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서 (5)
심포지엄 개최시간이 다가왔다.
대강당은 병원 내 스태프들과 초대받은 의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터벅터벅.
정장을 차려 입은 장혁필이 사회자석에 서서 마이크를 두드렸다.
"안녕하십니까?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조교수를 맡고 있는 장혁필입니다. 본원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폐암 심포지엄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장혁필의 말에 객석이 조용해졌다.
"한국흉부외과 협회장님의 개회사로 심포지엄을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백발이 성성한 남성이 연단에 섰다.
한국흉부외과 협회장 남성철이다.
남성철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외부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첫 번째 세션은 윤지혜 교수의 로봇을 이용한 폐암 수술의 최신 동향 발표입니다."
장혁필이 손짓을 하자 윤지혜가 연단으로 올라왔다.
짝. 짝. 짝. 짝.
청중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의진대 흉부외과 스태프 윤지혜입니다. 제가 오늘 발표할 내용은……."
윤지혜는 차분하게 발표를 진행했다.
예전부터 프레젠테이션에 강했기에 외부 인사 앞에서의 발표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손에는 요약자료조차 없었으며 오직 포인터기만 들렸다.
이윽고 끝난 15분의 발표.
윤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전쟁은 지금부터다.
"제 발표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 주세요."
"여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과거 윤지혜가 몸 담았던 백진대 흉부외과의 스태프, 그것도 그녀와 앙숙이었던 이미라다.
"네. 이미라 선생님."
"발표 내용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로봇 수술의 최신동향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
"혹시 로봇 수술 동향 말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이미라가 윤지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제와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주제와 미묘하게 벗어나는 질문이다. 윤지혜 입장에서는 이미라가 엿 먹이기 위해 질문을 준비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질문 잘 들었습니다. 기술 개발 속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향후 15년 안에는 3차원 화면을 통해 원격 수술이 가능할 거라고 보입니다. 양쪽 병원이 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서울에 있는 의사가 대전에 있는 환자를 수술할 수 있는 셈이죠."
"……."
"더불어 전문가들은 의사가 촉감까지 느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윤지혜는 미소를 지으며 답변을 끝냈다.
반면 이미라는 분하다는 듯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꼈다.
20분간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윤지혜는 외부 인사들의 질문을 깔끔하게 답했다.
그 바탕에는 최기석이 준비해 준 자료에 있었다.
그가 건넨 자료에는 방대한 자료가 보기 좋게 정리되었다. 족집게 노트처럼 외부 강사들이 발표를 듣고 할 질문까지 담겼다.
이미라의 질문조차 최기석의 예비 질문에 속했다.
덕분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짝. 짝. 짝. 짝.
윤지혜의 세션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윤 교수, 잘했어요. 평소보다 훨씬 똑부러지던데요?"
"감사합니다."
윤지혜는 조지환의 칭찬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두 번째 세션은 박용일의 세션이다.
박용일은 비침습적(인체에 고통을 주지 않는) 폐암 수술에 대해 발표했다.
윤지혜가 로봇 수술을 다뤘던 만큼 비디오 흉강경 수술(VATS : Video-Assisted Thoracoscopic Surgery)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VATS 수술과 기존 개흉술의 차이점, 수술할 수 있는 환자군의 범위, 환자의 생존율 등등.
폐 분야 전문가다운 발표였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지나고 청중들이 다시 대강당으로 모였다.
이제 남은 순서는 두 가지.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라이브 시연과 조지환의 마지막 세션 발표다.
청중들의 착석이 끝나자 대강당 모니터에 수술실에 모습이 떠올랐다.
"박 교수님. 준비되셨습니까?"
"네. 준비됐습니다."
장혁필의 말에 박용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집도할 환자는 40세의 여자 환자로 건강검진을 통해 폐암 1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변성 부위가 적으며 다른 장기나 림프절에 침습이 없기에 비디오 흉강경 수술을 결정했습니다."
"……."
"지금부터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용일의 고갯짓에 스태프들이 자리를 잡았다.
'맘에 안 들어.'
조지환은 스크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수술 스태프들이다.
박용일은 라이브 시연에 레지 1년 차 서지훈을 제2보조로 쓰고 있었다. 실력을 검증받은 최기석이라면 그나마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대상이 서지훈이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평소 박용일답지 않은 행동이라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의 불편한 심기에도 불구하고 수술은 무난히 진행되었다.
스으으윽.
서지훈이 망설임 없이 흉강을 천자하고 천자한 자리에 카메라 포트를 설치했다.
이후 제1보조가 5번째 늑간의 전면부와 후면부를 절개하여 수술 포트와 어시스트 포트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환자의 옆구리에 세 개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구멍은 카메라 포트로 수술 부위를 확인한다.
나머지 하나는 집도의가 수술하는 수술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제1보조가 사용하는 어시스트 구멍이다.
잠시 후 스크린이 반으로 갈라졌다.
수술실의 풍경과 카메라 포트로 보는 수술 부위가 동시에 나타났다.
"으음……."
"역시 수술 시야가 좁네요."
청중들이 스크린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사이 박용일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수술에 나섰다. 수술 시야는 좁았지만 제1보조의 도움을 받으며 변성 부위를 잘라 냈다.
텅!
곡반에 잘린 폐 조직이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측하엽에 있던 변성 조직입니다. 카메라로 살핀 결과 추가적인 변성 부위가 없으니 지혈과 추가적인 봉합으로 수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박용일이 남은 처치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비디오 흉강경 수술의 라이브 시연이 무사히 끝났다.
동시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터졌다.
'간 졸이게 만드는군.'
조지환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지었다.
본래 의진대 흉부외과에서는 비디오 흉강경 수술을 하지 않았다. 비디오 흉강경 수술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효용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술도구의 구입과 새로운 수술기법 수련.
이 두 가지 부담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환은 심포지엄을 위해 박용일을 쪼았다.
그 성과는 다행히 성공이었고 말이다.
잠깐의 휴식시간 후 마지막 연사로 조지환이 나섰다.
조지환의 발표 주제는 폐암 말기 환자에게 필요한 연명치료.
원론적인 이야기만 꺼냈기에 발표 후에 질문이 없었다.
"심포지엄의 마지막 순서로 총평을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인 장혁필이 심포지엄 내용을 정리했다.
이어진 폐회사를 끝으로 의진대 흉부외과 폐암 심포지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 * *
"후아……."
최기석은 한숨 쉬며 로젯을 나왔다.
방금 막 수술 어시스트를 마쳤다.
수술 시간 자체는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응급환자라서 내내 가슴을 졸였다.
한숨을 돌릴 겸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심포지엄이 끝났는지 정장 차림의 인원들이 바깥을 활보하고 있었다.
"기석아."
낯익은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장혁필과 윤지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뒤풀이는 참석 안하세요?"
"우리가 갈 필요 있나? 오늘 주인공은 과장님하고 권 교수님인데."
장혁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심포지엄은 어땠나요?"
"잘 끝났어. 스태프들이 갈렸으니까 잘 끝나는 게 당연하지만. 먼저 자리 잡을 테니까 우리 거까지 주문해."
"카페모카랑 카푸치노 시킬게요."
"척척박사네."
최기석은 장혁필에게 카드를 받아 결제하고 자리에 앉았다.
"기석아. 고마워."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네가 자료 조사를 잘해 줬잖아. 덕분에 발표 잘 끝냈어."
윤지혜가 방긋 웃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지혜가 너한테 자료 조사시켰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어디 나도 좀 보자."
장혁필이 대화에 껴들었다.
그는 윤지혜의 휴대폰에 있는 심포지엄 자료를 매의 눈으로 훑었다.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야. 이만한 수준이면 심포지엄 날로 먹은 건데?"
장혁필이 감탄을 터뜨렸다.
자료조사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자료에 방대함과 깔끔한 정리 수준은 펠로우와 맞먹었다.
최기석의 수술 솜씨가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료를 살피는 수준까지 뛰어날 줄은 몰랐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은 잊지 않을 테니까 부탁할 거 있으면 언제든지 해."
"네."
지이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최기석은 커피를 챙겨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어제 성형외과 과장님 도와서 수지접합 수술했다며?"
"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최기석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미경을 보며 신경과 혈관을 꿰매는 노기형의 섬세한 손길, 그것은 아주 좋은 자극이 되었다.
각종 봉합술이 손에 익으면서 살짝 자만심이 들었는데 어제 이후 자만심이 완전히 날아갔다.
세상에 10-0 봉합사라니…….
지금도 수술 당시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안 그래도 과장님이 너 엄청 좋아하시던걸? 나한테 노골적으로 말하더라. 널 흉부외과에서 빼오고 싶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겸손한 척하기는……."
장혁필이 피식 웃고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이버 케이스 환자는 어때?"
"아직 킬라렌 치료에 미련을 못 버린 것 같습니다."
"피곤하네. 환자는 있는데 수술은 못 하다니……."
"하지만 내일 중으로는 결판이 날 겁니다."
"결판?"
"제가 마지막으로 던진 미끼를 환자가 물었습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수술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번 들어 볼까?"
최기석은 그동안 환자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미끼를 던졌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장혁필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떠한 맞장구도 없었다.
"사실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법이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환자가 굴러 들어왔는데 포기할 수 없지. 이 환자 수술하고 다른 환자 두 명 정도만 더 받으면 얼추 리모델링이 끝날 거다. 세이버 팀은 그때부터 시작이야."
"네!"
최기석은 장혁필과 윤지혜와 대화를 나누고서 카페를 떠났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위장관외과 병동.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양희와 김정혁이 보였다.
"최 선생님."
"형!"
두 사람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짜식.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완전 잘 지냈죠."
최기석은 김정혁의 머리를 쓸어주며 손양희를 응시했다.
"원장님. 몸은 좀 어떠세요?"
"아랫배가 조금 아프지만 괜찮아요."
손양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최 선생님 신세를 지네요. 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저보다는 정혁이가 잘했죠. 기특하게 정혁이가 원장님이 아프다고 말해 줬거든요."
"정혁이도 고맙다."
"아니에요. 전 한 거 없어요."
김정혁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저녁 안 먹었으면 형이 치킨 사 줄까?"
"네!"
"형이 잠깐 볼 일이 있거든? 그거 끝나면 배달 받아서 가져다줄게."
최기석은 흉부외과 병동으로 치킨 배달을 시킨 후 위장관외과 병동을 떠났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순환기내과 병동이다.
"후우……."
심호흡하고 문민경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장혁필 앞에서 큰소리쳤지만 사실 문민경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최기석의 인사에 문민경이 밝게 웃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오늘도 그저 그러네요. 근데 선생님, 저 결심했어요."
"결심이라면……."
"저 세이버 수술 받을게요. 수술해 주세요."
문민경의 대답에 최기석이 씨익 웃었다.
미끼를 물어 버렸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