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서 (2)
터벅. 터벅.
최기석은 활기차게 복도를 걸었다.
오늘 당직 때는 유별나게 응급환자가 많이 찾아왔다. 덕분에 환자 바라기로 높은 체력을 유지했다.
"오늘이구나!"
최기석의 목소리가 밝았다.
아지트 앞에 작은 스티로폼 박스가 놓였다.
오늘은 새끼 양 심장이 도착했다. 어제 권일수에게 들은 팁을 시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재빠르게 세팅을 마치고 테이블 위에 심장을 올려놓았다.
오늘 연습할 수술은 팔로 4징증.
마스터리의 숙련도는 이미 3단계지만 대부분 소 심장으로 쌓았다.
새끼 양 심장으로 수술했을 때는 성과가 썩 좋지 못했다.
[소아심장 수술은 시야가 가장 중요해. 소아의 혈관은 성인보다 작고 가늘기 때문에 혈관을 잘 보고 처치하지 않으면 애꿎은 부위를 건드리지.]
[혼자 연습한다면 광학안경의 도수를 높여 봐.]
권일수의 조언을 떠올리며 용의 눈을 사용했다.
팔로 4징증 수술의 첫 단계는 심실간 중격을 복구하는 일.
다만 오늘은 예전과 달리 줌 인 모드로 수술 부위를 살폈다. 수술 부위가 클로즈업 되자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평소와 다른 수술 시야가 어색했다.
얼굴을 수술 부위에 들이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수술 부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아 두려움마저 들었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였다. 그리고 직접 손상시킨 심실간 중격에 패치를 덧대고 5-0 prolene으로 봉합을 시작했다.
봉합 속도가 느렸다.
다른 때에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소 심장이 아니라 새끼 양 심장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하지만 봉합은 그 어느 때보다 정밀했다.
마치 양복사가 수제양복에 박음질을 하듯이.
"후아……."
최기석은 심실 중격 결손을 처치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새끼 양 심장을 이렇게 깔끔히 봉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처치에 나섰다.
스으으으윽.
메스로 두꺼워진 우심실을 잘라 내고 협착된 폐동맥판막의 유출로를 뚫어 주었다.
아지트를 가득 메운 피 냄새.
수술 도구들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 등등.
최기석은 주변의 모든 감각을 잊고 오로지 팔로 4징증 수술에 몰두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테이블에는 어느새 제 모습을 찾은 새끼 양 심장이 놓였다.
띠링!
[신규 마스터리, 소아심장 수술의 정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소아심장 수술의 정석(1/1)]
[이 수치는 소아심장에 관련된 모든 수술에 적용됩니다. 모든 소아심장 수술의 숙련도 1단계가 상승합니다.]
알림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최기석은 아무 말 없이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권일수의 조언이 맞았다.
수술 시야를 더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아심장 수술의 포인트다.
시야에 익숙해진다면 속도가 빨라질 것은 분명한 일.
벽에 부딪쳤다고 생각한 소아심장 수술 부분에 한 줄기 빛이 찾아 들었다.
최기석은 아지트를 정리하고 병동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이예림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밤새느라 피곤하시죠?"
"아무렴 최 선생님만큼 힘들겠어요? 100일 당직이 벌써 60일째인데."
"전 초 레지던트라서 괜찮아요."
"초 레지던트요?"
이예림이 되물음에 최기석은 아차 싶었다.
초 레지던트는 강하나가 병동간호사로 있을 때 지어 준 별명이다.
이예림이 알 턱이 없었다.
"으음…… 예전에 있던 간호사가 저를 레지던트를 초월한 레지던트라고 불렀거든요. 그래서 생긴 별명이에요."
"레지던트를 초월한 레지던트라……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이예림이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한민우가 브랜치로 떠난 이후 이예림은 웃음을 되찾았다.
또한 며칠 전 들은 바에 따르면,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한민우를 고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최기석은 이예림과 잡담을 나누다가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병실에서 처치하고 있는 이영호를 발견했다. 이영호는 50대 남자 환자에게 비위관을 삽관 중이다.
최기석은 이영호의 처치를 몰래 지켜봤다.
과거 무리한 비위관 삽관으로 코드 블루를 만든 이가 바로 이영호다.
"천천히 숨 들이마시세요. 침 삼키시고요."
이영호가 젤을 묻힌 튜브를 환자의 콧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사기로 튜브에 약간의 공기를 넣은 후 청진기로 폐음을 청취했다.
이어진 후속 처치까지 깔끔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드르르르륵.
"선배. 보고 계셨어요?"
"이제는 실수 안 하네?"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비위관 삽입 정도는 껌이라고."
이영호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정리하고 회의실로 와."
"네."
잠시 후 두 사람은 회의실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았다.
"드디어 우리 영호가 픽스턴으로 왔구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데?"
최기석은 농담과 진담을 반반 섞어서 말했다.
사실 수술을 제외한 처치는 대부분의 인턴의 몫이다. 인턴이 제대로 일을 못하면 입원환자 관리에 큰 차질이 생긴다. 환자에게 없었던 병이 생길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력 있는 이영호의 픽스턴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헤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넌 충분히 능력 있어. 앞으로 더 성장할 거고."
최기석이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네가 약속을 지켰으니까 이젠 내가 약속을 지켜야지."
"그럼……."
"네가 잘 클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소리야."
최기석은 봉제인형과 쌈지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쌈지 속 수술 도구로 봉제 인형에 각종 봉합술을 펼쳤다.
끼기기긱.
찰칵!
'대박. 역시 선배야.'
이영호는 최기석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불어 그와 같은 실력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자. 받아."
최기석은 봉합을 끝낸 인형을 이영호에게 내밀었다.
"내가 한 것처럼 너도 매일 인형 가지고 봉합 연습해. 전임강사로 온 김태식 선생님에게 배운 건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
"……."
"한 가지 더. 매일 흉부외과 논문 2개씩 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다 읽고 감상문 제출까지."
"서…… 선배. 너무 빡센 거 아닌가요?"
"남보다 잘하고 싶으면 남보다 더 연습해야지."
"……네."
최기석은 시무룩한 이영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이 겹쳤다. 자신 역시 송명진이 내준 과제의 양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영호라면 잘 이겨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제 버프인 성장의 비술을 가졌으니 실력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일이 더 편해지리라.
최기석은 이영호와 대화를 마치고 잡일에 들어갔다.
수술 스케줄 정리, 입원환자 및 수술환자 브리핑, 케이스 발표 자료 확인을 하자 회의 시간이 찾아왔다.
톡. 톡. 톡.
회의가 별 탈 없이 끝난 후 조지환이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순간 스태프들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늘은 우리 흉부외과에 역사적인 날입니다. 얼마 전 중국 창진대 병원 부원장이 수술 참관했던 건 알고 있겠죠?"
"……."
"어제 그쪽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우리 흉부외과와 협력하고 싶다고. 내일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하니까 곧바로 계약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장혁필이 미소를 지으며 박수치자 다른 스태프들도 박수를 쳤다.
"세이버 팀원들은 특히 수고가 많았어요. 창진대와 협력을 맺으면 앞으로 중국 VIP 환자가 꽤 많이 넘어올 겁니다. 타 대학 흉부외과를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니까 다들 부지런히 실력을 갈고닦도록 해요."
"네!"
"더불어 두 사람은……."
조지환이 장혁필과 권일수를 번갈아 응시했다.
"심장 클리닉 준비에 박차를 가하세요. 리모델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두 교수의 대답으로 회의가 끝났다.
회의에 이어서 회진까지 무사히 지나갔다.
오전 스케줄에 여유가 있었기에 최기석은 곧바로 순환기내과 병동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병실로 들어가 침상에 누운 환자에게 말을 건넸다.
상대는 세이버 수술 케이스 환자인 문민경이다.
"네."
문민경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호자분은 잠깐 자리를 비우셨나 봐요?"
"담배 피운다고 밖에 나갔어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볼일이시죠?"
"환자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저는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문민경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또 수술을 권유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가 킬라렌 치료에 대해서 알아 봤는데요. 치료방법이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명상에 식이요법을 가미한 치료법이잖아요. 환자분에게 딱히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의외네요."
문민경이 최기석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민간요법이라고 비웃으실 줄 알았는데."
"민간요법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벌에 물리면 된장 같은 걸 발랐고요."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문민경의 반응을 살폈다.
승부는 지금부터다.
대화하기 편안한 분위기는 만들었으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어제 대화 중에 심장 수술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에요. 친한 동네 사람이 있었는데 심장 수술 중에 죽었어요."
"그분이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아시나요?"
"아마…… 급성 대동맥 박리인가? 그런 병이었던 걸로 알아요."
"저런…… 급성 대동맥 박리라면 갑자기 쓰러지셨겠네요. 게다가 병원 도착까지 지연됐다면……."
최기석은 말끝을 흐리다가 말을 이었다.
"수술이라는 게 참 미묘합니다. 중요한 시기를 놓쳐 버리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저 보고 세이버 수술을 받으라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문민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다.
"왜죠?"
"의사는 수술을 권유할 수 있지만 억지로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의료윤리의 규칙 중 환자의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굳이 윤리 문제가 아니더라도 환자분이 싫다고 하는 수술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생님하고는 말이 통하네요."
문민경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건 그렇고 킬라렌 치료 말입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보를 얻으셨죠?"
"네. 정보를 얻을 때가 거기밖에 없었어요. 아. 잡지에 실린 기사가 하나 더 있네요."
"킬라렌 치료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정말 생각이 있다면 조금 더 고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편향된 정보만 듣고 판단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제가 사이트에 가보니까 치료 성공 사례만 있고 실패 사례는 하나도 없더군요."
"그…… 그건 그렇죠."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인분 때문에 수술이 두려우신 것도, 그것 때문에 킬라렌 치료를 생각하신 것도 말입니다."
"……."
"사실 환자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에요. 킬라렌 치료를 받아 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그때 수술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수술을 먼저 받고 킬라렌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요. 아예 수술을 안 받을 수도 있고요."
"……네."
"중요한 건 어떤 선택이든 결국 환자분이 직접 하신다는 겁니다."
최기석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환자에게 억지로 수술을 권유해 봐야 반작용만 생긴다.
그럴 바에는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옳다.
단.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하면서.
"저는 의사로서 지금이 수술에 좋은 시기라고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최종 선택은 환자분께 맡기겠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제 할 말을 다하고 병실을 나왔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최기석!"
누군가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인턴 시절 봉합 대회를 주최했던 성형외과 과장 노기형이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바쁘냐?"
"지금은 아니지만…… 한 시간 후에 스크럽 들어갑니다."
"일단 따라와."
노기형이 다짜고짜 최기석의 가운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석이, 좀 잠깐 빌리자. 지금 쓸 만한 애들이 없어서 그래.]
노기형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이윽고 통화가 끝나자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대체 무슨 일이신지……."
"하아…… 설명할 시간도…… 하아…… 그냥…… 와."
두 사람은 복도를 질주하며 수술실에 들어갔다.
스크럽을 끝내고 로젯으로 들어가자 수술대에 환자가 누워 있었다.
'이런, 미친.'
최기석은 수술대에 누운 남자를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의 손가락이 잘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