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5)
연달아 들리는 알림에 최기석은 확신했다.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음을.
직급이 낮다고 해서 무조건 엎드릴 필요는 없다. 상황이나 역학관계를 따져서 할 말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력을 의식하니까 확실히 행동이 바뀌는구나.'
최기석은 자신의 변화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진짜 사람이 변하긴 변하는 가보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면."
"……."
"설마 나한테도 개길 거니?"
"왜 그러세요. 제가 선배 좋아하고 존경하는 거 알면서."
"능구렁이 같은 자식."
민주혁이 피식 웃으며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스크럽이라서 먼저 간다. 수고."
"선배도 수고하세요."
최기석은 민주혁에게 인사하고 병실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당직실.
최기석은 영어 교재를 펴 놓고 공부 중이다.
회화와 리스닝 공부를 한 지 어언 육 개월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지못해하던 공부였지만 지금은 나름 재미를 느꼈다. 외국어 학습능력을 2배로 올려주는 젬을 획득한 후에는 탄력이 붙었고 말이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
교재를 덮고 노트북으로 메디컬 미드를 시청했다.
최근 재미 반, 공부 반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제법 효과가 쏠쏠했다.
분야가 의료라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미드 한 편을 다 보고서 최기석은 휴대폰을 들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8시.
시차를 감안하면 송명진이 전화 받을 가능성이 높다.
띠리리리링.
[여보세요.]
"네. 교수님. 저 기석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송명진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반가워요. 최 선생. 그동안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별일은 많았지만 잘 지냈습니다."
최기석의 농담에 송명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보내 주신 라이브 동영상을 너무 늦게 보고 전화 드려서……."
[레지 1년 차면 한창 바쁜 시기인데 이 정도만 해도 빠른 거죠.]
"교수님. 정말 존경합니다."
최기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세계 최고의 병원이라 꼽히는 병원 중 하나인 메이죠 클리닉에서, 그것도 난다 긴다 하는 타 대학 흉부외과의들을 모아 놓고 라이브 수술을 하다니…….
다른 과를 비교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만한 업적을 낸 건 송명진이 유일하다.
[잘 봤다니 다행이네요. 최 선생은 영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최 선생을 부르는 게 빨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실력은 좋은데 의사소통으로 무시당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맞습니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장 교수하고 통화했어요.]
"장혁필 교수요?"
최기석이 놀라서 되물었다.
장혁필이 미국에 있는 송명진과 통화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최 선생이 장 교수의 세이버 팀에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의술 말고 다른 것도 잘 가르치겠다면서 걱정 말라던데요?]
"아, 네."
[장 교수 밑에서 잘 있어 봐요. 나보다 더 많은 걸 가르쳐 줄지 몰라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 마음 속에는 언제나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송명진이 껄껄 웃었다.
최기석은 송명진과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끊었다.
짧은 대화가 아쉬웠지만 스승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충분히 기운을 차렸다.
지이이잉.
다시 영어 공부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정설화의 전화다.
[기석아. 뭐해?]
"당직실에서 영어 공부 하는데?"
[칫. 전에는 먼저 보자고 연락하더니 요새는 아예 모른 척하기야?]
"미안. 너무 바빠서. 오늘 당직이지? 아지트에서 볼까?"
[응. 빨리 와.]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설화를 만나기 전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그동안 두려워서 밀어 두기만 했던 일이.
드르르륵.
당직실을 떠나서 최미순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최미순은 침상 등받이에 기대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병실에 다른 환자들이 없어서 혼자 리모콘을 돌렸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의사 총각 왔어잉?"
"선생님. 안녕하세요."
보호자와 최미순이 인사했고 최기석은 그녀의 곁에 섰다.
"아따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여. 바쁘제?"
"네. 할 일이 좀 많아졌네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삼시 세끼는 꼭 챙겨 먹어야 혀. 우리나라 사람은 자고로 밥심으로 산다니께."
오히려 자신 걱정을 해 주는 최미순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로 인해 준비했던 말을 꺼내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건 그렇고 말이여. 요새는 왜 하루 종일 검사만 혀? 죽을병이라도 걸렸는가?"
"그게…… 안 그래도…… 두 분께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최기석은 최미순과 보호자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최미순이 폐암 2기라는 사실과 과거 앓았던 위암이 폐로 전이됐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폐기능 검사 결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까지.
사실은 병실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최미순의 폐암 여부를 보호자에게만 알릴지, 아니면 최미순에게도 알릴지를 두고서 말이다.
하지만 고심 끝에 최미순에게도 알리기로 했다.
그녀와의 신뢰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
"……."
무거운 침묵이 병실을 휘감았다.
최기석은 설명을 마치고 간신히 최미순과 보호자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랄까.
"그랬구먼. 어쩐지 의사 총각 행동이 심상치 않다 싶었어."
"저희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잠자코 있던 보호자가 물었다.
"내일쯤 호흡기내과로 병실을 옮기고 항암 치료를 받으실 겁니다."
"항암 치료 받으면…… 살 수 있죠?"
"그 부분은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호흡기내과에서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게 좋겠습니다."
최기석은 일부러 대답을 돌렸다.
수술이 불가능해진 시점부터 최미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기에. 더불어 짧은 지식으로 두 사람을 희망고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사 총각."
최미순이 갑자기 최기석의 손을 붙잡았다.
앙상한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말해 줘서 고마우이. 얼렁뚱땅 넘어갔으면 의사 총각을 미워할 뻔했어. 바쁠 텐데. 어서 가 벼."
"네."
최기석은 힘없이 말하고 병실을 떠났다. 이후 히포크라테의 눈을 사용한 채 천천히 병실을 돌았다.
정설화를 만나기 전 환자의 상태를 재차 확인할 생각이다.
복도를 걷다가 한 병실 앞에 멈췄다.
최기석은 한동안 고정옥과 김용민을 지켜봤다.
무슨 깨가 쏟아지는 이야기를 하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특히 고정옥은 그동안 본 적 없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김용민을 보고 싶어 했는지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괜찮겠지?'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정옥은 전과 달리 의식이 또렷하다.
또한 그녀가 쓰는 병실은 3인실로 만약 김용민이 허튼 짓을 계획하더라도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간호사들에게 두 사람을 특별히 관찰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환자 상태를 살핀 후 아지트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안이 텅 비었다. 정설화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얍!"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나타나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뒤돌아보니 정설화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까…… 깜짝이야. 놀랐잖아."
"거짓말. 얼굴에는 하나도 안 놀랐다고 써 있는데?"
정설화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아니야. 진짜, 완전, 어마어마하게 놀랐어.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서 이러는 거야."
최기석의 너스레에 정설화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소파에 앉아 있어 봐. 내가 녹차 타 줄게."
정설화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최기석은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문득 소파 위에 놓인 정설화의 휴대폰에 눈이 갔다. 방금 막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선배. 제 마음 다 아시잖아요♡ 왜 그러세요.]
메시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누가 봐도 남자가 보낸 메시지다.
요새 정설화에게 신경을 못 써 줬거늘, 그사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걸까.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천천히 마셔. 녹차가 심장에 좋대."
"고마워."
최기석은 정설화가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근데 메신저 방금 왔더라?"
"그래?"
정설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메신저를 확인하고 그의 곁에서 같이 녹차를 마셨다.
메신저에 대해서 일언반구가 없자 최기석의 마음은 더욱 타 들어갔다.
"방금 그 메신저 누가 보냈어?"
"우리 과 인턴."
"누군데?"
"종혁이."
"혹시 김종혁?"
최기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김종혁은 의진대 한 학년 후배로 모델처럼 큰 키와 잘생긴 외모로 여학우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녀석이 정설화에게 하트를 보냈다는 사실이 찜찜했다.
"기석이. 너 설마 질투하는 거야?"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메신저가 떠올라서 우연치 않게 봤는데 하트가 있잖아. 혹시 네가 종혁이랑 친해졌나 해서……."
"그러니까 그게 질투잖아."
"……그래. 질투다. 남자친구가 질투 좀 하면 어디 덧나냐? 내 여자가 다른 남자랑 친하게 지내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어?"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고 정설화는 입에 자물쇠라도 채운 듯 침묵을 지켰다.
"잠깐 찻잔 좀 내려 봐."
"갑자기 왜?"
"글쎄. 시키는 대로 해 봐."
정설화의 박력에 최기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정설화가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고 그녀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최기석은 졸지에 정설화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됐다.
"귀여워."
"엥?"
"사귀면서 이런 모습은 처음 봐."
정설화가 손을 풀어 주지 않았기에 그는 계속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 뺨에 닿는 보드랍고 말캉한 느낌이 좋았지만 이내 숨이 막혔다.
"설화야…… 나 죽어."
"아. 미안."
정설화가 그제야 손을 풀었다. 그리고 김종혁과 나누었던 메신저 내용을 일일이 다 보여 주었다.
그 결과 김종혁이 정설화에게 일방적으로 껄떡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설화가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종혁이 새끼가 나쁜 놈이네."
"그치?"
"미안. 내가 괜히 의심해서."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메신저를 봤을 때 치솟았던 불길은 꺼진 오래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나 이렇게 인기 많은 사람이라구."
정설화가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잘해야지. 그래서 우리 설화 평생 내 걸로 만들어야지."
"몰라."
정설화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나 100일 당직 끝나면 오프 맞춰서 여행 가자. 경치 좋은데서 단둘이 오붓하게 있고 싶어."
"나도."
최기석은 가만히 정설화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그녀의 단발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과 인중을 간지럽히는 숨소리.
최기석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정설화와 키스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정설화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몸을 포개서 정설화와 입을 맞추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하으으응응."
정설화가 콧소리를 내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최기석은 그녀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분홍색 브래지어와 풍만한 가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지이이잉.
야속하게 콜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