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4)
"왜 그렇게 놀라?"
"뜻밖이라서요."
"소독간호사는 세이버 팀의 핵심 인력 중 한 명이야. 집도의를 거드는 게 의사만이라고는 생각하면 착각이지. 그러니까 강하나 간호사는 네가 맡아."
"알겠습니다."
"그럼 스태프 이야기는 이쯤하고."
장혁필이 보드 판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스태프가 다 모였다는 가정하에 일정을 알려 주마. 우선 본원과 지방에 있는 순환기내과에서 케이스에 어울리는 환자를 골라낸다."
"쉽지는 않겠네요."
최기석이 한마디 보탰다.
세이버 수술은 CABG(관상동맥 우회술)이나 심장판막 수술에 비교해 환자를 구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
과거 진성대에 있었을 때도 세이버 수술이나 바티스타 수술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으니까.
더군다나 심장 클리닉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수술이 성공해야 하는 법.
입맛에 맞는 환자를 찾는 것은 더더욱 고되다.
"환자는 내가 찾을 테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돼."
"……."
"그리고 적당한 환자를 찾을 때쯤이면 이미 스태프는 완성되어 있어. 이후에는 예비 수술을 세 번 정도 하고 심장 클리닉에서 활동하면 된다. 질문은?"
"스태프가 꾸려지기 전에 준비할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역시 너답다."
장혁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연구실 돌아가는 데로 세이버 수술에 관련된 논문하고 동영상 보내 줄게.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넌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
"네!"
최기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후 장혁필이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동을 떠났다.
'코앞이구나.'
그의 시선이 달력에 머물렀다.
심장 클리닉 리모델링의 완료와 함께 시작될 흉부외과의 치열한 경쟁.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정치력과 실력을 두루 갖춘 장혁필?
아니면 깐깐하고 원칙을 중요시하는 권일수?
최기석은 먼 미래를 생각하다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흉부외과의 정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 자신의 실력을 차근차근 갈고 닦는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나중 문제다.
"으랏차차."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회의실을 나왔다.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강하나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입에 파리 들어가요."
"어머! 깜짝이야."
강하나가 몸을 들썩거리며 최기석을 흘려보았다.
"놀랐잖아요. 그리고 숙녀의 하품을 몰래 훔쳐보다니 실례예요."
"그런가요?"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강하나를 응시했다.
평소와 달리 기분이 묘했다.
무협소설로 따지면 허허실실 웃고 지내던 동네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절세고수였다는 설정 아닌가.
그녀가 흉부외과 에이스 수술실 간호사였다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그냥요. 혹시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설마 이 야밤에 절 혼자 불러내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렇고 그런 짓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초 레지 쌤이 생각하는 그거요."
"전 쌔쌔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기석이 농담을 받아 주자 강하나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인영아. 나 최 쌤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네."
최기석은 강하나와 함께 회의실을 찾았다. 그리고 몰래 숨겨 둔 원두커피를 내렸다.
"우와. 커피 향이 은은하고 고급스럽네요."
"이거 과장님만 먹는 원두커피거든요."
최기석은 원두커피 봉지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과장님 커피를 마음대로 마셔도 돼요?"
"어쩌다 한 번은 괜찮잖아요. 이렇게 숨겨 놓고 몰래 타 먹는 것도 괘심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바로 이겁니다."
탁!
최기석은 강하나의 앞과 자신의 앞에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우리 둘이 공범이라는 거죠."
"히이잉. 낚였어."
강하나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범. 할게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강 쌤. 예전에는 실력 있는 소독간호사였다면서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면 그 어떤 의사도 저는 터치 안 했어요."
"저한테는 왜 말 안 했어요?"
"안 물어봤으니까요."
강하나의 돌직구에 말문이 막혔다.
"근데 그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어요?"
"장 교수님이요."
"설마 장 교수님이 나를 좋아하나?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닌데."
강하나가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커피를 마셨다.
"수술실은 왜 그만뒀어요?"
"……말하자면 복잡한데…… 사실은요."
"……."
"예전에 한 번 사고가 났어요. 수술 도구를 잘못 건넨 상태에서 집도의가 개흉을 하는데 피가 분수처럼 터져서."
강하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분위기.
최기석은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밝은 성격의 그녀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음을 까맣게 잊었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강하나를 안정시키면서 마음을 정했다.
그녀를 다시 수술실에 보내지 않겠다고, 세이버 팀에 합류시키지 않겠다고.
강하나의 옛 아픔을 다시 끄집어내는 걸 원치 않았다.
"최 쌤. 사실은……."
"……."
"뻥이야!"
강하나가 고개를 치켜들며 혀를 내밀었고 최기석은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의료사고 같은 건 없어요. 저 그렇게 실력 없는 간호사 아니거든요."
"뭐예요. 놀랐잖아요!"
"잠이 확 달아나죠?"
강하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일이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흉부외과는 수술 시간이 긴데다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이것저것 카운팅 할 것도 많고. 거기다 애써 수술하는 환자가 테이블 데스라도 하면 그것만큼 허무한 게 없어요."
"그 맘 알죠."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든 처치와 관련 스태프든, 흉부외과에 지원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불행한 것은 일을 하면서 생기는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 그것을 벗어나는 길이 일을 그만두는 것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강 선생님."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건 그것 때문이에요. 조만간 장 교수님을 중심으로 세이버 수술 팀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소독간호사를 강 선생님이 맡아 줬으면 좋겠어요."
"……."
"수술실이 힘들어서 병동에 왔다는 말을 듣고 난 후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제가 야박하게 느껴질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우리 팀에는 강 선생님이 필요해요."
최기석은 말을 마치고 강하나를 응시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었다.
"다른 사람을 추천하면…… 안 돼요?"
"강 선생님이 아니면 안 돼요."
최기석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강 선생님이 하는 거지만 꼭 강 선생님과 일하고 싶어요."
"하아……."
강하나가 한숨을 쉬자 커피의 뜨거운 김이 바람 위 등불처럼 흔들렸다.
고요함이 더욱 깊어졌다.
"칫. 최 쌤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잖아요."
"그 말뜻은……."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소독간호사."
"고마워요!"
최기석은 감격에 겨워 강하나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역시 강 쌤밖에 없어요."
"알면 됐어요."
망아지처럼 날뛰는 최기석, 그를 보는 강하나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망설였던 것은 처음뿐.
애초에 최기석이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트럭이 덮쳐올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그의 모습이 말이다.
생명의 은인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조금 두려운 것은 그와 함께 생활하면 애써 접어 뒀던 마음이 흔들리는 것뿐.
지이이이잉.
얄궂게 콜폰이 울렸다.
최기석은 응급실 인턴과 통화를 하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강 쌤. 미안해요. 저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저도 일어날 생각이었어요."
최기석은 강하나와 회의실을 떠난 후 곧바로 응급실을 향했다.
"이분이에요?"
응급실에 도착해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50대 여성으로 환자 감시 장치가 연결되었으며 경추 골절기를 착용하고 의식이 없었다.
"네. 방금 들어온 T.
A(교통사고)입니다. 기본적인 처치는 끝냈는데 아무래도 혈흉이 의심돼서……."
인턴의 말을 듣고 환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2/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 사지통증
아픈 부위: 가슴 / 팔 다리
진단명: 혈흉 / 다발성 골절 / 급성 호흡부전증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최기석은 추가로 검사 결과를 살폈다.
동맥혈 산소분압과 흡입산소 비율이 250 이하이며, 엑스레이 상에서도 폐가 침윤된 흔적이 보였다.
혈흉과 급성 호흡부전증이 같이 온 것이다.
"선생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곁에 있던 보호자 김용민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살 수는 있는 거겠죠?"
"일단 처치하고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보호자를 안심시키고 말을 이었다.
"우선 기관지 확장 주사랑 흉관삽관 세트 챙겨 와요."
"네!"
인턴이 자리를 비운 사이 최기석은 후두경을 챙겨서 기관삽관에 나섰다.
우선 환자의 턱을 당겨서 기도를 개방시킨 다음, 후두경을 쥐고 성대가 보일 때까지 밀어 넣었다. 이후 후두경으로 성대를 보면서 튜브를 천천히 삽입한 후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드르르륵.
"다 챙겨 왔습니다."
인턴이 드레싱 카트를 밀며 그의 옆에 섰다.
카트 위에 흉강천자 세트와 정맥주사가 고이 놓여 있었다.
"저기, 선생님."
"왜요?"
"주제넘은 말이라는 건 알지만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인턴 이동준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흉관삽관은 레지 2년 차가 되어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술기다. 이제 막 백일 당직을 시작한 최기석이 혼자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심지어 환자가 위독하지 않은가.
"이봐요! 인턴 선생이 알면 뭘 압니까?"
보호자 김용민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치료 시기를 놓쳐서 이 사람이 죽으면 인턴 선생이 책임질 겁니까?"
"……."
"책임질 거냐고요?"
김용민의 대거리에 이동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최기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용민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껏 지켜본 보호자와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까.
"선생님. 이 사람 빨리 치료해 주세요. 아무렴 최 선생님도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인데 실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용민이 최기석의 명찰을 보고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보호자분. 진정하세요."
최기석은 김용민을 달래고 IV(정맥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수술용 장갑을 착용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포비돈 용액으로 처치할 부분을 소독한 후 구멍이 뚫린 멸균포로 덮었다.
"리도카인."
"준비했습니다."
최기석은 갈비뼈 상단 부위에 마취주사를 놓고 흉강천자를 준비했다. 흉관삽입에 앞서서 피가 고인 위치와 흡입물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푸우우욱.
주사기가 피부를 꿰뚫었다.
주사기 몸통을 당기자 피가 딸려 왔다.
흉강천자는 무사히 끝났다.
남은 것은 본 게임뿐.
최기석이 메스를 들자 김용민과 이동준이 숨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 은빛 날카로운 메스는 항상 사람을 긴장시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아아악.
메스가 지나가자 환자의 피부가 종이장처럼 갈라졌다.
"뭐해요? 켈리."
"아. 죄송합니다."
최기석의 외침에 이동준이 지혈겸자를 건넸다.
최기석은 지혈겸자로 늑골 간 근육을 서서히 떼어냈다.
이후 켈리를 제거하고 절개된 피부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흉막의 감촉이 손가락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푸우우우욱!
과감하게 튜브를 흉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흉관삽관술에 성공하셨습니다!]
[처치 보상으로 100 P.
P를 지급합니다. 환자 바라기(+4)의 활력 효과로 체력을 소량 회복합니다.]
콸콸콸콸!
알림과 더불어 새빨간 피가 튜브를 타고 배액병으로 쏟아졌다. 최기석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흉관삽입한 부위를 고정시켰다.
'아직인가?'
환자를 살피던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처치를 마쳤음에도 환자의 상태는 여전히 응급이다.
"현재로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지금부터는 환자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
"보호자분. 제 말 듣고 계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김용민이 한 박자 늦은 반응을 보였다.
"환자 상태 잘 체크하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콜 해요."
"네."
최기석은 다시 당직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세 시간 후 콜폰이 울리고 이동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응급실인데요. 삽관한 환자 PaO2(동맥혈압의 산소분압)이 계속 떨어지는데요?]
"바로 내려갈게요."
최기석은 전화를 끊고 황급히 응급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생각이 복잡했다.
처치는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왜 환자는 호전되지 않을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환자 감시 장치부터 살폈다.
'이런!'
이동준의 말대로 PaO2(동맥혈압의 산소분압)이 60mmHg 이하다. 산소마스크를 통해 기계적인 환기를 하고 있음에도 저산소혈증을 앓는 것이다.
처음 겪는 케이스라서 곤혹스러웠다.
'항생제를 써야 하나? 아니지. 감염이 된 거라면 아까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봤을 때 폐렴 같은 질병이 떴어야 되는데.'
최기석은 다시 능력을 사용해 환자를 살폈다.
상태는 여전히 응급이고 진단명에 저산소혈증이 추가됐다.
그동안 오히려 상태가 악화된 셈이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한 쌍의 남녀가 다가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런데 혹시 환자분과의 관계가……."
"제가 큰 아들이고 얘가 둘째 딸입니다."
박진표가 환자와의 관계를 밝히며 곁에 있는 여동생 박지민을 소개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런데 잠깐 바깥에 나갈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응급실 바깥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 제발 우리 어머니 좀 살려 주세요.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란 말이에요!"
박지민이 울분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