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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01화 (101/407)

다사다난 (4)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이 병원은 제 마음대로 사람도 못 보나요?"

"이건 병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자분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에요."

최기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역시 고정옥의 보호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용민을 그녀 곁에 둬 봤자 좋은 게 전혀 없다.

"휴우…… 선생님."

고정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떠나고 얼마 긴 시간을 혼자 보냈는지 아세요? 사실 아들내미랑 딸내미는 어쩌다 한 번 볼 뿐이에요. 저랑 같이 있어 준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요."

"……."

"제발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고정옥의 하소연에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폭군의 강림으로 고정옥을 제압하는 게 옳을까, 아니면 면회를 허용하는 게 옳을까?

두 가지 다 장단이 있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환자분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면회는 허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정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도 그이랑 대화해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실 거예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최기석은 고정옥과 대화를 끝내고 회의실로 향했다.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영호와 조은지의 인사를 받으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타다다다닥.

환자 차트를 확인하고 금일 처방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뚝 멈췄다.

최미순의 E.

M.

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한 순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제 받은 조직검사 결과 최미순은 폐암 2기를 진단받았다.

또한 과거 위암에 있던 암이 폐로 전이된 전이성 폐암으로 TNM 분류로는 T2N1M0이다.

종양이 흉막까지 침범했으며 림프절에 일부 전이가 있으며 다른 장기로의 전이는 없는 상태다.

최기석은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최미순은 고령인데다가 이미 위암 수술을 받았다.

추가적으로 폐암수술을 했을 때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배. 왜 그러세요?"

"아니. 신경 쓰지 마."

최기석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남은 처방을 입력하고 수술 스케줄을 정리했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른 선생님들의 판단을 믿는 게 최선이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민주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기석아. 나 좀 보자."

"네."

최기석은 민주혁을 따라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잘 마실게요."

민주혁이 내민 캔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민주혁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제가 인턴 때 흉강천자 했던 어르신, 기억하세요?"

"아. 지금 폐암으로 입원한 할머니? 당연히 알지."

"어제 검사 결과 나왔는데 폐암 2기래요."

"위암이 전이됐나 봐?"

"네."

최기석의 대답에 민주혁이 혀를 찼다.

"쯧쯧. 연세도 많은데 전이성 폐암이라니…… 예감이 별로다."

"……."

"오늘 브리핑하면 과장님이 내치거나 호흡기내과로 보내든가 둘 중 하나겠네."

민주혁의 말에 최기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사실 폐암은 1, 2기를 비롯해 3기 일부의 경우 수술을 진행한다. 하지만 조지환은 그마저도 환자를 가려서 수술했다. 최미순의 전력을 보면 수술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그렇고 세이버 팀 진행은 어때?"

민주혁이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최기석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정치력이 한 단계 올라간 덕분인까.

민주혁이 넘겨짚기를 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저는 선배에게 세이버 팀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아. 그래? 저번에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다른 사람한테 들었나보네."

"얼렁뚱땅 넘어가시면 곤란해요. 선배, 솔직히 노우드 팀에 들어가셨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세이버 팀에 있다는 걸 알 수 없잖아요."

최기석의 역공에 민주혁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야. 너 많이 컸다."

"제가 원래 키는 선배보다 조금 더 컸잖아요."

"얼씨구. 능청스러운 개그까지. 내가 알던 최기석은 어디 갔나?"

민주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면 숨길 필요 없지. 맞아. 난 권일수 교수님 밑으로 들어갔다."

"전 선배라면 장 교수님을 따를 줄 알았는데."

"뭐. 나도 그러고 싶지만 불러 주질 않는데 도리가 있나. 그나저나 장 교수님 성격이면 널 제2보조까지 무난하게 쓰겠네."

"맞아요."

"부러운 자식. 난 땜빵용 보조 스태프인데. 레지 1년 차가 3년 차보다 잘나가는 더러운 세상!"

"운이 좋았죠. 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치프 한민우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여기서 뭐하냐?"

한민우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네, 선배. 기석이랑 잠깐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세이버 팀이나 노우드 팀 이야기로 노닥거릴 시간은 있고 환자 볼 시간은 없냐?"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한민우가 팀을 걸고 넘어졌다.

"그런 건 아니고요. 오더도 다 넣었고 아직 회의 시간도 아니라서요."

"핑계 대지 마. 이런 식으로 느슨하게 지냈다가 환자한테 문제 터지면 다 너희들 책임인 거 알지?"

"……."

"대답 안 해?"

"알겠습니다."

최기석과 민주혁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민우는 한참 군기를 잡다가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저거 질투하는 거 맞죠?"

최기석의 질문에 민주혁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정답! 하여간 짬 먹고 능력 없는 것들이 문제라니까. 그러면 인성이라도 중간은 가던가. 일어나자."

"네."

두 사람이 회의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에 첫 번째 순서는 케이스 발표.

오늘은 조은지와 민주혁, 한민우의 발표가 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케이스는 대동맥판막 치환술입니다."

첫 번째 주자인 조은지가 발표에 나섰다.

팩트 폭격기 권일수에게 호되게 당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것일까.

오늘따라 발표 내용이 구체적이고 풍부했다.

다른 선생들의 질문에도 대답을 곧잘 대답했다.

"수술 위험도 부분이 틀렸잖아. 요즘 판막술은 많이 발전해서 사망률이 높지 않다. 우리 병원에서 대동맥판막 치환술로 사망한 환자가 몇 명인 줄 알아?"

"자…… 잘 모르겠습니다."

권일수의 질문에 조은지가 벌벌 떨며 대답했다.

"최근 6년간에는 한 명도 없어. 사망한 환자는 대부분 합병증 때문이었지."

"……."

"다른 건 나쁘지 않네."

"가…… 감사합니다."

조은지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지는 민주혁의 발표를 들으며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역시 민주혁이라고 해야 할까.

보통 케이스 발표를 하게 되면 자신이 꽂히는 주제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민주혁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에게 덜 까일 만한 케이스를 들고 나왔다.

정치력이 사소한 부분에서도 발휘되는 것이다.

민주혁이 무사히 발표를 끝내면서 한민우의 차례가 왔다.

"제가 오늘 발표한 내용은 바렛식도의 치료입니다."

한민우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바렛식도란 식도 하단부분의 표피세포가 변질되는 질환으로 차후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

"바렛식도의 치료에는 크게 네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약물 치료, 두 번째는 식도절제술, 세 번째는 내시경 치료가 있는데……."

한민우의 발표가 계속됐다.

최기석도 바렛식도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기에 경청해서 들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은……."

한민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권일수가 손을 들었다.

"완전 엉터리네, 엉터리. 민우야."

"……네."

"너 치프 맞냐?"

권일수가 노골적으로 한민우를 공격했다.

"폐식도 쪽으로 펠로우(전임의) 한다고 들었는데. 공부를 이따위로 하면 어떡하니."

"제가 어떤 부분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자료를 왜곡했다는 거지. 네 발표대로라면 바렛식도 환자는 전부 식도절제술을 해야 되네?"

"그게……."

"솔직히 치료비나 합병증 측면을 고려하면 내시경 처치가 식도절제술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다. 식도절제술을 펼치는 환자는 대부분 수술을 견딜 만한 체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지."

"……맞습니다."

"치프가 어리바리하면 아래 연차들이 뭘 배우겠냐? 정신 좀 차리자. 알았지?"

"네."

한민우가 새빨간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케이스 발표가 끝나고 입원환자 브리핑이 시작됐다.

최기석은 맡은 환자들의 상태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폐암으로 입원한 최미순 환자입니다."

그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고 물을 마셨다.

"어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전이성 폐암과 T2N1M0 병기가 확인되었습니다."

"볼 것도 없네."

잠자코 있던 조지환이 입을 열었다.

"호흡기내과에서 항암 치료 받던가,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해요."

"과장님. 그 전에 환자에게 폐기능 검사와 폐관류 스캔을 해 볼 수 없을까요?"

"추가로 검사를?"

"네. 환자의 나이는 적지 않지만 검사 결과가 좋으면 수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기석이 당돌하게 나서자 회의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저도 최 선생 의견에 동의합니다."

윤지혜가 최기석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최소한 수술이 가능한지 검사는 해 봐야 호흡기내과에 환자를 넘기더라도 명분이 선다고 생각합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나요?"

"최미순 환자는 입원기간이 짧을 듯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검사는 많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과의 수익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윤 교수."

조지환이 이를 드러내며 윤지혜를 응시했다.

"말 한번 잘했어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죠. 그리고 최 선생."

"네, 과장님."

"앞으로 나를 설득하고 싶으면 윤 선생 같은 방법을 써야 될 겁니다."

조지환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한 대로 추가 검사 해 봐요.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아까 말한 대로 진행하고 결과가 좋다면 박 교수가 수고해 줘요."

"알겠습니다."

폐식도 클리닉을 맡고 있는 박용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회의와 회진이 차례대로 끝났다.

최기석은 최미순의 병실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 최미순에게도, 보호자에게도 폐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머리는 빨리 해야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가슴이 좀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최기석, 민주혁. 너희 둘 다 나 따라와."

한민우가 두 사람을 당직실로 불렀다. 그리고 당직실 문을 잠근 후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내가 우습게 보이냐?"

"네?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케이스 발표할 때 다 봤어. 너희 둘이 날 한심하게 쳐다보는 거."

한민우의 언성이 올라갔다.

반면 최기석과 민주혁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부교수님들한테 잘 보였다고 나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 이거냐?"

"그런 적 없습니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네. 그럼 내가 괜히 이 지랄을 떠는 것 같아? 엉?"

최기석과 민주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민우가 참았던 열등감을 터뜨린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하긴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지. 나는 레지 1년 차 때부터 맞으면서 배웠는데. 엎드려."

"……."

"빨리 엎드리라고!"

"싫습니다."

최기석은 단칼에 거절했고 민주혁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싫다고 했습니다. 제가 왜 엎드려야 하죠? 환자나 보호자에게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선생님들께 무례를 범한 적도 없습니다. 이런 부당한 처사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새끼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미쳤어?"

한민우가 도끼눈을 떴다.

"제가 미친 겁니까? 아니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후배에게 기합을 주는 사람이 미친 겁니까?"

"개새끼가. 진짜!"

한민우가 거리를 좁히는 사이,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했다.

휘이이이익!

주먹이 얼굴을 향했지만 가볍게 피하고 한민우의 손목을 등 뒤로 꺾었다.

"아으으윽! 너 이 새끼 이거 안 놔?"

최기석이 손을 휙 놓자 한민우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최기석의 실력행사에 놀랐는지 한민우는 일어나서 쉽게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씨발. 너 두고 보자!"

한민우가 책을 내던지고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야. 너 괜찮겠어? 그냥 쫄은 척해 주고 말지."

"어차피 치프는 제 상대가 아니에요. 실력도, 스태프들 사이에서의 입지도 제가 위잖아요. 게다가 지금 있었던 일 하소연할 때도 없을 걸요? 누워서 침 뱉기니까요."

최기석의 날카로운 분석에 민주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계산하고 개겼니?"

"저도 이제 여우처럼 살아 보려고요."

최기석이 탁탁 손을 털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뇌리에 알림이 울렸다.

띠링!

[정치력이 1단계 상승했습니다.]

[카리스마가 1단계 상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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