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5)
"동기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걔가 인턴 사고팔기 했대요."
"확실해?"
"거의 80퍼센트쯤이요."
이영호의 대답에 최기석은 혀를 찼다.
인턴은 매달 진료 과를 바꿔서 수련한다.
그런데 인턴 수련 기간 중 기피 과를 가기 싫어서 동기에게 돈을 주고 해당 과를 넘기는 것을 인턴 사고팔기라고 부른다.
금액은 보통 한 과당 200만원에서 300만원 사이.
기피 과는 당연히 외과계열이다.
기피 과의 톱은 정형외과인데 그중에서도 수술 보조를 하게 되면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다. 뼈를 맞추는 작업이기에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상중이가 돈 받고 대신 흉부외과로 넘어왔다는 소리네?"
"그렇죠."
"뭐. 우리 때라고 사고팔기가 없었던 아니지만…… 직접 당하니까 씁쓸하네."
"외과가 그렇죠. 뭐."
"그나저나 흉부외과 픽스턴 할 생각 없니?"
최기석이 이영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다음 달에 신경외과 가고 그 다음 달에 대장관외과 가거든요. 딱 여기 두 군데만 가 보고 결정할 게요."
"꼭 경험해야 아는 건 아니잖아. 흉부외과 오면 내가 잘해 줄게. 술기나 처치도 팍팍 가르쳐 주고."
"선배가 이렇게 유혹하니까 이거 참……."
이영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최기석은 그가 아부성 멘트가 아니라 진심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멘토 관계라서 그런 듯했다.
"잘 생각해 봐. 이런 기회 또 없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결정할게요."
"그래. 수고하고."
이영호와 대화를 마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드르르륵.
"의사 선생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이클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일명 아메리칸 제스처. 동작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몸은 어때요?"
"전하고 똑같아…… 요. 나쁘지 않아요."
마이클의 더듬더듬 한국말을 했다.
"하루 종일 병실에 있으려니까 심심하죠?"
"쬐금? 그래도 저거 재미있어요. 시간 잘 가."
마이클이 검지로 TV를 가리켰다.
세계 각지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토크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다.
"저도 저거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맞아요. 근데 저기 나오는 미쿡 놈은 이상해. 나보다 한국말 더 못하는 것 같아요."
"진짜네. 저래서 토크가 되나?"
최기석은 마이크와 방송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미국 대표의 상태가 메롱이다. 언어 능력이 아니라 외모로 뽑은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저기 나가고 싶어요. 잘할 수 있는데."
"혹시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수술 잘 받고 몸조리 잘해야 돼요. 알았죠?"
"몸조리? 몸 조여?"
"아…… 몸 조리는 take care라는 뜻이에요."
"하나 배웠네. 고마워요."
마이크가 침상 머리맡에 있는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입원 후부터 한국어를 알뜰살뜰하게 공부하는 마이크다.
"낮에 심심하면 다른 환자들하고 이야기해 봐요."
"미쿡 놈이라 싫어할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마이클이 심심하다는 건 다른 환자들도 심심하다는 거잖아요. 먼저 말을 걸면 의외로 좋아할지 몰라요."
"의사 선생님. 그렇게 말하면 해 볼게요."
"음식은 입에 맞아요?"
"나 매운 거 완전 잘 먹어요. 그래서 한국음식도 좋아해요. 근데 병원 밥 맛없어요."
"혹시 무슨 음식 제일 좋아해요?"
"김치찌개. 얼큰하고 맛있어. 그런데 병원 김치찌개는 맛없고 나가서 사먹기는 힘들어요."
마이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특별 임무, '오 나의 김치찌개'가 생성되었습니다.]
[마이클이 감탄할 만한 김치찌개를 제공하세요. 성공할 경우 특수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래. 이 맛이야(0/1)]
미션을 확인한 최기석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세상에 미션의 범위가 이렇게까지 넓을 줄이야.
하지만 미션이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본질적인 내용은 환자의 욕구를 풀어 주고 라포를 쌓는 일이다.
즉 의사로써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최기석은 마이클과 대화를 마친 후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어. 나야. 별일 없지?"
[…….]
"내가 먼저 전화해야 목소리 듣냐? 넌 나한테 전화 안 해?"
[…….]
"알았어. 인마. 저번에 와서 한 말도 있으니까 이번 주 중으로 병원에 와. 김치찌개랑 다른 한식도 조금 준비해서. 하여간 그런 게 있어."
최기석은 상대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고서 통화를 끊었다.
나머지 병실을 돌며 환자를 살피던 중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김세찬 환자에게 고정되었다.
나이는 32세.
지방 브랜치에서 전원왔으며 심부전증으로 심장이식 대기 중이다. 세이버 팀의 첫 공식 수술환자기이에 특별 관리를 받는 중이다.
'힘내세요.'
최기석은 조심스럽게 병실로 들어가서 자고 있는 김세찬과 보호자에게 격려를 걸었다.
그 역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 심장이식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한 능력으로 심장이식이라는 패널티를 잘 극복하고 있었다.
다만 김세찬은 그처럼 정상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평생 면역억제제를 먹으며 몸 관리에 신경 써야 하리라.
최기석은 환자를 내려다보다가 당직실로 향했다.
우선 영어공부를 두 시간 정도 한 후 곰 인형을 손에 쥐었다.
딸칵!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봉합 연습에 들어갔다.
봉합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되었다.
[망가진 봉제 인형(7/150)]
나름 속도를 냈지만 임무 완수의 길은 험난했다.
최기석은 믹스 커피를 마시며 잠깐 여유를 즐겼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고 하자 강상중이 쭈뼛거리며 나타났다.
"낮에 말씀하신 흉관 배액 자료 조사 끝냈습니다."
"자료는?"
"직접 뽑아왔습니다."
최기석은 강상중이 내민 자료를 쭉 훑고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이건 1500원짜리네. 그치?"
"네? 무슨 말씀인지……."
"슈퍼 캠퍼스에 있는 거 그대로 다운 받았잖아. 제목부터 내용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린데?"
최기석의 지적에 강상중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괜찮아.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정말이세요?"
"사실 슈퍼 캠퍼스에 있는 자료 내용이 나쁜 건 아니거든. 중요한 건 네가 이걸 얼마나 소화했느냐지. 내용만 숙지했으면 자료 조사도 필요 없어."
"……."
"근데 내 생각에는 자료 조사를 이따위로 한 네가 CTD 공부를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최기석은 차근차근 강상중을 압박했다.
아랫사람 갈구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강상중은 가만둘 수 없었다.
처치 태도는 물론이요 지식을 배우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다른 인턴에게 돈을 받고 흉부외과에 왔다는 사실 또한 그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문제 한번 내볼까? 네 수준을 생각해서 특별히 OX 퀴즈로 내줄게."
"……네."
"배액량이 시간당 80ml일 때는 환자를 특별 관리해야 한다. OX?"
"X입니다."
"X 확실해? 틀렸으면 어쩔 건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O 같습니다."
"땡! 틀렸어. 정답은 X야. 배액량의 이상 징후는 시간당 100ml 이상이다."
"하아……."
강상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낚시에 당한 게 분한 모양이다.
"너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인턴한테 OX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개그인 거 몰라? 그리고 뭐 하나라도 알려면 똑바로 알아 둬. 사람 잡는 건 선무당만이 아니야."
최기석은 OX 퀴즈 연달아 다섯 개를 냈고 강상중은 고작 한 문제를 맞췄다.
"상중아."
"네. 선생님."
"이름은 상중인데 실력은 최하잖아. 제발 이름값 좀 하자. 응?"
"주……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매일 숙제 내줄 테니까 일과 끝나면 검사 맡아. 알았지?"
"네."
"그만 가 봐."
최기석의 손짓에 강상중이 당직실을 떠났다.
띠링!
[숨겨진 임무, '무서운 사람'을 완수하셨습니다.]
[카리스마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플레이어는 강상중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플레이어가 지시할 경우 강상중의 행동력이 2배로 증가합니다.]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에 그의 미소를 더욱 짙어졌다.
응급실 전화가 아니라 정설화의 전화다.
[자기야. 보고 싶어.]
"나도. 아지트에서 볼까?"
[난 벌써 와 있어.]
"금방 갈게."
통화를 끊고 아지트를 찾았다.
정설화는 라디오를 작게 틀어놓은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 와."
정설화가 소파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고 최기석은 정설화의 곁에 앉아서 그녀가 내미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타는 솜씨가 갈수록 느네. 이러다가 의사가 아니라 바리스타 하겠어."
"나중에 카페라도 차려 볼까?"
정설화가 최기석에게 몸을 기댔다.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정설화를 응시했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힘들지만 이렇게 정설화와 있으면 모든 것을 씻어버릴 수 있었다.
새삼 그녀의 존재에 감사했다.
"오늘은 하루는 어땠어?"
"왕 피곤했어."
정설화가 힘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PCI 끝나니까 동기들이랑 선배들이 좀 변한 것 같아. 은근히 날 견제하더라."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설화가 워낙 실력 있잖아. 레지 1년 차에 PCI를 끝내고 김철우 교수님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고 있으니까."
최기석은 한 손으로 정설화의 단발머리를 쓸어 주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대접하고 키워 줘야지. 왜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내 말이 그 말이야."
"요새는 괴롭히는 사람 없지?"
"응."
정설화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나 머리 계속 쓸어 줘. 기분 좋아."
"우쭈쭈. 우리 설화 기분 좋았어요?"
"네. 좋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기석은 어제 CABG 수술 했던 것을 정설화에게 알려 주었다. 세이버 팀과 윤지혜는 그의 집도를 사전에 알았으니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집도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진짜! 대박이다."
정설화는 자기 일처럼 집도를 축하해 주었다.
더불어 격렬하게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꾸르르르륵.
갑자기 아지트에 울리는 배곯는 소리, 근원지는 바로 최기석의 배다.
"저녁 못 먹었어?"
"할 일이 많아서 깜빡 잊고 있었네."
"그럼 나가서 먹고 오자. 첫 집도 한 것도 알았는데 편의점 음식 같은 걸로 때우게 할 수 없어."
"응급실 콜 올지도 모르는데?"
"가까운 데서 먹으면 되잖아. 전화 오면 그때 응급실 가도 되고. 빨리 가자~"
정설화가 최기석의 팔을 끌었다.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정설화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100일 당직 이후 두 번째 외출.
반짝이는 간판들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가 만약 의사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최기석은 막 스쳐 간 커플을 돌아보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게 만났겠지?"
"그랬겠지. 사실 나는 여유가 있을 때 그런 상상 많이 해. 우리 둘이 의사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정설화가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일 끝나면 만나서 같이 저녁 먹고 이야기 하고. 주말에는 좋은 데로 여행가고. 그런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거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최기석은 웃으며 한쪽 팔을 쭉 내밀었다.
"갑자기 왜 그래?"
"너 팔짱 끼라고."
"병원 근처잖아. 지나가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레지던트 되고 둘이 밖에 나온 건 처음이잖아. 잠깐이라도 보통 커플 흉내 내보자. 까짓 거 누가 보면 어때?"
"역시 내 남자. 멋있어."
정설화가 최기석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