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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20화 (119/407)

팀 세이버, 그 두 번째 (4)

"기석이었나?"

조지환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최기석 혼자서 그를 보러 온 것은 처음이다.

"네, 과장님."

"거기 앉아."

조지환이 하던 일을 마치고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탐색전이라도 하듯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지환이다.

"어제 수술 잘 봤어. 덕분에 수술 시간이 단축됐더군."

"제 역할은 크지 않았습니다. 장 교수와 김 선생의 봉합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뭐. 그런 것도 있지."

조지환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뉴스 말이야. 잠깐 병원 바깥에 나갔다가 산모의 출산을 도왔다고?"

"아. 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뒤늦게 박광수를 떠올렸다.

박광수는 그가 바깥에서 처치한 것을 기사로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 기사가 아닌 뉴스로 내보냈고 조지환이 그것을 본 모양이다.

"내가 미리 알았으면 네 소식을 병원 소식지에 실을 수 있었어. 뉴스까지 나간 일이 병원에서 묻힌다면 그것도 웃기지 않나?"

"죄송합니다. 저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앞으로는 사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용건은?"

조지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눈치 100단인 조지환이다.

자신이 할 일 없이 독대하러 온 것이 아님은 진작 알아챘으리라.

최기석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어붙은 심장은 이런 상황에서는 무용지물,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헤쳐 가야 한다.

"우리 과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과장님의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조지환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렇습니다. 치프가 이예림 신입 간호사를 지속적으로 성추행하고 있습니다.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기석은 CCTV 영상을 재생한 휴대폰을 조지환에게 내밀었고 조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영상을 내려다보았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과장실의 공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이윽고 조지환이 최기석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확실히 이건 내가 몰랐던 문제군."

"……."

"내가 한 선생을 불러서 이야기하겠어."

"과장님. 죄송하지만 어떤 식의 처벌이 있을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최기석이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전의 그라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조지환의 처치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력이 오르고 정치력을 의식하면서 행동이 달라졌다.

기껏 자리를 만들어놓고 가장 중요한 처분에 관한 것을 어물정 넘어갈 수 없다.

"내가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보고해야 하나?"

조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장님이 불편해하실 것은 이해하지만 저는 듣고 싶습니다. 저 역시 치프가 성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흐음…… 병원 내 성희롱은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야."

조지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선생의 성희롱이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이번에는 따끔하게 훈방하고 다음 번에 또 걸리면 그때는 제적을 생각 중이다."

"교수님. 이렇게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훈방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최기석은 들끓는 속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면 조지환에게 역풍을 맞는다.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야. 그렇다고 일을 크게 벌리면 흉부외과가 벌집이 될 거라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

"이건 당사자들만 조용히 있으면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이번 건만 묻자는 거야. 대신 내가 한 선생이 다시는 똑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지."

"성희롱이 재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최기석이 말을 계속했다.

"그것만으로 이 간호사가 느낀 수치심과 모욕감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

최기석의 말에 조지환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탔다. 독한 커피향이 과장실을 휘감았다.

탁!

조지환이 본인의 앞자리와 최기석의 앞자리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이거 전부 네 짓인가? 간호사를 부추겨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동영상도 그렇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아주 용감해.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15년을 보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조지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용감한 건 좋은데 말이야. 내부 고발자의 최후는 생각 안 해 봤나?"

"……."

"증거가 뚜렷하니 윤리위원회에 제소해서 한 선생을 처벌할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다음은?"

"……."

"흉부외과가 벌집이 되면 내가 너를 가만둘까?"

조지환이 흉흉한 눈빛을 쏘아 냈다.

노골적인 협박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을 크게 키울 생각하지 마. 다음 달이 폐암 심포지엄이고 심장 클리닉 리모델링도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 과에 고춧가루 뿌리는 건 용납 못해."

"과장님. 사실 제게 묘안이 있습니다."

"묘안?"

"네. 그 방법을 사용하면 과장님과 제가 같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조지환이 턱을 쓸어내리며 어서 말해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 달 말일에 한 선생을 브랜치(부속병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브랜치로?"

"그렇습니다. 일단은 브랜치로 보내고 그 이후에 이 간호사가 한 선생을 고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성희롱 자체는 우리 병원 흉부외과에서 일어났더라도 사건은 인천에서 터지게 됩니다."

최기석의 말에 힘이 실렸다.

브랜치에서 일이 터지면 사건의 파급력이 본원에 덜 미친다.

더불어 이예림이 근무 중 한민우에게 보복 당하는 일 또한 막을 수 있다.

"이 간호사에게는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병원 일이 아니라 개인 소송으로 진행된다면 흉부외과에 피해는 크지 않을 겁니다."

"흐음……."

조지환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원하는 건 그것뿐인가?"

"약소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어차피 브랜치에 가도 오래 생활은 못하겠지만 한 선생이 인천 브랜치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복수로군."

조지환의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 브랜치는 의진대 부속 병원 중 흉부외과 근무환경이 가장 나쁘다.

"한 선생을 보낸다고 치면 부족한 인원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최기석은 이번 달로 전역하는 서지훈과 특별 전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능력한 한민우를 데리고 있을 바엔, 서지훈을 키워서 미래를 보는 게 좋다고 덧붙이면서.

"이번 일은 네 말대로 진행하겠어. 하지만 흉부외과에 불똥이 튄다면 각오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과장실을 나왔다.

띠링!

[정치력이 1단계 상승하여 5가 됩니다.]

[하얀 거탑에 오르면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P.

P를 제공합니다. 유니크 아이템, 레벨업 스톤(무작위)을 지급합니다.]

알림이 들렸지만 확인할 여유가 들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자 아직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태연한 척 연기했을 뿐, 협상하는 내내 긴장이 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예림이 물었다.

최기석은 대답 없이 이예림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됐으니까."

"정말요? 고마워요. 최 선생님. 저 진짜……."

이예림이 그 자리에서 서서 흐느껴 울었고 최기석은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한 방 먹었군."

조지환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최기석은 떠났지만 아직도 맞은편에 그가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대화하는 내내 보여준 존재감 때문이다.

사실 최기석이 찾아왔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떤 문젯거리를 들고 와도 스스로 그를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스승의 그 제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감정과 도덕에 호소하다가 결국 제 성질에 못 이겨 폭발하는 그런 그림을 상상했다.

그런데 웬 걸?

최기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덤벼들었다.

초반에는 송명진처럼 정공법으로 나가다가 나중에는 장혁필처럼 변화구를 던졌다. 그것도 그의 가슴속 스트라이크 존에 꽉 차는 변화구를 말이다.

확실히 현 상황에서는 한민우를 내치는 게 현명하다.

"한민우를 브랜치로 내보냈을 때 생길 T.

O(Table of Organization)까지 계산했을 줄이야. 장혁필 밑에서 배운 건가?"

조지환은 식은 커피에 입을 대며 중얼거렸다.

오늘 보여준 최기석의 성장이 놀라웠다.

미련한 송명진의 제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앞으로 일을 진행할 때는 장혁필뿐 아니라 최기석까지 신경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둘 다 내 손바닥 안이지만."

조지환이 음흉하게 웃었다.

* * *

나흘 후 아침.

최기석은 아지트에서 집도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 연습 중인 수술은 삼첨판막 재건술.

삼첨판막이란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에 위치한 판막으로, 세 개의 옆으로 구성되어 삼첨판이라고 불린다.

끼기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판막륜을 꿰매기 시작했다.

'젠장.'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수술을 물론이요 수술 동영상까지 수도 없이 봤지만 실전은 역시 달랐다.

재건 중인 판막륜의 봉합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봉합이 균일하지 않았으며 어딘지 모르게 엉성한 부분도 있었다.

최기석은 이어서 전엽과 후엽, 중격엽을 손봤다.

낡은 조직은 메스로 떼어 내고 남은 건강한 조직들을 이어서 판막엽의 상태를 호전시켰다.

마지막으로 유두근에 붙어 있는 건삭의 높이를 유지시켜 판막이 우심실로 딸려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최기석은 스스로 재건한 삼첨판막을 보고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점수를 매기자면 100점 만점에 70점짜리 수술이다.

띠링!

[삼첨판막 수술 숙련도가 1 증가하였습니다. 삼첨판막의 숙련도가 다른 심장판막 수술 숙련도에 일부 영향을 미칩니다.]

[삼첨판막 재건술: 1.5/5]

마스터리의 숙련도가 올랐다는 것을 위로 삼아 뒷정리를 마쳤다.

"안녕하세요."

병동에 도착하자 이예림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조지환과 담판을 지은 후 그녀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작은 변화는 당연히 최기석을 기쁘게 했고 말이다.

"선생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럼 저쪽으로 갈까요?"

두 사람이 인적 드문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치프가 브랜치 가는 걸 알고서 해코지를 했다던가……."

"사실 그 반대예요."

이예림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 한 선생님이 저한테 와서 사과하더라고요.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하다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냐고요……."

"택도 없는 소리를."

최기석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한민우가 잘못 뉘우쳤다고 하면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는다.

"하도 사정해서 마음이 좀 약해졌어요. 최 선생님은 어떠세요?"

"이 선생님.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 인간이 선생님에게 한 짓을 떠올려 보세요."

터벅. 터벅.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때마침 한민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석아. 잠깐 나 좀 보자."

"전 볼일 없습니다."

"부탁이다. 제발 한 번만!"

한민우가 간절하게 빌었다.

최기석은 이예림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민우와 당직실에 자리를 잡았다.

대치하는 두 사람 사이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라."

갑자기 한민우가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조지환에게 브랜치 행을 미리 통보받은 모양이다.

"너한테도 이 선생님한테도 몹쓸 짓을 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 주라. 응?"

"본인이 잘못한 거, 알고는 있어요?"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한민우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 선생님 잘 설득해 주라. 이 선생님도 네 말이면 들을 거 아니야. 브랜치로 버려지고 소송까지 당하면 난 완전히 끝이야."

최기석은 한동안 무릎 꿇은 한민우를 내려다보았다.

"본인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세요?"

"암. 그렇다니까!"

"자존심 센 선배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럼 이번 일은 특별히 용서하겠습니다."

"정말? 고맙다, 기석아."

한민우가 울먹거렸고 최기석은 냉정하게 걸어 당직실 문 앞에 섰다.

"아…… 그사이 마음이 바뀌었어요. 역시 선배한테는 처벌이 어울리네요."

…….

"브랜치에서 잘 지내세요."

드르르륵.

최기석이 나가자 한민우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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