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서 (7)
삐이이익!
휘슬 소리과 함께 전 후반전이 끝났다.
최종 스코어는 4:0.
서울 1팀이 지방 2팀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야. 너 장난 아니다?"
이정협이 장난스럽게 최기석의 등을 두드렸다.
전?
후반을 통틀어 세 번가량의 실점 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최기석의 선방으로 모든 위기를 잘 넘겼다.
최기석이 골을 막지 못했다면 분위기를 탄 지방 2팀이 역전에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거미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결승전도 잘해 보자."
최기석은 이정협의 칭찬을 받으며 응원석에 자리 잡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려는 목표는 차근차근 완성 중이다.
쉬는 도중 골키퍼를 잘 봤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기에.
'차라리 잘됐지.'
최기석은 한국흉부외과협회 회장과 대화를 나누는 조지환과 권일수를 응시했다. 운동하고 두 사람 수발까지 들면 바쁠 거라 생각했건만 오산이다.
조지환과 권일수는 협회 사람들과 수다 떨기 바빴다.
"흠흠…… 기석아."
권일수가 자리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다가왔다.
"운전할 수 있지?"
"네, 교수님."
"그럼 너만 믿는다. 무슨 뜻인지 알지?"
"운전 걱정 말고 편하게 드세요."
최기석의 말에 권일수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부터는 대화에 술이 곁들여질 모양이다.
최기석은 가만히 앉아서 다른 팀의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하지만 휴식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부협회장 박순재가 그를 호출했다.
"부협회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얼굴을 보아하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부협회장님은 건강이 어떠신지……."
"나도 끄떡없어. 윤 교수가 워낙 수술을 잘했으니까."
박순재가 껄껄 웃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심포지엄은 참석 안 했나? 얼굴을 못 봤어."
"수술 스크럽 때문에 참석 못 했습니다. 대신 발표나 라이브 시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훌륭한 편이었지."
"조 과장이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런 듯싶습니다."
청중들은 모를 것이다.
조지환이 심포지엄을 성공시키기 위해 스태프들을 얼마나 갈아 넣었는지.
"조 과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지. 그건 그렇고 다음 달에 하루만 시간을 빼 봐."
박순재가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협회 주관으로 초음파 교육이 있거든. 와서 받아 보면 도움이 될 거야."
심장, 폐, 정맥류 등의 초음파 검사는 주로 순환기내과에서 시행한다. 흉부외과는 순환기내과에서 시행한 검사를 바탕으로 수술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흉부외과는 생존을 위해 직접 초음파 검사에 나섰다.
이를 통해 흉부외과의 진료 영역을 넓히며 개원의들의 숨통이 트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저는 배우는 거라면 뭐든지 좋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때면 100일 당직도 끝날 테니 참석도 부담스럽지 않을 거야."
"삼촌!"
대화 도중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나이는 9살쯤 됐을까.
어린아이들은 다 귀엽다고 하지만 이 아이는 그중에서도 특출 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연예인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대머리 아저씨가 삼촌 불러."
"그랬어?"
박순재가 아이를 번쩍 들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자 아이가 꺄르르 웃었다.
"내 조카일세. 매일 공부만 하는 게 안쓰러워서 특별히 데려왔지. 양지현라고 하네. 지현아, 인사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양지현가 귀엽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빠는 최기석이야."
"오빠가 아니라 아저씨 같은데……."
"그런 말 하면 못써."
"하하하. 아이들 눈에 나이 찬 남자는 다 아저씨로 보이겠죠. 그런데 조카분이 너무 예쁜데요? 나중에 연예인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엄마가 연예인이니까."
"연예인이요?"
"내 동생이 박상현이고 동생 와이프가 김소라야."
"아…… 그렇군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현은 올해 대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인물로 아내 김소라의 내조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을 듣고 보니 양지현은 김소라를 쏙 빼닮았다.
"괜찮으면 지현이랑 잠깐 놀아 줄 수 있나? 협회 사람하고 이야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요."
"물론입니다."
박순재가 떠나면서 최기석과 양지현만 남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띠링!
[돌발 임무, '아이 돌보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임무 완수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건 또 뭐야?'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랜만에 치료나 처치와 관계없는 임무를 받았다.
문제는 초등학생에 다니는 여자아이와 그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점이다.
문득 바라본 양지현은 자리에 앉아서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고민하던 최기석은 근처에서 동그랗고 작은 조약돌들을 챙겨 왔다.
"지혜야. 오빠랑 공기 할래?"
"하…… 공기놀이요?"
양지혜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아이의 표정은 마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담비의 경멸하는 표정과 닮았다.
표정을 마주한 순간 삶의 의욕이 떨어졌다.
"요새 누가 공기놀이해요?"
"……기왕 놀러 나왔는데 휴대폰만 보고 있으면 재미없잖아. 대신 지혜가 오빠를 이기면 오빠가 용돈 줄게. 그걸로 휴대폰 게임 결제하면 되지 않을까?"
"진짜요? 그럼 할게요."
양지현이 눈을 빛냈다.
이윽고 최기석과 양지혜의 공기 배틀이 시작되었다.
특별한 룰 없이 20년을 먼저 달성하는 쪽이 승리다.
"저 공기 잘 못하는데 먼저 해도 되요?"
"그래."
최기석이 미소를 지었다.
요즘 아이가 공기를 하면 얼마나 하겠나 싶었다. 거기다가 애초에 양지혜를 이길 생각조차 없었다.
"시작할게요."
양지현이 돌들을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녀는 1단과 2단을 가볍게 끝내고 3단에 들어갔다.
타다다닥.
컨트롤 미스로 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번엔 좀 힘들겠는데?"
"두고 보세요."
양지현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고사리만한 손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멀리 떨어진 세 개의 돌을 잡았다. 그리고 제법 떨어진 두 개의 돌마저 가뿐하게 캐치했다.
"……."
"……."
양지현의 썩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최기석은 깨달았다.
어린 타짜에게 걸려들었다는 것을.
이후 양지현은 계속 기세를 탔다.
5단까지 가뿐하게 끝낸 후 꺾기에서 5년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찾아온 마지막 꺾기, 여기서 5년을 먹으면 양지현의 사실상 승리다.
후우우웅.
돌이 허공으로 날랐다.
양지현이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둘렀지만 아쉽게 돌 하나가 튕겨나갔다.
"아…… 까비."
양지현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이제 아저씨 차례예요."
"지현아.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해 주면 안 될까? 그러고 보니까 내가 이겼을 때 보상이 없네. 내가 이기면 지현이는 나를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
"네!"
"좋아. 그럼 가 볼까?"
최기석은 심호흡하고 돌을 손에 쥐었다.
싸늘하다.
양지현의 시선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지.
손은 눈보다 정확하니까.
1단은 천천히, 2단은 여유롭게, 3단은 깔끔하게, 4단은 멋스럽게, 5단은 신속하게.
마지막 꺾기는 제비처럼!
휘리리릭.
최기석은 꺾기에서 5년을 먹었다. 한 서클을 번개처럼 끝낸 것이다.
이에 여유 만만하던 양지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최기석은 양지현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공기에 집중했다. 수없이 봉합 연습을 한 탓에 생긴 집중력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4번째 서클이 찾아왔다.
이번 써클에서 5년을 먹는다면 배틀의 승자는 최기석이다.
"아저씨…… 아니 오…… 오빠 진짜 공기 잘하네요."
"그렇지?"
"혹시 왼손 공기도 할 수 있어요? 왼손으로 공기하는 사람이 진짜 멋있어 보이던데."
양지현은 조심스럽게 미끼를 던졌다.
징조가 불안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기석이 이길 것 같았다.
'안 돼. 꼭 이겨야 돼.'
양지현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농장을 업그레이드 하려는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오빠. 할 수 있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해 볼까?"
"우와. 대박. 진짜 멋있겠다."
양지현이 바람 잡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최기석이 왼손 공기에 나섰다.
후우우웅.
공기돌이 허공으로 향한 순간 양지현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최기석은 가뿐하게 1단을 성공시켰다. 놀라운 것은 왼손으로 공기를 하나, 오른손으로 하나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최기석은 번개처럼 5단까지 성공시키고 꺾기만을 남겨 두었다.
세상에 이래도 되는 걸까.
최기석이 의사인지, 공기놀이 박사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휴우…… 긴장되는데."
최기석은 일부러 떨리는 척하며 손등을 응시했다.
손등에 다섯 개의 돌들이 보기 좋게 올라와 있었다. 어차피 대충 실패하고 양지현에게 차례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어린아이를 이겨 봤자 뭐하겠는가.
"우리 지현이 선생님하고 공기놀이하고 있었구나."
대화를 마친 박순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최 선생. 보기 좋은데?"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대답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손등에 공기돌을 허공에 띄었다.
덥석!
무의식적으로 돌을 전부 쥐었다.
박순재의 말에 대답하며 무의식적으로 실력을 발휘한 셈이다.
결국 최종승리는 그의 몫이 되었다.
"아……."
양지현이 살짝 입을 벌린 채 최기석의 손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나빠. 사기꾼!"
"지현아. 어디 가니?"
"몰라요!"
최기석과 박순재가 멀어지는 양지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돌발 미션, 아이 돌보기 미션에 실패하셨습니다.]
[숨겨진 칭호, 동심 파괴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동심 파괴자]
- 너는 나를 짓밟았지. 하나 남은 꿈도 빼앗아 갔지. 이젠 어디에도 길은 없어~ 이젠 내가 나를 벌해야 해~- 어린아이들에게 억울한 방식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하아……."
상태창을 확인한 최기석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 * *
체육대회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부상 입거나 다친 사람이 없어서 기껏 부른 앰뷸런스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최기석은 축구 결승에도 골키퍼로 나섰다.
다만 전과 달리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전 경기로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상대가 골문을 위협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안 되겠다. 있다가 무조건 용돈을 줘야지.'
여유로운 시간에 최기석은 양지현만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도 3분밖에 남지 않았다.
스코어는 1:0으로 서울 1팀이 지방 1팀을 리드하고 있었다.
파아아앙.
롱 패스가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상대팀 공격수가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골밑으로 쇄도했다.
이에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쓰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협회장님!"
커다란 외침과 함께 패스가 협회장에게 날아들었다.
탁!
패스를 받은 협회장이 아군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 에어리어를 침범했다.
점점 좁아지는 거리.
협회장이 간격을 재다가 우측 골대로 슈팅을 날렸다.
최기석은 슛의 방향을 확인한 후 정확하게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렁!
협회장의 슛이 그물을 흔들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최기석은 멍하니 있는 협회장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잠시 후 축구 결승전은 동점으로 마무리 되었다.
최기석은 연차가 낮은 의사들과 고기 구울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협회장과 조지환, 진성대 흉부외과 과장과 화장실을 찾았다.
"내 발이 아직 녹슬지 않았나 봐."
"협회장님이야 원래부터 협회 대표 스트라이커 아닙니까?"
협회장의 말에 조지환이 껄껄 웃었다.
"……."
"……."
문득 조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조지환은 최기석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골을 먹혔다는 사실을 간파한 모양이다.
오 분가량을 걷어 야외 화장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여자 화장실 입구에 양지현이 쓰러져 있었다.
순간 일행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지현아!"
최기석은 제일 먼저 양지현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