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세이버 (4)
최기석의 말에 이예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죠."
"······네."
두 사람은 흉부외과 병동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딸칵!
최기석이 문을 잠그면서 회의실은 밀실이 되었다.
"이 문제는 나나 이 선생님이나 다 아는 문제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이 선생님, 치프 때문에 힘드시죠?"
"······."
이예림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여기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한 선생님이 좀 심하긴 한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이 정도면 참을 만해요."
"이건 참느냐 참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치프는 이 선생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병실에서 한 행동은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정도였어요."
최기석이 언성을 높이자 이예림이 몸을 움츠렸다.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하지만 이건 치프, 아니 한민우를 향한 분노입니다."
"······."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알아 두세요. 이 선생님이 눈을 이런 식으로 눈감아 주면 그놈의 행패는 계속될 겁니다."
최기석은 할 말을 끝내고 이예림을 바라봤다.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그녀가 답답하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이예림은 병동에 갓 취직한 간호사다. 한민우의 희롱을 고발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병원은 내부고발자에게 엄격하기에.
최기석은 이예림이 대답을 궁리하는 동안 커피를 타서 그녀의 앞에 두었다.
"······."
"······."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괜히 쓸데없는 짓 하는 거 아닐까요?"
"절대 아닙니다. 이 선생님만 도와주면 제가 책임지고 그 새끼 보내 버릴 겁니다."
"흐흐흐흐흑. 나쁜 새끼."
이예림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최기석은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동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를 좀 더 일찍 챙겨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고마워요. 울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네요."
울음을 그친 이예림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제 이야기를 할게요."
"······."
"사실 예전에 있던 병원에서 선배한테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의사 하나가 선배한테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했죠. 선배는 참다못해 수간호사님에게 의사의 희롱 사실을 알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어떻게요?"
"걔 원래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참으라고 했대요.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의국에 들어갔는지 그 의사가 선배를 갈궈 대기 시작했어요. 결국 선배는 병원을 그만뒀죠."
"그래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셨군요."
"······네. 저 여기서 잘해 보고 싶거든요. 대학병원에 들어온 건 처음이고 가족들도 제가 의진대에 붙었다고 해서 좋아했어요."
이예림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전 이 선생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한민우를 혼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할까요?"
"지금부터 준비하면요."
최기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며 감정에 치우쳐서 바로 한민우에게 따지거나 윗사람에게 성희롱 사실을 알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치력이 오르면서 사람을 어떻게 삶아야 하는지, 어떻게 거래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선생님은 당분간 제가 부탁한 대로 해 주세요."
최기석은 이예림에게 지시사항을 알려 주었고 이예림은 그것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렇게만 하면 되나요?"
"네. 나머지는 저한테 맡기세요."
"감사해요. 최 선생님. 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예림이 뒷말을 흐렸다.
"중요한 건 이 선생님의 용기예요. 저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
최기석은 이예림에게 격려 스킬을 사용했다.
[격려를 받은 대상의 감정이 밝아집니다.]
[면역력, 질병저항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띠링!
[이예림과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이예림(의료인): 라포 2단계 - 믿음]
상태창을 살펴보니 자살 충동 목록이 사라졌다.
일단 큰 산은 하나 넘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한민우에게 정의에 죽창을 꽂는 것뿐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일어날까요?"
"네."
최기석은 이예림과 회의실에서 나왔다. 때마침 복도 반대편에서 민주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 야식이라도 드실래요?"
"말 한번 잘했다. 뱃속에 거지들이 난리야."
최기석은 이예림과 헤어진 후 민주혁과 당직실에 자리를 잡았다.
"요새 노우드 팀 연습하느라 피곤하시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흠흠. 몰래 심어 놓은 정보통이 있거든요."
최기석은 장난스럽게 거드름을 피웠다. 사실은 얼마 전 정설화에게 들은 거지만 말이다.
"짜식. 알면 어깨라도 주물러 봐. 힘들어 죽겠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한 채 힘을 적당히 조절해 민주혁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민주혁이 시원하다를 연발하며 마사지를 즐겼다.
"넌 못하는 게 뭐냐?"
"글쎄요."
"그건 그렇고 네가 응급실에서 받았던 신생아 환자 있잖아."
"네."
"우리 팀에서 수술하기로 했다. 순환기내과에 협진을 보냈는데 스텐트로는 힘들 것 같다더라."
"저도 그럴 것 같았어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는 이전 병원에서 받았던 팔로 4징증 수술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이를 복구할 수 있는 건 수술뿐이다.
"수술은 내일이다."
"내일이요?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요?"
"오전 회의 때 장 교수님이 태클 건 것 때문에 권 교수님 심사가 뒤틀렸어. 그래서 무조건 세이버 팀보다 예비 수술을 먼저 끝낼 거래. 덕분에 밑에 사람만 갈리고 있지."
민주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권 교수님은 다 좋은데 고지식하고 가끔 발끈하는 게 문제란 말이야. 이래서 장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선배라면 어디에서든 잘하시잖아요."
"그건 나도 인정."
민주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서지훈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최기석은 흉부외과 병동 앞 스태프 조직도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지훈 선배? 치프랑 동기인데 왜?"
"그냥 궁금해서요."
"이거 슬슬 구린 냄새가 나는데? 이번엔 무슨 꿍꿍이냐?"
"그게······ 이번 일에 엮인 건 저만이 아니라서요. 일 끝나고 나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편할 대로 해라."
민주혁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훈 선배는 한마디로 대박이지."
"대박이요?"
"의대 시절부터 인턴 때까지 천재 소리를 들었으니까. 조금 의외라면 흉부외과를 택한 거 정도?"
"음······ 그럼 서 선배는 중간에 흉부외과를 포기하고 나온 건가요?"
"맞아. 한 달 정도 일하다가 군의관으로 갔어."
민주혁이 고개를 으쓱거렸다.
"치프랑 동기고 군의관으로 갔으면 곧 제대하겠네요?"
"얼마 전에 연락했는데 이번 달 말일에 제대한다더라."
"제대 후에는 바로 병원으로 복귀하나요?"
"레지던트 모집기간이 아니라 힘들 걸?"
"우리 병원에는 다른 병원에 없는 특별모집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거면 가능하잖아요. 아직 두 달이 안 지났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건 조교수님급 이상에 추천이 있어야 돼."
"지훈 선생님이 온다고 하면 추천 안 할 사람이 있을까요? 안 그래도 사람 없어서 허덕이는 판국인데."
"이놈 보소?"
민주혁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나보고 서 선배를 꼬셔서 흉부외과로 데려오라는 거냐?"
"부탁드려요. 선배의 힘이 꼭 필요해요."
최기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지훈의 영입은 앞으로의 중요한 포석 중 하나다. 이것이 빗나간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뭐. 일단 말은 해 볼게."
"감사합니다."
"너, 나한테 하나 빚진 거야. 명심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전에 주문한 야식이 도착했다.
최기석은 민주혁과 야식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 * *
다음 날.
A 로젯 참관실.
조지환과 장혁필을 비롯한 몇몇 스태프들이 좌석에 앉았다.
잠시 후 노우드 팀의 수술이 진행된다.
심장 클리닉 리모델링 완공이 가까운 시점에서 처음 펼치는 팀 수술.
모두의 관심이 각별했다.
"오늘 수술, 장 교수가 보기에는 어때요?"
"권 교수라 해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환자가 워낙 어린 데다가 기존 수술의 후유증도 심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런데······."
조지환이 턱을 쓸어내리다가 말을 이었다.
"장 교수는 집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안전하게 살릴 수 있는 환자를 고르는 일입니다."
장혁필의 대답에 조지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를 못 믿는 건가?'
장혁필은 표정관리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조지환에게 밉보일 만한 일은 최대한 피해 왔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런 식으로 시험에 드는 질문을 한다는 게 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조지환의 왕좌를 뺏는 게 예상보다 험난하리라는 것을.
스태프들이 참관실에서 대기하는 사이, 환자와 노우드 팀이 일제히 로젯으로 들어왔다.
오늘 있을 수술은 폐동맥판막 수술과 우심실 비대 제거다.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장혁필은 집도의 자리에 선 권일수를 응시했다.
폐동맥판막에 문제가 있을 경우 두 가지 수술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기존의 망가진 판막을 재건해 주는 수술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판막이나 조직판막으로 대체하는 수술이다.
오늘 수술할 환자의 경우 인공판막 치환술을 써야 할 만큼 판막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가 알기로는 보호자가 강력하게 재건술을 원했다고 들었다.
재건술을 할 경우 수술 난이도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스태프는 잘 고른 것 같은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장혁필은 조지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늘 수술의 집도의는 권일수.
제1보조는 심장외과 전임강사 민병석.
제2보조는 펠로우 2년 차 우재원.
제3보조는 레지던트 3년 차 민주혁이다.
팀원들의 경험과 연식을 보면 세이버 팀을 압도한다.
문제는 실제 수술에서 팀워크가 어떻게 발휘되는지 여부겠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폐동맥판막 재건술을 시작한다."
권일수의 말에 마취의가 전신마취에 나섰다.
이후 정중흉골 절개로 심장이 노출되었고 인공심폐기가 움직였다.
드르르르륵.
심폐기가 돌아가면서 수술의 막이 올랐다.
장혁필은 팔짱을 낀 채 참관실 상단에 있는 2대의 대형 모니터를 응시했다.
하나의 모니터는 수술실의 전경을, 다른 하나는 수술하는 모습을 비췄다.
"메스."
은빛 칼날이 환자의 폐동맥을 갈랐다.
이윽고 만신창이가 된 폐동맥판막의 모습이 드러났다.
판막의 구조는 쉽게 문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문을 지지하는 틀을 판막륜, 문 자제를 판막엽이라고 한다.
수술 환자의 경우 문과 문을 지지하는 틀이 전부 망가졌다.
"5-0 vicryl(흡수성 봉합사)."
끼기기긱.
권일수는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봉합에 나섰다. 그리고 주변의 근육과 조직들을 모아서 문을 지지하는 틀인 판막륜을 재건해 나갔다.
그의 봉합법이나 매듭법은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
섬세한 손길에 판막륜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았다.
"역시 권 교수님이야."
"괜히 걱정했나 봐."
걱정을 가득 안고 수술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표정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심하기 무섭게 일이 터졌다.
심장 어디에선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재원 석션!"
"네!"
"병석이는 출혈 부위 찾아!"
지시를 내리는 권일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