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6)
"내 전화인가?"
"아니. 내 전화야."
정설화가 가운에 손을 넣었다.
최기석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자세를 고쳐 소파에 앉았다.
교제하면서 오늘처럼 진한 스킨십을 한 건 처음이다. 그런데 모처럼의 기회가 물 건너갔다.
"네. 바로 내려갈게요."
정설화가 통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응급실에 환자 있대."
"그럼 당연히 가야지. 나도 슬슬 당직실로 올라가려던 참이고."
"미안."
정설화는 최기석의 볼에 입을 맞추고 아지트를 나서려 했다.
"설화야. 잠깐만!"
"왜?"
"셔츠 단추 잠가야지."
그의 지적에 정설화의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물들었다. 하마터면 브래지어를 내보인 채 응급실로 갈 뻔했다.
"고…… 고마워."
최기석은 정설화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아지트를 정리하고 당직실로 향했다.
다시 영어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레지던트가 된 지 어언 2주가 지났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최기석은 상태창을 띄우고 능력치와 임무들을 하나씩 돌이켜 보았다.
기존 스탯은 착실히 성장 중.
그중에서 얻은 지 얼마 안 되는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현재 정치력은 4, 카리스마는 3이다.
이 두 가지는 치료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정치력을 이용하면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으며, 카리스마는 스태프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수치다.
카리스마가 높으면 나중에 자신의 팀을 만들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정치력을 응시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력을 한 단계만 더 올리면 '하얀 거탑에 오르면' 임무를 완수한다.
덤으로 특수한 보상이 따라오고 말이다.
또한 현재 남은 임무는 2개.
초장기 임무인 '최고를 향해서'와 장기 임무인 '메이죠를 향해서'다.
최기석은 다음으로 스킬들을 살폈다.
신규 스킬이 생긴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렇지만 기존 스킬이 레벨업 하면서 새로운 효과를 얻고 있다. 혹한과 용맹의 효과가 추가된 얼어붙은 심장이 좋은 예다.
마지막으로 살핀 것은 P.
P.
지금까지 착실하게 모은 P.
P는 총 10000 P.
P.
4만을 더 모으면 레전드 아이템인 시간을 넘어서를 해방시킬 수 있다.
"갈 길이 멀구나."
최기석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폭풍처럼 밀려왔던 환자들이 건강하게 퇴원했다.
그중에서 에크모를 달았던 고정옥이 가장 먼저 병원을 떠났다. 애인인 김용민이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했지만 예상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병원을 다시 찾을지는 의문이지만.
락스로 음독자살을 시도했던 이지애는 퇴원 후 정신과 외래진료를 봤다. 차트를 살펴보니 부모와 함께 치료받으면서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VIP인 박순재와 닥터 헬기를 타고 온 심장파열 환자 역시 무사 퇴원했다.
환자들은 떠났지만 최기석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환타 칭호는 언제 어떻게 환자를 몰고 올지 모르니까.
* * *
띠리리링!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당직실에서 조각잠을 자던 최기석은 알람을 끄고 기지개를 켰다.
세면하고 간식을 먹은 후 찾은 곳은 바로 아지트.
"잘 됐다."
문 앞에 놓인 스티로폼 박스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새끼 양 심장이 도착했다.
번개처럼 집도 준비를 마치고 메스를 손에 쥐었다.
스으으윽.
조심스럽게 우심방을 절제했다.
오늘의 수술은 '최고를 향해서'의 한 부분인 팔로 4징증.
소 심장이 배달 왔을 때는 성인심장 수술을, 새끼 양 심장이 왔을 때는 소아심장 수술을 연습 중이다.
최기석은 좌심실과 우심실에 일부러 구멍을 만들고 봉합을 준비했다.
끼기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 조이는 소리가 유난히 경쾌했다.
최기석은 패치를 구멍에 덧대고 단순 단속 봉합에 나섰다.
외과적 처치는 6레벨, 양손잡이 패시브는 2레벨이다.
혼자서 집도함에도 손놀림이 경쾌하고 정확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삐이이이! 삐이이이!
갑작스런 알림에 최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을 절반 정도밖에 못했건만 벌써 병동에 올라갈 때가 됐다.
'그래도 이만하면…… .'
아지트를 정리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처음 새끼 양 심장을 수술할 때는 혈관을 잘라먹고 봉합도 균일하지 못했다.
이만하면 과거에 비해 제법 성장했다.
"안녕하세요."
병동에 도착하자 두 명의 새 인턴이 인사를 건넸다.
얼굴이 낯선 걸 보면 타 대학 출신 인턴이다. 문득 다른 과로 간 이영호와 조은지가 그리워졌다.
최기석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드르르르륵.
처방 넣고 수술 스케줄을 잡는데 누군가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 선배?"
최기석은 상대를 확인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김태식이 최기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김태식.
과거 진성대에서 레지던트를 할 때 그의 롤 모델이었던, 얼어붙은 심장 스킬을 전수했던 세 기수 위 선배가 등장했다.
"선배라고 부르는 건 여전하네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뭐. 내가 세이버 팀 멤버인 줄 몰랐죠?"
"네. 선배…… 아니 김 선생님이 오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장 교수님이 최 선생을 놀래 주고 싶다고 해서 동참했어요."
김태식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작년부로 펠로우도 끝났고 때마침 장 교수님이 좋은 제안을 해서 왔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처방 다 넣었으면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네."
최기석은 김태식과 1층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김태식과 재회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종종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사람의 인연이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면서.
'역시. 대단해.'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김태식을 살피고 혀를 찼다.
그의 외과레벨은 6.5로 윤지혜와 동급이다.
고속집도는 최대 레벨인 5를 찍었으며, 얼어붙은 심장도 만렙인 5를 찍었다.
못 본 사이 폭풍 성장을 한 것이다.
과연 진성대 시절 천재 소리를 듣던 능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이래서 장혁필이 스카우트에 공을 들였겠지만 말이다.
카페에 도착한 후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혹시 불편하지 않으면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앞으로 같은 팀에서 일할 건데."
"네. 편하게 하세요. 존댓말하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해요."
"사석에서는 말 편하게 할게요."
김태식이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난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서 인턴에 레지 생활까지 버티다니…… 처음 장 교수님한테 네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
"하늘이 도운 것 같아요."
"그래. 어쩌면 해진이가 너한테 힘을 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해진을 화제로 올리는 그의 얼굴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최기석은 울컥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의진대에 오신 계기가 있나요? 솔직히 양쪽을 비교하면 진성대가 조금 더 나은 것 같은데……."
"사실은 과장님 환자를 건드렸다가 찍혔어."
김태식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과장님이 못 하겠다는 수술을 내가 성공시켰거든.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아…… 그런 일이……."
"눈 밖에 날 짓을 하긴 했지. 뭐,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최기석은 김태식의 정치력이 2단계임을 확인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명진도 김태식도 마찬가지다.
실력은 좋지만 정치력이 낮은 의사들이 가는 길은 다 비슷비슷하다고.
"앞으로 의진대에서 잘하면 되겠지. 장 교수님은 그런 쪽으로는 상당히 열린 분이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최기석은 대답하던 중 카페를 스쳐가는 윤지혜를 발견했다.
"교수님!"
"기석이구나. 옆에 있는 분은……."
윤지혜가 그를 향해 밝게 웃다가 김태식을 발견하고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의진대에서 일하게 된 전임강사 김태식입니다."
김태식이 자리에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회의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데.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겠습니까?"
"……그래요."
윤지혜가 담담하게 대답하고 최기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장 교수님께 듣던 대로 정말 미인이시네요."
"감사해요."
윤지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특유의 얼음마녀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그녀의 짧은 대답으로 본래 이어져야 할 대화가 뚝 끊겨 버렸다.
"모교에서 출판한다는 책, 자료 준비는 끝내셨어요?"
"어제 새벽에 간신히."
"어쩐지 얼굴이 조금 부으셨더라. 또 라면 먹고 자셨죠?"
최기석의 지적에 윤지혜가 얼굴을 붉혔다.
"라…… 라면이 뭐가 어때서?"
"그냥 그렇다는 건데요."
"약 올리지 마."
윤지혜는 토라진 척하며 팔짱을 꼈다.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고 최기석은 카운터에 가서 커피를 가져왔다.
세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슬슬 일어날까요?"
"네. 그러시죠."
윤지혜의 제안에 다 같이 흉부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기석아. 교수님이 나 싫어하는 거니?"
가는 도중 김태식이 최기석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니요. 원래 다른 스태프한테도 그래요."
"근데 왜 너한테는 사근사근하냐? 너랑 이야기할 때랑 나랑 이야기할 때랑 완전히 다르잖아."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최기석은 속으로 웃으며 답했다.
잠시 후 흉부회과의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오늘 우리 흉부외과에 새 얼굴이 들어왔습니다. 김 선생, 인사해요."
"네."
조지환의 말에 김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작년에 진성대에서 심장외과 펠로우를 끝낸 김태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식구들을 만나서 일할 수 있게 돼서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가 끝나자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걸로 세이버 팀은 인원이 다 갖춰진 것 같은데. 권 교수는 어때요?"
"저희는 저번 주에 팀원을 전부 꾸렸습니다. 누구처럼 외부 인물을 끌어들이지도 않았고요."
권일수의 저격에 장혁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일과가 끝난 후 노우드 사전 연습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장 교수, 분발해야겠는데요?"
"저는 속도가 아니라 결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혁필 역시 뼈 있는 한마디로 받아쳤다.
조교수 간의 신경전이 끝나고 회의와 회진이 정상적으로 끝났다. 모처럼 오전 스케줄이 널널했기에 최기석은 호흡기내과 병동을 찾았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 최미순의 곁에 섰다.
최미순은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항암 치료 1주 차임에도 최미순은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구토와 구역질은 기본이요, 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얼마 없는 머리는 다 빠졌다.
최미순을 지켜보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최기석은 최미순을 내려다보다가 회의실로 올라갔다. 환자들을 재차 살피고 처방을 넣었으며 내일 있을 케이스 발표도 미리 준비했다.
지이이잉.
콜폰을 확인하니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네, 흉부외과입니다."
[선생님! 빨리 내려와 주세요. 응급환자예요!]
"바로 가겠습니다."
최기석은 서둘러 응급실로 내려갔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응급 환자가 왔을까.
괜히 바람을 잡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의식을 잃은 환자를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 복통으로 온 환자인데 거…… 검사를 해 보니까."
"됐어요."
최기석은 인턴의 설명을 끊고 장혁필에게 전화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급하다.
"교수님. 복부 대동맥류 파열 환자가 응급실에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복부 대동맥류 파열.
이것은 복부를 지나가는 가장 큰 혈관인 대동맥이 압력을 받아서 터진 질환이다.
제때 수술받지 못하면 환자의 사망률은 80퍼센트, 수술을 한다 해도 사망률이 50퍼센트에 이른다.
"외래 교수, 수술 스케줄은 다 잡혔지?"
"네."
"어쩔 수 없다. 김 선생 불러."
"하지만 오늘이 출근 첫날인데……."
"다른 방법이 없어!"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인턴에게 수술 동의서를 받도록 시켰다.
그동안 수술실을 잡고 수술이 가능한 스태프들에게 연락했다.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쓴 채 수술실을 향해 달렸다.
"비키세요! 비켜요!"
그의 외침에 복도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수술실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한 발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 멤버는 다음과 같았다.
집도의 김태식.
제1보조 최기석.
타 과 인턴 2명.
수술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조합이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최선이다.
"이 환자야?"
김태식이 무표정한 얼굴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은 심장의 원조다운 모습이랄까.
응급환자를 대함에 있어서도 감정의 동요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복부 대동맥류 파열이라. 신고식치고는 너무 가혹하네."
"……."
"따라 와."
스크럽을 먼저 끝낸 김태식이 가운을 휘날리며 로젯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