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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08화 (107/407)

준비 (4)

찰칵!

최기석은 탁자에 놓인 가위로 봉합사를 잘랐다.

"이제 끝났네."

"대단하다, 대단해."

윤지혜는 그제야 최기석의 눈을 가렸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회의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CABG 성공했다며? 축하해."

"장 교수님이 이야기하셨어요?"

최기석의 질문에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던트 1년 차에 CABG라니. 집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것도, 집도에 성공했다는 것도 기적 같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런데 교수님, 환자를 본의 아니게 가로챈 것 같아서 그런데……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같은 과라고 해도 각자마다 맡은 파트가 있다.

누구는 심장판막 수술을 중심으로 하고, 누구는 대동맥 수술을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다른 파트의 환자를 건드리는 일은 금기시되어 있었다.

이걸 어기면 싸움이 벌어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인턴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윤지혜는 노트북으로 학회자료를 살피기 시작했고 최기석은 회의실을 나와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치프. 뭐하세요?"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민우가 이예림의 등 뒤에 서서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문제는 이예림이 한민우의 접촉을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E.

M.

R(전자의무기록)을 잘 못 다루길래 가르쳐 주고 있는 건데. 그렇죠? 이 선생님?"

"……아. 네."

"가르쳐 주는 건 좋은데 꼭 그렇게 이 선생님의 등 뒤에서 손을 포개야 합니까?"

"네가 왜 참견인데?"

한민우가 허리를 펴고 최기석을 노려봤다.

"이 선생님이 불편해하는 거 안 보이세요?"

"원래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라고. 레지 1년 차 주제에 알면 뭘 안다고 건방지게 까불어!"

한민우의 언성이 올라가면서 스테이션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무슨 일이야?"

폐식도 전문의 박용일이 나타났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닌데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

"그…… 그게…… 죄송합니다."

한민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박용일은 한민우와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스테이션을 지나쳤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한민우가 빠드득 이를 갈며 자리를 벗어났고 최기석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중지를 치켜들었다.

이에 몇몇 간호사들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나요?"

"요즘 들어 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신입이고 모르는 걸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물리치기도 힘들고."

이예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최기석은 이예림의 이야기를 듣다가 시간에 맞춰 회의실로 향했다.

입원환자 브리핑, 수술환자 브리핑, 케이스 발표 등이 별 탈 없이 끝났다. 하지만 회의가 끝났음에도 조지환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톡. 톡. 톡.

그의 검지가 테이블을 건드렸다.

순간 스태프들이 바짝 긴장했다.

조지환이 말없이 테이블을 두드린다는 것.

그것은 의국 내 중대한 결정사항이 있거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오늘은 몇 가지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조지환이 커피를 마시고서 말을 이었다.

"첫째는 이번 달 말 일에 우리 병원에서 폐암 심포지엄을 열기로 했다는 거예요."

심포지엄이란 하나 이상의 논제를 가지고 강사가 전문적인 발표를 한 후 청중들이 질문하여 논제를 발전시키는 스타일의 회의다.

"손님들이야 내가 책임지고 데려올 건데……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죠?"

"……."

"이번 심포지엄은 박 교수랑 윤 교수가 신경 써 줘요."

"네."

"알겠습니다."

박용일과 윤지혜가 동시에 대답했다.

"기왕이면 해외 실례(實例)랑 우리 병원에서 실시한 처치를 엮었으면 좋겠어요.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자료 준비해서 나한테 넘겨요."

'또 우리가 죽어나겠구나.'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교수들이 자료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레지들이 갈려 나간다는 뜻이다.

"참고로 나는 아침 회진 끝나면 병원에 안 돌아오니까 급한 일 있으면 따로 연락해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혜성대 병원장님 모친상도 가야 하고 금융감독위원회에도 가야 해요."

"금감원엔 무슨 일로 가시는지……."

"하지정맥류, 항의 방문이에요."

조지환이 대답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수술 수가를 올리기에 정신 차렸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현재 하지정맥류 수술은 흉부외과에서 한다.

처치 부위는 다리지만 혈관과 관련 있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만간 민간보험에서 하지정맥류 수술을 미용 목적으로 보고 이를 보장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이다.

민간보험의 보장목록에서 하지정맥류가 빠진다면 당연히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준다.

그 타격은 고스란히 흉부외과가 받게 되고 말이다.

"이야기는 이쯤하고 회진이나 돕시다."

조지환이 일어나면서 회의가 끝났다.

* * *

그날 오후.

느지막하게 들어간 수술 스크럽을 끝으로 일과가 종료됐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최 쌤이 쏘시는 거죠?"

"후후. 내가 쏘시지."

최기석의 아재개그에 강하나가 꺄르르 웃었다.

"최 쌤을 강하게 키운 보람이 있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요. 이 정도는 해 줘야죠."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강 쌤이 괜히 일당백이 아니었네요."

최기석은 방금 전 끝난 수술을 돌이켜보았다.

강하나는 수술 과정을 전부 꿰뚫어 보며 집도의에게 신속하게 수술 도구를 건넸다.

그뿐이 아니다.

수술 도구 중에서도 미묘하게 역할이 다른 것들이 있다.

그런데 강하나는 그중에서도 상황에 최적화된 도구를 건넸다.

"제 실력을 알아볼 정도면 최 쌤도 대단한 거예요. 소독간호사라고 하면 수술 도구만 건네준다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수술실에 돌아온 소감은 어때요?"

"생각보다 할 만하네요."

강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 입장에서는 병동 일이 더 편하기는 한데…… 수술실의 긴장감도 나쁘지 않네요. 뭔가 진짜 일을 하는 느낌이랄까?"

"제가 그럴 줄 알고 강 쌤을 스카우트했잖아요."

"스카우트요? 제 전투력은 얼마나 되는데요?"

강하나가 드래건볼에 나오는 전투력 측정기로 말장난을 쳤다.

"한 1200 정도?"

"칫. 실망이에요. 라데츠 수준이라니……."

"그런 그렇고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치프요, 원래 병동간호사들한테 자주 집적거려요?"

"그 인간 또 발정 났어요?"

강하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강 쌤 대타로 들어온 간호사 중 한 명한테 수작을 걸어서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 심하게 치근덕거리는 편이죠."

"픽스턴 할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갑자기 사람이 바뀐 건가?"

"그건 아니고. 아마 제가 없어서 그럴 거예요."

강하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 그 인간이 같이 근무하는 후배한테 껄떡대서 제가 뭐라고 쏘아붙였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자제를 했었는데……."

"강 쌤이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거구나."

"그런 셈이죠. 그런 인간은 언제 한 번 혼구멍이 나 봐야 되는데."

"같은 생각이에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각종 인간 군상이 모인만큼 가지각색의 일이 벌어나곤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희롱이다.

"슬슬 올라가 봐야겠네요."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 커피는 내가 쏘시지."

"꼭 쏘시지."

쏘시지 개그를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병동으로 올라갔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피다가 한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병동 인턴 강상중이 환자에게 흉관 드레싱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드레싱을 지켜보는 최기석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상중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안녕하세요."

"……."

최기석은 대답 없이 환자의 배액병과 배액량을 체크하고 이어서 드레싱한 자리까지 살폈다.

그러자 곁에 있는 강상중이 초조한 듯 이를 딱딱 부딪쳤다.

바로 그 순간이다.

툭!

강상중이 배액병을 발로 건드리면서 배액병이 쓰러졌다.

순간 강상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반면 최기석은 재빠르게 배액병을 세우고 환자가 호흡을 깊이 하도록 유도했다. 튜브가 붕 뜨면서 공기가 늑막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빠른 처치로 환자는 무사했다.

"휴게실에 가 있어."

"……네."

최기석은 강상중이 드레싱한 자리를 재정비하고 배액병과 튜브를 고쳤다.

바닥청소까지 끝내고 도착한 휴게실.

기죽은 강상중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쌍하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환자 관리 똑바로 안 해? 배액병이 삼분의 이를 넘었으면 교체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그리고 배액통이 올라가 있으면 다시 낮춰야지. 그러다가 역류라도 하면 어쩌려고!"

최기석의 언성이 올라갔다.

"거기까지는 신경 못 썼습니다."

"미안한데 아직 안 끝났다. 너 흉관 드레싱 누구한테 배웠어?"

"최…… 최 선생님께……."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바셀린 거즈 붙인 자리를 붕 띄우라고?"

"그건 아닙니다."

"네 별 거 아닌 행동에 환자의 목숨이 달렸어."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CTD(chest tube drainage, 흉관배액) 자료 정리해서 나한테 보내."

쾅!

문을 거칠게 닫고 나오는데 콜폰이 울렸다.

"네. 흉부외과입니다."

[선배. 저 영호인데요. 기흉 환자가 온 것 같은데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될까요?]

"내려갈게."

최기석은 응급실로 내려가서 환자를 살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과 검사결과를 살피자 환자는 이영호의 말대로 기흉이다. 흉강천자를 가볍게 성공시키고 환자를 응급실에서 간호 관찰하도록 두었다.

"나가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저야 좋죠."

이영호가 미소를 지으며 쪼르르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야외에 있는 커피 자판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응급실은 어때?"

"여기도 재밌기는 한데 흉부외과만큼은 못한 거 같아요."

"다양한 환자들 만나기에는 응급실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아닌가 봐?"

"그건 좋은데, 제가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요. 잠깐 환자 봤다가 해당 과에 전화 걸어 주면 끝이잖아요.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딱히 처치를 잘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네가 사고 쳐서 그런 건 아니고?"

"아…… 아니에요!"

이영호가 발끈했다.

"이제 그때처럼 비위관 삽관 같은 걸로 실수 안 해요."

"당연히 그래야지."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없으니까 병동이 영 안 굴러간다. 새로운 온 애들도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지금 흉부외과에 있는 게 강상중이란 양용민이죠?"

"용민이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데 상중이가 문제다. 타 대학 출신이라 차별받는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신경 쓰는 데 그것도 쉽지 않네."

"상중이라면 그럴 만하죠. 원래 소문난 고문관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들은 게 있는데 이건 선배만 알아 두세요."

이영호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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