병동에 가시죠?"
"그래. 같이 가자꾸나."
권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회의실을 벗어난 것은 노우드 케이스 환자인 나재현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소아흉부외과 병동에 도착했다.
드르르륵.
나재현이 있는 2인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나재현 침상의 한쪽 안전 바가 내려가 있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사실은 나재현이 안전 바가 없는 쪽으로 몸을 뒤집고 있다는 점이다.
'젠장!'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고 나재현에게 달렸다.
침상을 뒹굴던 나재현이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대형 낙상사고가 발생한다.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야구선수가 다이빙 캐치를 하듯 몸을 날려 간신히 아이를 받았다.
두 손에 전해지는 묵직함에 내려앉았던 심장이 원위치로 돌아갔다.
"으아아아앙!"
놀란 나재현이 목청껏 울었다.
최기석이 아이를 품에 앉고 갖가지 재롱을 떨고 난 후에야 울음이 멈췄다.
"휴우…… 위험했습니다."
그는 아이를 다시 침상에 눕히고 안전 바를 올렸다.
만약 아이가 떨어졌다면 노우드 수술이 아니라 신경외과 수술을 받아야 했으리라.
"대체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권일수는 얼굴을 구기며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리고 병실 라운딩을 한 간호사를 찾아 면박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바이탈 체크하고 안전 바 내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린 환자는 성인보다 더 신경 써야 하는 거 몰라? 심지어 오늘 수술이 있는 환자인데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권일수는 씩씩거리며 병실로 돌아갔다.
아이를 살피는 최기석을 보자 화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잘했다. 기석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괜찮습니다."
"아무리 나이트 근무가 피곤해도 그렇지. 환자 관리를 이따위로 하다니…… 가자."
"네."
두 사람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권일수는 언짢은 표정으로 책꽂이 근처를 서성거렸으며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돌발 임무, '낙상환자 구하기'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일회성 버프, 대가의 수술을 획득했습니다.]
[대가의 수술: 수술 중 지혈, 봉합, 절제를 할 경우 환자의 경과가 2배 호전됩니다.]
* * *
오전 10시.
수술용 참관실에 하나둘 사람이 모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조지환을 비롯해, 장혁필과 심장외과 펠로우들, 소아흉부외과 협회 사람들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장 교수는 오늘 수술,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지환이 장혁필을 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