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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92화 (92/407)

결정 (1)

"그건…… 비밀입니다."

최기석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윤지혜가 맥이 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잔뜩 분위기 잡아 놓고 너무해."

"죄송해요. 제안을 한 교수님께 이야기 드리고 바로 윤 교수님께 알려 드릴게요."

"알았어. 정리 끝내고 같이 내려가자."

윤지혜가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고 최기석은 그런 윤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낮에 박순재에게 들었다.

그녀가 고아였으며 입양을 받은 후에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떠올리고 윤지혜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를 보는 시점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윤지혜가 차갑고 쌀쌀맞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쓸쓸하고 아픔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겨울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버티는 고목 같다고 할까.

진성대 시절의 그도 어쩌면 그녀처럼 변했을지 모른다.

그저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성격이 바뀌었을 뿐…….

"뭘 그렇게 쳐다 봐?"

"아…… 아닙니다. 정리 끝나셨으면 내려가실래요?"

"그래."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왔다.

그런데 윤지혜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다가 휙 방향을 꺾어 계단 쪽으로 향했다.

"교수님?"

"아…… 미안. 습관이라서."

최기석은 그녀가 폐소 공포증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고집하지 않고 그녀 곁에 섰다.

"평소에도 계단 쓰시죠?"

"웬만하면. 근데 오늘은 괜찮아."

"무리하지 마세요. 그리고 사실 저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좋아해요. 건강에 좋잖아요."

"그런 게 아니야."

윤지혜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네가 있으니까."

"네? 안 들려요."

"……그냥 엘리베이터 타자고."

윤지혜가 최기석의 가운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별 탈 없이 1층으로 내려왔다.

"쉴 때는 보통 뭐하세요?"

"딱히…… 자거나 음악 듣거나, 가끔 TV 보고."

"애니메이션은 안 보시고요?"

최기석의 지적에 윤지혜가 몸을 들썩거렸다.

뜨끔한 게 있는 모양이다.

"아…… 안 봐. 그런 거. 하여간 난 갈 테니까 당직 잘 서."

윤지혜가 작별 인사를 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최기석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윤지혜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정설화가 전화를 걸었다.

하루 종일 전화를 안 받다가 이제야 연락을 한 것이다.

"설화야. 힘든 일 있었어?"

통화가 연결된 후 최기석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 순환기내과에 내려갔을 때 정설화가 보였던 눈물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 걱정해 줬는데 연락도 못 해서.]

"내 걱정은 하지 마. 지금 중요한 건 너야."

[괜찮으면 아지트에서 볼래?]

"바로 갈게."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한 달음에 아지트로 향했다.

정설화는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화야."

"기석아. 미안."

"바보같이 그런 말 하지 마. 그거 말고 오늘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말해 줘."

"응……."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정설화의 설명이 이어졌다.

순환기내과에 들어온 후 정설화는 레지 3년 차 여선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군기를 잡거나 실수를 지적하는 거라면 넘어갔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꼬투리를 잡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것도 다른 스태프들 몰래 불러 내서 괴롭히는 바람에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레지 3년 차면 양보미 선배 아니야?"

"……맞아."

"왜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래?"

"나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오늘 낮에 겨우 알았어."

정설화가 말을 계속했다.

양보미가 정설화를 괴롭힌 이유.

그것은 양보미가 좋아하는 치프 송정훈이 정설화에게 잘해 주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질투심으로 정설화를 괴롭혔던 것이다.

"아니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양 선배는 아닌가 봐."

"으음…… 어떤 방식으로 갚아 주지? 이자까지 잔뜩 쳐서 말이야."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설화가 눈물을 흘렸으니 양보미는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

"이제 괜찮아."

"이런 건 가만두면 안 돼.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지."

"내가 대충 해결했어."

정설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어떻게?"

"일단 치프한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돌려서 말했어. 양 선배한테도 똑같이 이야기했고."

"그러니까 뭐래?"

"치프는 알았다고 했고 양 선배는 입이 찢어져라 웃더라. 그 다음부터는 꼬투리도 안 잡고."

"속 보인다, 속 보여.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옹졸하냐?"

최기석은 혀를 찼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하는 행동은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일이 잘 풀려서."

그는 한쪽 팔로 정설화의 허리를 감아 자신의 몸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

"대신 앞으로는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 어쩌면 고생을 덜 했을지 모르잖아."

"그치만 너는 100일 당직 때문에 힘들잖아. 나까지 짐이 되기는 싫어."

"네가 왜 짐이야.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짐이 있나?"

정설화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자 그녀가 볼을 붉혔다.

"나도 힘든 일 있으면 말할 테니까. 앞으로 설화 너도 꼭 그래야 된다?"

"응."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석은 그녀의 체온을 느끼면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직업 및 전공: 레지던트/순환기내과

체력: 2/11

진단력: 5.5/10

외과적 처치: 2/10

내과적 처치: 4/10

평판: 4

액티브 스킬: 없음

패시브 스킬

[따스한 손길 Lv.3]

- 처치한 환자의 상처 회복력과 질병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높을수록 더 많은 수치가 증가하며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 최대 3단계까지 성장합니다.

정설화는 예전에 비해 내과적 처치가 2단계 뛰어올랐으며 진단력이 1.5가 올랐다.

그가 성장하는 동안 그녀 역시 착실하게 성장 중이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체력.

역환단으로 체력 재생 룬을 가졌음에도 체력이 바닥을 쳤다.

그동안 괴롭힘을 당해서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녀를 일찍 챙겨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요즘 피곤하지?"

"피곤한 거야 나보다 네가 더하잖아."

"난 쌩쌩하니까 걱정 말고. 가만히 있어 봐. 마사지해 줄게."

최기석은 정설화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처음에는 괜찮다며 빼던 그녀지만 정작 마사지가 시작되자 아저씨 소리를 내며 그의 손길을 즐겼다.

"아직 먼 이야기지만, 나 100일 당직 끝나면 뭐할까? 같이 하고 싶은 거 없어?"

"안 그래도 생각해 둔 거 있어."

정설화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말만 해. 다 들어줄게."

"정말이지? 나 기억해 둔다?"

"암. 그렇고말고. 그동안 쌓였던 거 한 번에 확 풀어 버리자."

최기석은 마사지를 끝내고 정설화를 응시했다.

"이젠 내가 주물러 줄…… 아 참. 그걸 잊었네."

정설화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최기석을 응시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응? 무슨 말?"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잘 생각해 봐. 오늘 아주 중요한 걸 놓쳤단 말이야."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냉랭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최기석은 전전긍긍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게…… 잘 모르겠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응. 잘못했어. 그것도 엄청나게."

"뭔지 말해 주면 안 될까?"

"오늘 아침에서 협진 요청했던 협.

심.

증. 환.

자."

정설화가 강조하듯 한 마디 한 마디 끊었다.

"그 환자 왜?"

"그 환자 내가 주치의란 말이야. 윤 선배한테 당하는 중이라 나 대신 유 선배가 봤잖아."

"아…… 맞다. 그랬지."

"아. 맞다?"

정설화가 찌릿한 눈빛을 쏘며 말했다.

"유 선배가 나한테 그러던데? 네가 교수님한테 이야기해서 오늘 안에 전원시키기로 했다고 말이야. 근데 왜 아직까지 전원 안 됐어?"

"……."

"실망이야. 우리 둘이 처음으로 같이 보게 된 환자인데. 신경도 안 쓰고."

"미안. 오늘 너무 바빠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뭐 때문에 순환기내과에 들어갔는데."

"가…… 갑자기 가슴이……."

최기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정설화는 놀란 표정으로 진찰을 준비했다.

"가슴이 어떻게 아파? 콕콕 찌르는 것 같아?"

"아니. 답답하고 숨 쉬기 힘들어. 아무래도…… 상사병인가 봐."

"상사병?"

"난 설화 네가 곁에 있어도 네가 그립거든."

정설화는 최기석의 농담을 뒤늦게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바보! 놀랐잖아."

"그치만 나도 네 환자란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치겠다고."

"아우!"

최기석의 오글거리는 멘트에 정설화는 몸을 배배 꼬았다. 하지만 말과 달리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진짜 아프단 말이야. 어떻게 해 줄 건데?"

"이렇게."

정설화는 얼굴을 붉힌 채 최기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송명진이 보내 준 논문을 읽고 당직실을 떠났다.

아지트에 도착하자 오늘도 어김없이 문 앞에 스티로폼 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박스 상단에 편지봉투 같은 것이 붙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뜯어서 확인했다.

[오늘은 특별히 새끼 양 심장을 보냈어요. 그동안 수술했던 소 심장보다는 작을 거예요. 이건 내가 구하기 힘든 거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못 보내요.]

최기석은 정육점 아저씨의 메모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준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휴대폰으로 감사 문자를 보낸 후 박스를 챙겨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번개처럼 집도 준비를 하고 새끼 양 심장을 시트 위에 올려놓았다.

소아심장만큼 작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습에 도움이 될 수준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메스를 들고 새끼 양 심장의 일부를 훼손 시켰다.

오늘 집도할 팔로 4징증에 최대한 가까운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전기 소작기로 지져서 우심실을 협착시키고 심실중격을 훼손하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최기석은 눈을 빛내며 집도에 들어갔다.

실전에 가까운 팔로 4징증 수술, 반드시 무사히 끝내리라.

스으으으윽.

메스로 우심방과 우심실을 조심스럽게 절제했다. 이후 좌심실과 우심실 사이에 생긴 구멍에 패치를 덧대고 봉합사로 봉합해 갔다.

'으, 어렵다.'

수술이 진행될수록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 심장으로 집도할 때와 새끼 양 심장으로 집도할 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손놀림이 훨씬 정교해야 했다.

집도 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이런!"

협착이 된 우심실을 절개하고 봉합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혈관을 건드렸다.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피.

치이이이익!

우선 석썬기로 피를 빨아들이고 전기 소작기로 출혈 부위를 지졌다.

간신히 출혈이 멈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이이잉.

야속하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병동으로 올라갈 시간이 된 것이다.

아직 수술은 반에 반도 끝내지 못했건만…….

최기석은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실감하며 뒷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병동으로 올라가던 중 상태창을 띄웠다.

3단계까지 강화가 된 환자 바라기와 얼마 전 얻은 유니크 젬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강화부터 해 볼까?'

최기석은 손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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