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2)
최기석은 정설화를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알아낸 사실을 정설화는 그저 본인의 힘으로 알아냈다니…….
정설화와 김철우가 대기 중인 가운데 수술 스태프가 다가와 수술 장갑을 건넸다.
이에 두 사람이 기존의 장갑을 벗고 새 장갑을 착용했다.
'우리 설화. 대박이네.'
최기석은 혀를 내둘렀다.
그랬다.
환자가 갑자기 발작했던 이유는 라텍스 알레르기 때문이다.
수술 중에는 보통 라텍스 재질의 장갑을 끼기 마련.
그런데 조영실에 있는 라텍스로 아나필락시스 쇼크를 받았다.
즉 장갑만 갈아 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최기석의 참관 속에 PCI가 이어졌다.
정설화가 김철우의 지시에 따라 카테터를 환자의 넓적다리 동맥으로 밀어 넣었다.
신중하고 차분한 모습.
첫 시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정설화가 모니터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조금 더 위로."
"이쯤이면 될까요?"
"오케이. ballooning(스텐트에 삽입된 풍선을 부풀리는 일)."
"네."
정설화가 서서히 풍선을 부풀렸다.
혈관을 막고 있던 피 딱지들이 벽으로 밀려나면서 혈류의 흐름이 원활해졌다.
"교수님. 아직 협착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유도철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고 ballooning 하자."
"알겠습니다."
김철우의 지시에 정설화가 추가적인 처치에 들어갔다. 그러자 남아 있던 혈전들마저 벽으로 붙었다.
"마무리 들어가겠습니다."
정설화는 혈관에 금속망을 남기고 풍선과 카테터를 제거했다.
이로써 짧지만 길었던 PCI 처치가 끝났다.
"김 선생님. ACT(활성혈액응고시간) 확인해 주세요."
"350초입니다."
"생각보다 기네요. 아스피린하고 헤파린 추가로 투여해 주세요. 잘못하면 급성 폐쇄가 올 수 있어요."
"제법인데?"
김철우는 정설화의 추가처치를 지켜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혼자 해도 되겠어?"
"아닙니다. 교수님이 지켜봐 주시지 않았다면 벌벌 떨어서 못했을 겁니다."
"하여간 잘했다. 난 외래로 가 볼게."
"네. 수고하셨습니다."
정설화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잘했어. 진짜 대박이야."
"정말?"
조영실에서 나온 정설화가 미소를 지었다.
"라텍스 알레르기 잡아내고 처치까지 완벽했잖아. 김 교수님이 완전 예뻐하겠는데?"
"그럼 좋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조영실을 나왔다.
최기석은 복도가 텅 빈 것을 확인한 후 정설화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잘했어. 우리 새끼."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수술 스크럽을 끝내고 병동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늘 수술 스케줄은 전부 끝났다. 응급환자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자기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셈이다.
병동에 도착해서 병실을 훑던 중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덩치가 크고 얼굴이 짙은 금발을 한 청년.
그가 바로 민주혁이 부탁한 외국인 환자 마이클임이다.
대화를 나누기 전 회의실 컴퓨터로 마이클의 차트를 살폈다.
진단명은 바렛식도.
바렛식도는 식도에 일종의 양성종양이 있는 상태다.
이것이 암으로 변할 수 있기에 수술이나 내시경으로 제거해 줘야 한다. 차트대로라면 이번 주 중으로 박용일 교수에게 식도절제술을 받게 되어있다.
"자. 가 볼까?"
최기석은 목을 풀고 마이클이 있는 3인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주치의 최기석입니다."
최기석의 인사에 마이클이 몸을 들썩거렸다.
"영어할 줄 아세요?"
"대단하지는 않지만 의사소통은 할 수 있습니다."
"와우. 하나님 맙소사. 그거면 돼요. 더 이상 뭘 바라겠어요."
마이클이 연이어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게 무척 기쁜 듯했다.
"몸은 좀 어때요?"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괜찮아요. 솔직히 검진받고 나서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수술이 필요하다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보통 역류성 식도염이 바렛식도로 변하죠. 수술받고 나서도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합니다."
"네."
마이클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죠?"
"한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서요. 대학교 다닐 때 한국인 여자친구를 사귀었거든요. 뭐. 지금은 깨졌지만."
"저런……."
"근데 한국말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존댓말 쓰는 것도 그렇고 사투리라는 것도 있고. 완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마이클이 설명을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언어에 난이도를 매기는데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와 더불어 한국어가 초고난이도 언어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저는 영어 공부 중이에요. 메이죠 병원에 가는 게 목표거든요."
"와우. 메이죠 병원 좋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메이죠에서 일하는 의사가 있는데. 정말 멋져요. 나중에 메이죠에 가게 된다면 소개시켜 줄게요."
"그럼 저야 좋죠."
최기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선생님. 혹시 시간 여유 있으면 공부할래요? 한 번은 영어로 대화하고 한 번은 한국어로 대화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지금은 영어로 이야기했으니까 저녁에는 한국어로 말해요."
"그래요."
"의사 선생님. 이따 봐."
최기석은 마이클의 한국 인사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 병실을 돌며 환자를 살피고서 당직실에서 잡일을 처리했다. 입원환자에 추가 처방을 넣고 남은 시간에 영어 공부를 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일과가 끝났다.
"으라차차."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출해서 간식을 사러 가는데 회의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생님. 퇴근 안하셨어요?"
최기석은 안으로 들어가 김태식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일이 아직 안 끝났거든."
김태식은 봉제인형을 책상에 둔 채 봉합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순 단속 봉합, 연속 봉합, 쌈지 봉합, 함몰 봉합 등등.
다양한 봉합법이 인형에게 펼쳐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특이하게 인형으로 연습하시네요."
"이거 생각보다 도움 많이 돼. 장기를 구해서 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어."
"진짜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그는 소 심장을 이용하거나 뜨개질을 하는 방식으로 봉합실력을 키워 왔다.
"인형 구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뒤처리도 편하잖아. 거기다 언제 어디에서나 연습할 수 있으니까."
김태식은 최기석과 대화를 나누며 기존에 하던 쌈지 봉합을 끝마쳤다.
은연중에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이는 것이다.
"인형으로는 어떻게 연습하세요?"
"별건 없고. 수술할 때 쓰는 봉합법을 차례대로 연습해."
김태식이 인형을 내밀었다.
과연 말대로다.
인형의 팔에는 단순 단속 봉합이, 복부에는 쌈지 봉합이, 얼굴에는 연속 봉합이 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봉합법을 각각 연습한 적은 없었기에 이 방법은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특별 미션 '스킬 배우기2'가 생성되었습니다. 봉제인형에게 각종 봉합 스킬을 펼치면 신규 스킬 고속집도가 생성됩니다.]
[망가진 봉제인형(0/150)]
알람이 반가웠다.
안 그래도 전부터 김태식의 고속집도 스킬이 탐났다.
초를 다투는 응급수술의 경우, 정확도 이상으로 속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도 해 봐도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없지."
김태식이 회의실 한쪽에 놓인 서랍장에서 곰 인형을 꺼내 던졌다.
"여기 많으니까 필요하면 가져다 써."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챙겨 두었던 쌈지를 꺼내서 봉합술을 펼쳤다.
손맛은 소 심장에 비해 한참 떨어졌지만 확실히 인형 쪽이 연습은 편했다.
수술에 필요한 봉합법을 펼치는 게 아니라 원하는 봉합법을 골라서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소 심장으로는 실전 연습을.
인형으로는 개별 봉합 연습을 하는 게 좋은 듯싶었다.
짤칵!
가위로 봉합사를 잘랐다.
"선생님 방법은 다 좋은 데 단점이 하나 있네요."
"뭔데?"
"인형이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요."
최기석의 농담에 김태식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온갖 봉합술을 당한 곰 인형은 처키보다도 두려운 존재가 되어 있었기에.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봉합 연습을 펼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인형 하나의 봉합을 끝냈다.
[망가진 봉제인형(1/150)]
상태창을 살피자 임무창에 수치가 하나 올랐다.
'하루에 세 개씩 해도 50일이네. 부지런히 해야겠는걸?'
최기석은 니들홀더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아. 그건 그렇고 아까 전에 환자 들어왔어."
"무슨 환자요?"
"장 교수님이 말한 심장이식 환자. 공여자가 잡히는 대로 수술 들어갈 거야."
"네. 그때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겠네요."
"그런 셈이지. 조만간 세이버 수술에 적합한 환자도 들어올 테니까."
"선생님은 긴장 안 되세요? 이번 심장 클리닉 실패하면 과장님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별로."
김태식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국 내 알력 싸움은 내 알 바 아니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환자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과 내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 지니까."
최기석은 김태식다운 답변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드르르르륵.
문이 열리고 장혁필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둘 다 여기 있네? 뭐하고 있었어?"
"기석이랑 봉합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김태식의 대답에 장혁필이 탁자에 놓인 곰 인형을 응시했다.
"연습 한 번 아주 거하게 했네."
"기석이 봉합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솔직히 이만하면 집도해도 가능할 것 같아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아닙니다. 전 아직 멀었어요."
두 사람의 칭찬에 최기석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레지던트 중에서는 적수가 없을지 몰라도 이들 앞에서는 아직 자라나는 새싹에 불과했다.
지이이이잉.
가운에 넣어 두었던 콜폰이 떨었다.
"네. 흉부외과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갈게요."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응급실에 환자가 와서."
"별일 아니면 오래 끌지 마. 팀원들이랑 야식 먹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장혁필의 말에 대답하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는 신주일.
나이는 52세로 극심한 흉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최기석은 차트를 살핀 후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3/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 구역질
아픈 부위: 심장
진단명: 급성 심근경색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이런.'
최기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2년 전 PCI를 받은 후 관상동맥에 재협착이 생긴 모양이다.
"선생님. 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어깨랑 팔도 너무 아프고요."
신주일이 힘겹게 입을 열었고 곁에 있는 인턴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알겠습니다. 환자분한테 니트로글리세린 혀 밑으로 투여하세요. 심근효소 검사 결과 아직 멀었어요?"
"지금 막 나왔습니다."
최기석은 재빨리 모니터 앞에 서서 검사 결과를 살폈다.
심장 기능과 관련된 수치인 트로포닌과 크레아티닌이 비정상적으로 올라 있었다.
내과적인 처치로 끝낼 환자가 아니다.
"선생님. 지금 AMI(Acute Myocardial Infarction) 환자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수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대로 환자 데리고 수술실로 와."
최기석의 속사포 같은 보고에 장혁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스태프 콜은 어떻게 할까요?"
"필요 없어."
"……네?"
"마음 단단히 먹고 와. 오늘 좋은 경험할 테니까."
장혁필이 먼저 통화를 끊었고 최기석은 멍하니 콜폰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