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6)
"먹고 싶은 거 없어? 첫 집도도 무사히 끝냈으니까 내가 쏠게."
"으음…… 순대국?"
"겨우 순대국? 다른 건 없어?"
"딱히 없는데……."
최기석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병원 밖에 나와서 먹는 음식으로는 순대국이 최고다.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면 속과 마음까지 개운해진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야지. 가자."
정설화가 밝게 말했다.
두 사람이 다시 다정하게 거리를 걸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쳐 지나가는 커플이 부럽지 않았다.
이윽고 식당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장 교수님이 있는 세이버 팀에 들어갔다고 했잖아. 요즘 팀 분위기는 어때?"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아. 성격이 모난 사람도 없고 다들 실력도 좋으니까. 장 교수님을 중심으로 잘 뭉쳐 있는 느낌이랄까."
"다행이다."
정설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닉 오픈 전부터 싸우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아무래도 세이버 팀이 실패하면 네가 찍힐 것 같아서."
"조 과장님 때문에?"
"응."
조지환의 악명은 이미 다른 과에 퍼졌다.
"장 교수님이 호락호락 당할 사람은 아니잖아. 믿어야지. 그리고……."
최기석이 뒷말을 흐렸다.
송명진의 부름을 받으면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에.
"그리고?"
"별거 아니야."
"바보. 노우드 팀은 어떤지 알아봤어?"
"그쪽도 팀원은 다 꾸렸어. 수술 환자 찾는 중일 걸?"
"그건 반쪽짜리 정답이야."
정설화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반쪽짜리 정답?"
"우리 순환기내과 층에 구 세미나실 있는 거 알지? 저번에 보니까 거기 모여서 뭔가 연습하고 있더라. 넋 놓고 있으면 추월당할지 몰라."
"벌써 연습이구나."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연습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 민주혁과 일부 스태프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노우드 팀이 따로 모여서 연습한다고 하면 아귀가 딱딱 맞는다. 권일수가 노우드 팀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 교수님한테 말씀드려야겠다. 정보 고마워."
"이 정도야 뭐."
정설화가 볼을 붉혔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됐다.
최기석은 순대국을 허겁지겁 비우고 정설화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걸까.
순대국을 먹는 모습조차 예쁘고 사랑스러워보였다.
"나 배불러."
정설화가 순대국의 삼분의 일을 남겼고 최기석은 그녀가 남긴 것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혹시 태호랑 싸우고 우리 집에서 잤던 날, 기억해?"
"당연하지."
"그때도 내가 남긴 음식을 네가 먹어 줬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던 거 알아?"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 그때도, 지금도."
최기석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얀 거짓말을 했다.
정치력이 올라간 지금은 알았다.
사실 식탐 때문에 남긴 음식을 먹었다고 털어놓는 건 바보짓이라고.
최기석의 대답에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꼬았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 밖을 나왔다.
정설화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고 최기석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까 크룩스 바꿀 때 됐네?"
"하긴 우리 이거 인턴 때부터 썼지."
두 사람의 시선이 크룩스에 향했다.
대전 병원에서 선물로 받은 크룩스는 올해로 한 살이 되었는데 빨래를 자주했음에도 볼품이 없었다.
"여기서 5분 정도 걸으면 애플 박스 있잖아. 거기서 하나 사자."
"그래도 버리기는 왠지 아쉬워."
"우리 둘이 앞으로 함께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괜찮아."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지인 애플 박스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일이 터졌다.
"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임산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곁에서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여…… 여보. 갑자기 왜 그래."
"배가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아아아악!"
다시 한 번 터지는 비명.
최기석과 정설화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임산부에게 달려갔다.
체력: 3/10
주 증상: 복통 / 호흡곤란 / 저혈압
아픈 부위: 자궁
진단명: 조기분만
현재 상태: 응급(near birth)
경과: 보통
과거력: 없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정보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near birth라면 산모를 옮기는 도중 아이가 나올지 모른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안정된 공간에서 출산을 돕는 편이 좋다.
[살려야 한다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각성 산과처치 버프가 활성화하였습니다.]
- 산모 심리를 안정시키는 평안 효과가 주어집니다.
- 정상 출산 확률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가 지속 중입니다.]
"산모 진통이 시작됐어요. 의진대병원에서 재환로 방향으로 가는 쪽 애플 박스 앞이요."
최기석이 능력을 사용하는 사이 정설화가 119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분은 저와 같이 이쪽으로."
최기석은 인적이 드문 골목 바닥에 의사 가운을 깔았다. 그리고 산모의 남편과 산모를 부축해서 가운 위에 눕혔다.
각성 산과처치 버프 덕분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산모분. 저는 의진대 흉부외과 최기석이라고 합니다. 진통 때문에 힘드신 건 알지만 지금부터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최기석은 산모의 무릎을 굽히고 넓적다리를 벌렸다.
터진 양수로 다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회음부에서 아이의 머리가 보였다.
"진통이 올 때마다 아랫배에 힘을 꽉 주세요."
"아흐흐흑. 너무 아파요."
"여보. 힘내."
곁에 있던 남편이 산모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아아악!"
"좀 더 힘! 더!"
최기석은 차분하게 산모의 분만을 유도했다. 산모가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아이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머리만 삐죽 나오고 어깨 부분이 좀처럼 빠지지를 않았다.
"선생님. 이러면 억지로라도 당겨야하는 거 아닙니까?"
남편이 초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하면 산모와 아이가 같이 다칩니다. 일단은 지켜봐야 해요."
대답하는 사이, 아이의 얼굴이 회음부를 거의 다 빠져나왔다.
최기석은 아이의 얼굴에 덮여 있는 양막을 재빨리 제거해 주었다.
잘못하면 아이가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거의 다 왔습니다!"
"아아아악!"
이어지는 산모의 날카로운 비명.
최기석은 아이의 머리를 받쳐 주면서 어깨가 빠져나오는 것을 도왔다.
쑤우우우욱.
산모의 복부가 꿈틀거리면서 아이가 빠져나왔다.
최기석은 아이를 안전하게 받아 냈다.
탯줄이 아이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탯줄과 아이의 목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휘저어 탯줄을 풀었다.
"응애! 응애! 응애!"
귀를 때리는 아이의 울음이 너무나 반가웠다.
최기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기석아. 여기."
정설화가 거친 숨을 쉬며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약국에 뛰어갔다 온 모양인지 봉투에 각종 처치 도구들이 담겼다.
"고생했어."
최기석은 봉투 속에 가위를 꺼내서 산모의 남편에게 내밀었다.
"탯줄은 직접 자르시겠습니까?"
"……네."
싹둑.
산모의 남편이 탯줄을 자르면서 분만은 성공적으로 끝난 듯 보였다.
"여보. 고생했…… 선생님! 아내가 이상해요!"
산모 남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한 번 산모를 살피니 산모가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출산 후 경련이다.
최기석은 가지고 있던 펜을 산모의 입에 물렸다.
혀 깨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사이 정설화는 환자를 왼쪽으로 눕게 하고 기도를 확보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구급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조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아이는 무사한 것 같은데 산모에게 경련이 일어났어요."
"알겠습니다. 의진대병원으로 후송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환자와 구급차를 타고 함께 의진대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출산 후 벌어진 일시적인 경련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이 푹 쉬면 나아질 겁니다. 출산한 아이는 검사를 몇 가지 해 볼 거고 산모분은 병동에 입원시키겠습니다."
응급실에 내려온 산부인과 당직의가 말했다.
다행히 산모도 아이도 무사한 상황, 최기석과 정설화를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산모의 남편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남편분이 침착하셨고 산모분이 진통을 잘 이겨 주셨죠.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와 헤어져 다시 아지트로 향했다.
"우리 기석이 환타답네. 잠깐 나온 사이에 환자를 다 받고."
정설화가 피식 웃었다.
최기석은 변명할 거리가 없어서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정설화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자기 그녀의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
"나랑 결혼할 거야?"
정설화의 당돌한 질문에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중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봐."
"아니. 그냥. 방금 전 처치했던 부부가 보기 좋아서……."
"우리 결혼하면 2세는 어떻게 하고 싶어?"
"벌써 거기까지?"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아들만 두 명 있었으면 좋겠어."
"왜?"
"딸이 있으면 네가 딸 바보 될까 봐. 너는?"
"나는 남자아이 하나, 딸아이 하나."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정설화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상상만 해도 좋다."
"나도."
두 사람의 시선이 달콤하게 부딪쳤다.
함께 처치를 하고 직후라서 다른 때보다 서로에게 끈끈한 애정을 느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호흡은 거칠어졌으며 사랑의 열기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스킨십이 강렬해지면서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꿀꺽.
최기석은 속옷 차림의 정설화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키스하며 은밀한 곳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정설화가 다급하게 말했다.
"기…… 기석아."
"응? 왜?"
"말을 못 했는데…… 내가 오늘은 위험한 날이라서…… 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
정설화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솟구쳤던 본능을 억눌렀다.
잠깐의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함께 아지트를 나왔다.
최기석은 정설화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근처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걷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영호나 보러 가야겠다."
발걸음을 돌려 편의점에서 간식을 산 후 응급실로 향했다.
그런데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이영호가 응급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람 쐬러 나왔어?"
"아, 선배. 오셨어요. 바람 쐬러 나온 건 아니고 환자가 온다는 전화를 받아서요."
이영호가 최기석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흉부외과 환자인 것 같던데……."
"나 밖에 나갔다가 산모랑 돌아온 거 봤지? 조금만 더 쉬게 해 주면 안 되냐?"
"저도 그러고 싶지만 상황이……."
"농담이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최기석은 웃으며 이영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잉.
잡담을 나누는 사이 구급차가 응급실에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환자가 실린 스트레쳐카를 바닥에 내렸다.
환자는 3,4개월쯤으로 보이는 신생아.
청색증을 앓는지 피부가 시퍼렇게 질렸다.
'쉽지 않겠어.'
최기석은 목을 꺾으며 스킬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