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서 (4)
"분위기 잡으시는 걸 보니까 큰일인가 봐요?"
"작은 일은 아니지. 후후후."
민주혁이 캔 커피를 내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한국흉부외과협회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가 있대."
"체육대회요?"
"어. 참가 멤버가 조 과장님하고 권 교수님하고 나다. 근데 이 자리 너무 불편해."
"……."
"같이 가는 사람들도 그렇고. 가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까 벌써 몸서리가 쳐지네."
"선배 대타로 체육대회에 나가면 되는 거죠? 그럼 갈게요."
"오올. 용감한데?"
"선배가 제 부탁을 들어주셨는데 저도 당연히 들어 들어야죠."
최기석이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전이라면 부담스러워서 참석하지 않을 자리지만 지금은 달랐다. 체육대회에 참석하면 각 대학 흉부외과의 수장들을 직접 볼 수 있다.
잘하면 좋은 인연을 쌓을지 모른다.
최소한 윤지혜가 MIDCAB 수술을 한 부협회장 박순재를 다시 본다는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화끈해서 좋네. 오랜만에 야식이나 먹을까?"
"네."
"먹고 싶은 거 시키고 회의실에서 기다려. 난 지훈 선배랑 통화하고 들어갈게."
"네."
최기석은 회의실로 돌아가 야식 메뉴로 피자를 시켰다.
이영호와 대화를 나누는데 민주혁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서지훈은 생각이 없다고 해서 세 사람만 야식을 먹었다.
"아주 좋네, 좋아."
민주혁이 최기석과 이영호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냥 너희 둘이 너무 좋다. 솔직히 올해까지 막내를 못 벗어날 줄 알았거든. 빅5 병원 흉부외과에도 레지던트 지원자가 없는 판국이니까. 그런데 기석이 네가 들어오고 영호까지 픽스턴을 박았잖아. 아주 행복하다, 행복해."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요?"
"희망사항은 접어 둬."
"……네."
민주혁의 말에 최기석은 금방 꼬리를 내렸다.
흉부외과가 메이저로 떠오르는 일은 아직 험난해 보였다.
과거에 비해 수술 수가가 조금 올랐지만 그 정도로 인턴들이 흉부외과를 택할 이유는 없다.
흉부외과는 여전히 최고의 3D 진료과다.
최근 300병상 이상 병원에서 흉부외과를 의무적으로 신설해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어떻게 해야 흉부외과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잠자코 있던 이영호가 입을 열었다.
"그걸 알면 벌써 흉부외과가 잘 되겠지. 뭐. 굳이 꼽아보자면…… 미국처럼 흉부외과 의사들한테 돈을 많이 주면 되지 않을까? 아무리 힘들어도 보상이 확실하면 지원할 사람이 생길 것 같은데."
"선배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그래. 꿈같은 이야기지."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은 KTBC 기자 박광수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흉부외과에서 스타 의사가 나온다면 그때는 부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그건 그렇고 영호, 너는 기석이한테 낚여서 흉부외과로 왔지?"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척보면 딱이지. 내가 팔꿈치 도사인 거 몰랐냐? 보나마나 처치 가르쳐 준다고 꼬셨을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선배, 꼬셨다니요? 흉부외과 과의 새싹을 발견한 거죠."
"그게 그렇게 되나?"
민주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열심히 해 봐. 너도 우리 과 와봐서 알잖아. 이놈이 어떤 놈인지.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나 말고 기석이한테 묻고."
민주혁의 주도로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도착한 야식을 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민주혁은 기숙사로, 이영호는 그대로 회의실에, 최기석은 당직실을 찾았다.
'전화가 왔었네.'
최기석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놨던 것을 뒤늦게 기억하고 번호를 확인했다.
고아원에 있는 김정혁에게 전화가 왔다.
김정혁은 과거 의료사고로 고통 받았던 아이로 최기석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어. 정혁아 무슨 일이니?"
최기석은 화상통화로 전화를 걸었다.
[형.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이야. 이제 닭살 돋는 이야기도 잘하네."
[제가 원래 치킨을 좋아하잖아요.]
김정혁의 너스레에 최기석은 배를 잡고 웃었다. .
혹시나 해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김정혁을 살폈다.
상태와 경과는 모두 양호.
잠깐이나마 했던 걱정이 씻은 듯 날아갔다. 재활 치료가 잘 끝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형이 보내 준 태블릿 PC는 잘 쓰고 있어?"
[네. 애들 모아서 주말마다 영화 보고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네가 올해로 고2 맞지?"
[네. 안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도 형처럼 의사 되려고요.]
"그래.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혹시 형이 있는 흉부외과로 올 거니?"
[아니요. 성적을 봐야겠지만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중 하나로 가고 싶어요.]
김정혁의 대답에 속이 쓰렸다.
정혁이, 너마저…….
[저 궁금한 게 있는…… 아, 아니다.]
"왜 그래. 말해 봐."
[원장님이 아까 배 아프다고 하셨거든요.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
"전화기 들고 원장실로 가 봐. 기왕 이렇게 된 거 원장님께 인사드리게."
[잠시만요.]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방바닥의 모습이 비쳤다.
이윽고 원장실에 있는 손양희가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원장님. 별 탈 없으시죠?"
[네. 보육원도 잘 돌아가고 아이들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혁이 말로는 복통이 있다고 하시던데."
[옆구리가 조금 따끔한 정도예요. 괜찮아요.]
손양희가 손을 내저었고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손양희를 살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원장님. 우측 하복부를 손으로 눌러 보시겠어요?"
[갑자기 왜요?]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보세요."
"알았어요. 아윽!"
손양희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원장님. 지금 당장 저희 병원으로 오세요. 아무래도 수술을 받아야 될 것 같아요."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병원에 가야 할 정도입니다. 우측 하복부에 통증이 있는데다가 아마 구토 증상도 있을 것 같은데. 충수돌기염일 확률이 높아요."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습니다. 지금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최기석은 손양희가 병원에 오도록 설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응급실에 도착한 손양희가 전화를 걸었다.
최기석은 응급실 수납창구에서 손양희와 보육원 선생님 이나래를 만났다.
"잘 오셨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요."
그는 손양희가 응급실 접수를 하고 진료와 검사를 받는 동안 곁을 지켰다.
잠시 후 나온 복부 CT의 결과는 충수돌기염.
최기석이 예상한 대로다.
"추…… 충수돌기염이면 수술해야겠네요?"
손양희가 불안한 눈동자로 최기석과 진료 인턴을 응시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수술이 처음이라 너무 떨려요."
"수술을 받게 되면 누구라도 걱정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원장님뿐만이 아니랍니다."
최기석은 손양희의 손을 감싸 쥐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효과로 손양희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최기석은 침상에 누운 손양희를 수술실까지 배웅하고 보호자 대기석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응급으로 오는 다른 흉부외과 환자를 돌볼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니까.'
최기석의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뒤늦게 깨달았다.
보호자의 입장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충수돌기 수술의 난이도가 높지 않음에도 괜히 자신마저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수술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손양희를 위로하던 안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선생님은 바쁘실 텐데 들어가세요. 여기는 제가 있을 게요."
"아닙니다. 당직실에 가 봤자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네요.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서 내려가면 됩니다."
이나래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리를 지켰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최기석은 네 차례가량 응급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교통사고 환자에게 흉관삽관을 했을 뿐, 심각한 환자는 없었다.
지이이이잉.
긴 기다림 끝에 수술실 문이 열렸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손양희를 살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는 손양희가 병동에 입원하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당직실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깨달은 보호자의 마음.
환자를 먼 곳에 떠나보낸 듯한 불안함과 초조함이 여전히 가슴에 남았다.
'강해져야 해. 더.'
최기석은 의사로서 다짐했다.
수술실을 나왔을 때 보호자가 통곡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고.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처치에 능숙한 이영호가 픽스턴에 나서고 서지훈이 레지던트 일을 시작하면서 병동이 잘 굴러갔다.
때마침 그 시기가 한민우가 브랜치로 쫓겨난 시기와 맞물렸기에, 흉부외과 스태프들은 이를 한민우 효과라며 농담처럼 말했다.
최기석은 나흘을 무탈하게 보냈다.
수술 보조를 서며 각종 동영상을 수집했으며 논문 읽기, 아지트에서의 집도 연습, 봉제인형 꿰매기 등등의 개인 연습을 꾸준히 했다.
그의 골칫거리는 오직 세이버 수술 케이스인 문민경뿐이었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일에 목을 매달지는 않았다.
가끔 찾아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을 따름이다.
그렇게 평화롭던 흉부외과의 일상에 처음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5월의 첫째 주 목요일.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폐암 심포지엄이 열리는 날이다.
* * *
별관 5층에 위치한 대강당.
조지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강당에 앉은 의사들을 훑어보았다.
심포지엄 시작까지 30분이 남았음에도 강당이 가득 찼다.
타 진료과 스태프들이 껴 있다고 해도 참석자 수는 충분히 합격점이다.
"발표 준비는 잘 했겠죠?"
"네."
그의 곁에 선 윤지혜와 박용일이 동시에 대답했다.
"나야 두 사람 실력을 잘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이 기회를 잘 살려 봐요. 박 교수는 특히 더."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가 봐요."
조지환의 손짓에 두 사람이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터벅. 터벅.
유난히 거슬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임진우와 그의 스태프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임진우를 발견한 조지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오랜만이야."
조지환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진짜 오랜만이지. 거의 반 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과장되더니 얼굴에 꽃이 활짝 폈네."
"……."
"눈엣가시 같았던 송 교수를 보내니까 날아갈 것 같나?"
의대 동기인 임진우가 초반부터 돌직구를 날렸다.
"송 교수는 제 발로 나갔어. 내가 쫓아낸 건 아닐세."
"알 만한 사람들끼리 왜 그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불쾌한 소리군."
"어허. 원래 쓴소리 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 모르나?"
임진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말이야 송 교수 없는 의진대 흉부외과는 어떤가? 아무래도 팥 없는 단팥빵이지?"
"네 기대와는 달리 아주 잘 돌아가고 있어. 그나저나."
조지환이 헛기침 하며 화제를 돌렸다.
"너희 흉부외과에서 얼마 전 의료사고로 환자가 죽었다고 하던데. 과장인 자네는 실실 쪼개면서 잘도 돌아다니는군."
"뭐라고?"
"내가 틀린 말 했나?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빅5 병원 흉부외과 중 제일 급이 떨어지는 게 진형대 흉부외과라잖아. 과장인 자네가 바로 서야 과도 바로 서지 않겠나?"
"은근하게 엿 먹이는 건 여전하군."
임진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 흉부외과는 따라올 수 없다는 걸. 가자."
임진우가 휙 하니 조지환을 스쳐 갔고 조지환도 이를 갈며 대강당으로 들어갔다.
'어디 마음껏 설쳐 봐. 마지막에 웃는 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