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2)
박순재에게 에크모를 VV(정맥에서 혈액을 빼낸 후 다시 정맥으로 넣는 방법)타입으로 작동시키면서 본격적인 수술의 막이 올랐다.
"메스."
윤지혜는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받아 박순재의 갈비뼈 3번과 5번 사이를 갈랐다.
오늘 있을 MIDACAB은 최소침습 수술.
일반적인 CABG와 달리 정중흉골 절개술을 펼치지 않는다.
스으으으윽.
메스가 거침없이 움직였다.
윤지혜가 필요한 처치를 하는 동안, 제1보조인 유재현이 카메라 포트를 들었다. 그리고 환자의 늑간 사이에 투관침을 꽂아 넣고 카메라 포트로 흉강내부 시야를 확보했다.
그사이 최기석은 로봇 세팅에 나섰다.
로봇팔에 필요한 수술 도구를 착용시키는 것이다.
'다행이다.'
최기석은 할 일을 마치고 윤지혜를 응시했다.
혹한 효과 덕분인지, 윤지혜의 처치는 과감하고 빨랐다.
옛 스승을 수술한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지금부터 내흉동맥을 채취한다. 헤파린(항응고제)."
"네."
윤지혜의 지시에 최기석은 헤파린을 IV로 투입하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기계 소리와 함께 로봇 수술의 막이 올랐다.
덜컹. 덜컹.
윤지혜가 페달을 밟으며 콘솔을 조정하자 모니터 화면이 차차 바뀌었다.
로봇 수술만이 가능한 3차원 수술 시야 변경.
잠깐의 조작으로 떼어 내야 할 내흉동맥이 정확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만하면 됐어."
윤지혜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콘솔을 다루며 천천히 내흉동맥을 박리해 나갔다.
내흉동맥은 흉강입구 부근에 위치했는데 여기 있는 동맥을 채취해서 막힌 관상동맥의 우회로를 만든다.
스으으윽.
로봇팔에 달린 메스가 깔끔하게 내흉동맥을 떼어 냈다.
MIDCAB이라는 능선에 한 고비를 넘긴 셈이다.
유재현이 내흉동맥을 따로 보관하는 동안, 윤지혜는 한숨을 돌리며 참관용 수술실을 응시했다.
조지환이 팔짱을 낀 채로 수술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술 전에는 그의 존재 자체가 큰 부담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저 보여 주고 싶었다.
로봇을 다루는 능력은 그녀가 조지환보다 한 수 위임을.
위이이잉. 덜컹.
윤지혜는 콘솔을 움직이며 수술을 재개했다.
메스로 심낭을 가르자 요동치는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정을 지켜보던 최기석은 미리 견인기를 챙겨 심낭을 고정시켰다.
"말 안 해도 척척이네?"
윤지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박리한 내흉동맥 양쪽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쪽 끝 부위를 협착된 관상동맥의 상단부에, 다른 쪽 끝 부위를 협착된 관상동맥 하단부에 봉합했다.
일명 Y 그래프트.
심장이 뛰고 있음에도 윤지혜는 깔끔하게 우회로를 만들었다.
고난도의 MIDCAB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유재현이 절제했던 부위를 다시 봉합하면서 모든 과정이 끝났다.
윤지혜는 콘솔에서 내려와 박순재를 내려다보았다.
가슴 한구석에서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저 해냈어요, 교수님.'
* * *
병원 인근의 해장국 집.
최기석과 장혁필, 강하나가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기석이 연달아 수술을 뛰는 바람에 점심을 못 먹었기에 만들어진 자리다.
'역시 대단해.'
최기석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장혁필을 바라봤다.
심장파열 수술을 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그는 수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인공심폐기를 쓰지 않고 파열된 우심방을 꿰맸다.
그럼에도 엄청난 봉합 속도와 정확도를 유지했다.
만약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집도했다면 어땠을까.
분명 MIDCAB 수술에 들어가지 못했으리라.
더불어 장혁필이라면 충분히 세이버 수술을 성공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술 보조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나야 뭐 하던 대로 한 거고. 감사는 강 선생한테 해야지."
"저요? 저도 별로 한 거 없는데요?"
강하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 쌤 고마워요. 오늘 일은 잊지 않을게요."
최기석은 강하나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그녀 역시 수술 시간을 단축시킨 공신이다.
강하나는 제2보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수술실 간호사 일에서 손을 놓은 지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후후. 알면 됐어요. 그런데 교수님."
"왜요?"
"오늘 일 문제는 없을까요? 간호사가 의사 대신 보조를 섰는데 누가 꼬투리를 잡으면……."
강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정말요?"
"오늘 수술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세이버 팀과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외라고 하면 인턴인 영호뿐인데…… 영호는 기석이가 입단속시키면 되니까."
장혁필의 시선이 최기석을 향했다.
"할 수 있지? 영호는 네 말이라면 깜빡 죽잖아."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만 신경 쓰면 다 알아. 네가 컨퍼런스 발표할 때 영호 녀석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거 하며, 평소에 병아리처럼 네 뒤를 쫓아다니는 걸 보면 말이야."
"교수님은 못 속일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장혁필의 정치력이 장식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하여튼 팀이 좋다는 게 이런 거지. 서로를 감싸 줄 수 있으니까."
꾸르르르륵.
대화를 하는 도중 최기석의 배가 우렁차게 울었다.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으며 장혁필과 강하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주문한 뼈다귀 해장국이 나왔다.
"교수님. 정말 죄송한데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요?"
강하나의 말에 장혁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말할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요. 그게…… 소주 한 병만 시키면 안 될까요?"
"난 또 대단한 이야기 꺼내는 줄 알았네."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엄청나면서 굉장하고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거예요. 뼈다귀 해장국만 먹는 거랑 반주를 같이하는 건 천지 차이라니까요."
"강 선생. 술 좋아하나 보죠?"
"네!"
강하나의 씩씩한 대답에 장혁필이 미소를 지었다.
"나이트 끝나고 수술 보조까지 도왔는데 안 될 이유가 없죠. 우리도 딱 한 잔씩만 할까?"
"네. 한 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장혁필의 주문에 소주가 나왔고 강하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술잔을 따랐다.
"자, 세이버 팀을 위하여!"
"위하여!"
채애애앵.
술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최기석은 술잔을 비우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운 삶을 얻은 후 거의 처음 마시는 소주, 뒷맛이 달기만 했다.
"교수님. 팀원들은 잘 모이고 있는 건가요?"
"암. 그렇고말고. 강 선생이 합류했고 히든카드까지 합류하기로 했으니 사실상 인원은 다 찼지."
"히든카드라면 제1보조 말씀하시는 거죠?"
최기석의 질문에 장혁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합류하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어젯밤에 만나서 네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도 널 무척 보고 싶어 하더라."
"그 사람이 누군지 속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장혁필이 궁금증을 유발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장혁필과 더불어 세이버 팀의 핵심 축이 될 제1보조, 자신과 연관 있다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다음 주부터 정식 스태프로 들어올 거니까. 그때 확인해 봐."
장혁필이 한 번 더 최기석을 놀려 먹었고 최기석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세 사람은 세이버 팀의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사가 끝난 후 최기석은 두 사람과 헤어져 본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본관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왜 사람이 모였나 싶어서 봤더니 특별 초청을 받은 마술사들이 공연 중이다.
휘리리리릭.
삐에로 복장을 한 인물이 저글링을 시작했다.
공이 무려 일곱 개나 됐음에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공연을 지켜봤다.
"지금부터 특별한 이벤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관람하시는 분 중 저글링에 성공하시는 분이 있다면 특별 상품을 드립니다."
삐에로의 말에 공연 스태프가 상품을 진열했다.
상품은 샴푸 세트와 대형 펭귄 인형 등등으로 다섯 개가량 되었다.
상품을 타는 조건은 저글링을 10초 동안 유지하는 것.
단 저글링하는 공의 개수에 따라 상품이 달랐다.
"저요! 저요!"
한 청년이 호기롭게 나섰다.
청년은 삐에로에게 공 세 개를 받아 저글링에 나섰다.
처음에는 제법 버티는가 싶었지만 금방 공 하나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후에도 몇몇 사람들이 상품에 도전했지만 하나같이 쓴잔을 마셨다.
보기에는 쉬워도 저글링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무나 한다고 될 리 없지.'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한 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저 펭귄 인형 갖고 싶어."
"안 돼. 집에 인형 많잖아."
"칫. 그거 다 옛날 거고 헤진 거잖아. 친구들은 그런 인형 가지고 안 놀아."
어린 아이가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인형을 응시했다. 이에 아이의 어머니가 고민하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해 볼게요."
"이쪽으로 나오세요."
삐에로가 아이 어머니를 무대로 불렀다.
"저 펭귄 인형에 도전하려면 몇 개를 해야 하죠?"
"공 다섯 개를 돌려야 합니다. 아직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는데 다른 상품을 고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게 아니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성함이……."
"한윤희에요."
"자. 이번에는 한윤희님께서 저글링 다섯 개에 도전합니다. 다들 박수!"
"엄마 파이팅!"
아이가 목청껏 응원하자 한윤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이어진 한윤희의 저글링.
한윤희는 손재주와 순발력으로 공을 세 개까지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공을 하나 더 추가하려다가 기존에 돌린 공을 받지 못했다.
우르르르르.
허공에 있던 공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한윤희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딸아이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최기석은 모녀에게 다가갔다.
모녀의 행색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경제적인 여유 또한 없어 보였다.
사정을 짐작할 수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과거 고아원 생활을 할 때 다른 친구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저기, 잠시만요."
"네?"
한윤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이야기를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혹시 저 인형이 필요하신 거 아닌가요?"
최기석의 질문에 한윤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 저 인형이 너무 갖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한윤희가 아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치만……."
"어쩌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더 계셔 보시겠어요?"
최기석은 모녀를 붙잡아두고 호기롭게 무대에 올랐다.
"특이하게도 이번 도전자는 의사 선생님입니다. 성함이 최기석이고 흉부외과에 계시네요."
"맞습니다. 저는 저글링 다섯 개에 도전할게요."
"다섯 개요? 방금 다른 분이 탈락하는 거 보셨을 텐데……."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최기석은 목을 꺾으며 스킬을 펼쳤다.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셨습니다. 근력과 민첩성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온몸에 힘이 넘쳤다.
최기석은 무대 아래에 아이를 보며 각오를 다졌다.
폭군의 강림과 양손잡이 스킬은 일상에 영항을 미치는 스킬이다. 이 두 가지와 함께라면 처음 하는 저글링이라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최기석 선생님의 도전을 박수로 맞아 주세요."
짝. 짝. 짝. 짝.
박수를 받으며 왼손에 공을 쥐었다.
최기석은 첫 번째 공과 두 번째 공을 차례대로 허공에 던졌다. 더불어 오른손으로는 공을 받으며 왼손으로 계속해서 공을 던졌다.
"우와. 대박!"
"왜 이렇게 잘해?"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감탄을 터뜨렸다.
최기석은 시범을 보였던 삐에로처럼 능수능란하게 저글링을 해냈다.
손에서 돌아가는 공이 회전관람차 같았다.
폭군의 강림과 양손잡이 스킬의 시너지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권투라도 배워 볼까?'
저글링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넘쳤다.
"지금부터 숫자 세겠습니다. 열…… 아홉…… 다섯…… 셋…… 하나. 됐습니다. 성공입니다!"
삐에로의 외침에 사람들이 다시 박수갈채를 보냈다.
최기석은 상품으로 받은 대형 펭귄 인형을 챙겨서 아이에게 건넸다.
"선생님이 주는 선물이야. 대신 앞으로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된다."
"네! 고맙습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최기석도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