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세이버 (3)
최기석은 권유대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제가 최 선생님을 뵙자고 한 건 어제 일 때문입니다."
"어제 일이요?"
"병원 밖에서 산모의 분만을 도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죠?"
"그걸 어떻게……."
"제가 의진대 전문 기자 아닙니까? 정보통에게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죠."
"그럼 제 기사를 쓰기 위해 오셨겠군요."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 일에 기사가 나가는 건 창피합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한 생명이 태어나는 걸 도운 게 큰 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입니까? 그리고 최 선생님이 모르는 게 있어요."
"……."
"꼭 엄청나고 큰 사건들만 기사로 나가는 건 아니에요. 때로는 기사가 나가기 때문에 대단해지는 일도 있죠."
"그런가요?"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흉부외과가 살아나려면 스타 의사가 필요합니다. 과거 의진대에 있었던 송명진 교수님이 좋은 모델이었지만 그분은 지나치게 강직해서 적이 많았어요."
"그거야……."
"송 교수님의 제자였던 최 선생님이 누구보다 잘 알겠죠."
박광수가 최기석의 말을 가로챘다.
지이이잉.
진동벨이 울리고 박광수가 카운터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박광수의 스승 지적에 최기석은 애꿎은 빨대만 빨았다. 스승의 정치적인 처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자인 그조차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저를 스타 의사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으신 거군요."
"물론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보다 장혁필 교수님이 기자님의 기대에 더 부응을 할 것 같은데요."
"아…… 장 교수요?"
박광수가 코웃음을 쳤다.
"장 교수님도 좋은 분이긴 한데 태생적인 한계가 있어요."
"태생적인 한계라…… 그런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들어 본 적이 없네요."
최기석은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박광수가 말하는 장혁필의 태생적인 한계는 대체 무엇일까.
의료 전문 기자는 분명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최 선생님은 의사로서 어떤 목표를 갖고 있죠?"
"실력 있는 의사가 돼서 그 어떤 병에 걸린 환자라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장혁필 교수는 의사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을까요?"
최기석은 박광수의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아는 장 교수님은 출세를 위해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목적인 최 선생님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지환 과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죠."
"아무리 그래도 과장님과 비교하는 건 너무 많이 나간 게 아닌가요?"
최기석이 반박에 나섰다.
두 사람 다 정치력이 높으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무협소설로 따지면 장혁필은 정파에, 조지환은 사파에 속한다.
"최 선생님은 조 과장님의 과거를 얼마나 알고 있죠?"
"과거는 잘……."
"그분도 한때는 환자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어요. 감투 맛을 보면서 성격이 변했을 뿐이지."
"지금의 저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데요?"
"그 사람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모습이 더 충격적일 겁니다."
박광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흠흠…… 이야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샜네요. 하여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장 교수를 100퍼센트 신뢰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저조차도 말이에요."
"……."
"항상 유연하게 행동하세요. 이슈의 중심에 서되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받지 마세요. 그것만 잘 해낼 수 있다면 최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흉부외과 명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최 선생이 바로 서게 된다면 무너져 가는 흉부외과도 다시 회생할 기회를 얻을 거예요."
박광수의 말투에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최기석은 그가 흉부외과 관련해서 무언가 상처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또 흥분을…… 그럼 이제 인터뷰를 해볼까요?"
박광수가 차분하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해 봤던 일, 최기석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잠시 후 인터뷰가 끝나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이번 달 말에 의료 특집 기사가 나갈 예정인데 거기서 꼭 중요하게 소개할게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박광수를 악수를 나눈 후 병동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100퍼센트는 믿지 말라던 그의 조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병동에 도착하자 스테이션 앞에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그가 진짜로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 말이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최기석은 동생 최준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병원에서 최준기를 보는 건 인턴 때 이후로 처음이다. 못 본 사이 동생은 더욱 늠름해졌다.
"나야 잘 지내지. 형은?"
"난 죽겠다. 요새 너무 바빠."
최기석이 앓는 소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양식 자격증 땄다며? 축하한다."
"준비만 잘하면 다 붙는 건데. 뭐."
최준기가 한 손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사고가 당한 후 최기석은 이상하게 자신에게 잘해 줬다. 줄곧 무시하던 요리사의 꿈을 인정해 주었으며 가끔씩 전화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덕분에 어려운 과정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나 내일부터 레스토랑에서 일해. TV에 나오는 유명한 셰프 밑에서."
"축하한다. 내가 뭐랬어. 할 수 있다고 했지?"
"고마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조금만 있으면 너도 TV에 나오는 거 아니야?"
"너무 비행기 태운다. 난 아직 멀었어. 그건 그렇고 점심시간인데 밥 먹어야지."
최준기가 한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6단짜리 도시락통과 보온병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네가 해 준 요리 먹어 보겠네."
"먹고 까무러치면 안 된다?"
"어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데. 근데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같이 먹고 가."
"레스토랑에 가 봐야 돼. 오늘부터 접시나 재료 위치 같은 거 외워 두려고."
"알았다. 잘 먹을게."
최기석은 최준기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한 병실로 향했다.
드르르륵.
"의사 선생님. 안녕."
마이클이 최기석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배고프죠?"
"쬐큼요. 근데 점심 반찬 너무 쿠려요. 맛없어서 라면 먹고 싶어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어요. 오늘 점심은 나랑 같이 먹죠."
최기석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봉투를 흔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환자 전용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급식차 올 때가 가까워서인지 휴게실이 텅 비었다.
"우와. 얘가 미쳤나?"
최기석은 반찬통을 열어보고 경악했다.
음식 수준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반찬통 세 개에는 한식이 담겼으며, 나머지 세 개에는 양식이 담겼다.
그것도 코스를 생각했는지 통마다 반찬이 다 달랐다.
"의사 선생님. 대박!"
마이클이 반찬을 훑더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친동생이요."
"혹시 동생, 요리사? 너무 훌륭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일단 먹죠."
최기석은 젓가락을 들고 식사에 나섰다. 제일 먼저 눈이 갔던 떡갈비를 베어 문 순간 몸을 들썩거렸다.
맛있다.
고기와 함께 씹히는 떡의 식감이 좋았고 달콤새콤한 간장 양념이 입안을 즐겁게 만들었다.
"파스타 맛있어요."
마이클이 파스타를 맛본 후 엄지를 척 내밀었다.
두 사람은 대화도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대식가 두 명이 만난 만큼 도시락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아 참. 바보 같이."
최기석은 한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고 보온병을 꺼냈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종이컵에 따라서 마이클에게 내밀었다. 순간 마이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이…… 이건?"
"마이클이 먹고 싶다고 했던 김치찌개요."
"선생님!"
갑자기 마이클의 언성이 올라갔다.
"김치찌개 일찍 줘야 해요. 이거 제일 먹고 싶었는데."
"하하하…… 그게 내 먹을 것만 신경 쓰다 보니까. 빨리 먹어 봐요."
"잘 먹겠습니다."
마이클이 국물을 들이켰고 최기석은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우스꽝스럽지만 이게 바로 스페셜 미션, 오 나의 김치찌개가 아닌가.
마이클의 한마디에 미션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어때요?"
"일단 선생님도 먹어 봐요."
마이클의 제안에 최기석은 김치찌개 국물을 마셨다.
돼지고기와 잘 익은 김치를 넣은 칼칼한 김치찌개, 색다를 것은 없지만 가장 이상적인 맛이다.
"맛있는데요?"
"아니에요."
최기석의 말에 마이클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대로 미션 실패?
"이 김치찌개 맛있는 거 아니고 엄청 맛있어요."
마이클이 반찬 통에 있는 밥과 김치찌개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띠링!
[특별 임무, '오 나의 김치찌개'를 완수하셨습니다. 유니크 젬 1개를 보상으로 드립니다.]
NEW [유니크: 외국어 회화능력 2배 상승.]
최기석은 보상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메이죠를 위한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김태식과 당직실에 있었다. 막 응급 수술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여기는 참 이상해."
"어떤 면에서요?"
"진성대 흉부외과보다 인지도는 떨어지면서 이상하게 응급환자는 많단 말이지. 이유가 뭘까?"
"그…… 글쎄요."
"아무래도 스태프 중 환타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지."
김태식이 최기석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최기석은 모른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 갑자기 내 눈을 피해?"
"이제 연습하려고요."
최기석은 쌈지와 곰 인형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
"그나저나 한민우, 걔는 왜 그러냐?"
김태식이 얼굴을 찌푸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한민우가 횡격막에 메스를 대던 모습이 선명했다.
치프라는 인간이 레지 1, 2년 차도 하지 않을 실수를 했으니 말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래요. 제가 듣기로는 흉부외과에 지원한 이유가 학교 성적이랑 인턴 성적이 안 나와서인 걸로 알고 있고요."
"조만간 사람 잡는 의사 되겠네."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이럴 때마다 흉부외과가 비인기 과라는 게 아쉽다. 인원이 모자라서 울며겨자먹기로 폐급을 써야 하잖아."
김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만 간다. 당직 잘 서고."
"네. 들어가세요."
최기석은 김태식을 보낸 후 봉합 연습에 열을 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심을 배터지게 먹었음에도 허기가 몰려왔다.
그런데 당직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중 한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예림이 환자의 수액 드롭양을 조절하고 있었다.
문제는 한민우가 그녀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허리를 흔들어 댄다는 점이다.
드르르륵.
최기석은 일부러 소리가 크게 나도록 문을 열었다. 이에 한민우가 깜짝 놀라서 이예림과 거리를 두었다.
"너…… 너 뭐야?"
"제 환자를 보러왔을 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1년 차 주제에 설치기는."
한민우가 어깨로 최기석의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으며 처치를 마친 이예림도 시뻘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주의! 이 환자는 자살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예림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뜻밖의 정보가 떠올랐다.
최기석은 서둘러 병실을 나와 이예림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복도에는 있는 사람은 둘뿐이다.
"이 선생님!"
"네?"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저…… 저는 할 말 없어요."
이예림이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기석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터프한 행동에 이예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요. 한민우 그 인간, 엿 먹이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