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야화 그 두 번째 (5)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으십니다."
최기석은 검사지를 훑으며 말했다.
"부협회장님은 QRS파의 complex가 커졌으며 T wave inversion이 나타났습니다. 전형적인 좌심실비대 소견입니다. 대동맥판막 부전으로 혈류가 역류하고 이것이 좌심실에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어디 볼까요?"
박순재가 최기석이 내민 검사지를 훑었다.
무덤덤하던 표정에 미세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 선생."
"……."
"장 지지겠다는 말은 농담인 거 알죠?"
박순재가 껄껄 웃으며 농담을 던졌고 최기석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단해요. 1년 차에 심전도를 이렇게까지 볼 줄이야."
박순재는 진심을 드러냈다.
지금 시점의 레지 1년 차라면 잡무와 100일 당직만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언제 이만한 판독능력을 갖췄던 말인가.
"일찍부터 흉부외과를 생각해서 인턴 때부터 공부해 왔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 심전도는 심장진료에 처음과 끝이라는 말씀을 하셔서요."
"인턴 때 지도교수가 있다고요?"
"송 교수님이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 송 교수라면 그럴 수 있겠네요."
박순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이름은 마치 마법과 같았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 누구나 자신의 실력을 수긍하고 넘어갔다.
송명진의 명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송 교수가 메이죠로 갔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런 인재를 놓치다니, 우리나라 의료계도 갈 때까지 갔지."
박순재의 씁쓸한 중얼거림이 병실에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박순제가 운을 뗐다.
"그건 그렇고 윤 교수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네?"
뜻밖의 질문에 최기석이 몸을 들썩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요. 말 그대로 무슨 관계냐고?"
"……실력 좋은 교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럼 윤 교수가 짝사랑을 하는 건가?"
"무…… 무슨 말씀을……."
"아까 장혁필 교수랑 이야기하면서 다 들었어요. 윤 교수가 의진대병원에서 여전히 겉돌고 있다고."
박순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때 윤 교수가 최 선생한테는 마음을 연 것 같군요."
"……."
"윤 교수는 말이에요. 마음을 놓은 상대가 아니면 웃지도 않고 장난도 치지 않아요. 낮에 왔을 때 윤 교수가 최 선생을 꼬집은 것도 봤습니다."
"아, 네."
박순재는 편한 옆집 할아버지 같았지만 눈치가 빨랐다.
괜히 한국흉부외과협회의 부회장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정치력을 살피자 수치가 6.5다.
조지환보다는 조금 낮은, 장혁필과는 비슷한 수치다.
"윤 교수한테 잘해 주세요. 겉은 세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여린 친구니까."
박순재는 윤지혜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윤 교수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장 교수랑 최 선생밖에 없어요. 장 교수야 워낙 야심이 많아서 윤 교수를 챙길 여력이 없을 테고 그러면 남은 사람은 최 선생뿐이죠."
"부협회장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뭔가요?"
"백진대병원 시절에 윤 교수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백진대 시절이라……."
박순재가 중얼거리며 턱을 쓸어내렸다.
"치프 때까지만 해도 밝은 친구였어요. 모든 스태프들이 윤 교수를 백진대 흉부외과의 꽃이라고 생각했죠."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던 윤지혜가 펠로우 1년 차에 접어들 무렵, 큰 사고가 벌어졌다. 흉부외과 1년 선배이자 연인 차지용과 데이트를 하던 중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사고로 차지용은 죽고 윤지혜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윤지혜는 성격이 180도로 변했다. 미소는 사라지고 말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건 최 선생만 알아 둬요."
박순재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윤 교수. 고아예요."
"……."
"초등학교 때 간신히 입양이 됐는데 입양한 부모가 윤 선생을 많이 괴롭힌 모양이에요. 두 번 버림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아…….'
최기석은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박순재의 말을 듣자 회식 자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윤지혜는 혼자 술자리를 빠져나가 떠돌이 개에게 음식을 먹였다.
[버림받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이야. 그치?]
당시했던 그녀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늙은이가 무슨 주책이람……."
박순재가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한 이야기는 그냥 잊어버려요."
"……."
"나는 그저 윤 교수가 힘들어 할 때 최 선생이 힘이 되어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에요. 알았죠?"
"네.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박순재와 대화를 마무리 짓고 VIP실을 나왔다.
윤지혜의 과거를 듣고 나서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 역시 고아였으며 세상의 풍파를 힘겹게 이겨 왔기에.
지이이이잉.
가운 속에 콜폰이 울렸다.
정설화의 연락이기를 기대했건만 응급실 콜이다.
[기석아, 응급실로 와. 응급이다!]
김건우의 외침에 귀가 따가웠다.
* * *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김건우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의술의 신이 돕는지 환자가 많이 없었다. 그나마 받은 환자들도 경증이라서 간단히 약 처방만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 풀어."
김건우는 바짝 얼어 있는 인턴 진용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모습에 일 년 전 자신의 모습이 겹쳤다.
그도 인턴 첫 근무가 응급실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서 응급의학과를 전공으로 택하고 인턴들을 맞게 되었다.
"아, 네."
"응급실 근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사실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잖아."
"……."
"환자들 이야기 잘 듣고 교통정리만 한다고 생각해. 알았지?"
"알겠습니다."
"나가서 커피나 한잔하자."
김건우는 진용태를 데리고 응급실 바깥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그런데 때마침 구급차가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최기석과 어울리면서 환타 기질이 옮은 것 같았다.
"선생님. 응급환자입니다. 먼저 봐 주세요!"
조수석에 있던 구급대원이 허겁지겁 내려서 트렁크를 열고 스트레쳐카에 누운 환자를 내렸다.
"……."
김건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앳된 여자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하면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뿐 아니라 환자의 옷, 여기저기에 토사물이 묻어 있었다.
음독 환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선생님. 우리 지애 좀 살려 주세요."
보호자가 구급차에서 내려 하소연을 시작했다.
"가자."
"네!"
김건우는 진용태와 함께 스트레쳐카를 끌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이후 환자를 병원 침상으로 옮긴 후 번개처럼 환자 감시 장치를 달았다.
바이탈이 바닥을 쳤는데 그중에서 호흡이 가장 위태로웠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서…… 선배. 어떻게 하죠?"
진용태가 환자와 김건우를 번갈아 응시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다.
"우선 기관삽관하고 호흡기 달아. 그 다음 하트만."
김건우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음독 환자의 처치는 일반 응급환자의 처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환자가 자발순환을 할 수 있도록 안정화시킨 후에 음독에 관련된 처치를 해야 한다.
"선생님. 제발 우리 지애 살려 주세요."
접수를 마친 보호자가 침상으로 다가왔다.
"침착하시고 제가 묻는 말에 답해 주세요. 따님이 뭘 마시고 쓰러졌는지 아십니까?"
"……락스요. 하…… 한 통을 다 마신 것 같아요."
보호자의 말에 골치가 아팠다.
음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락스는 알칼리성을 띄는데 알칼리성 물질은 산성 물질보다 더 오랫동안 조직에 머물러 손상을 장기화시킨다.
김건우는 보호자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하고서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빠른 조치로 바이탈이 차차 정상치로 돌아오는 중이다.
"선생님. 우리 아이 위세척이라도 해주세요."
보호자가 환자를 보며 말했다.
"안 됩니다. 알칼리성 독극물질을 먹었을 때 위세척은 금기입니다."
"그럼 이렇게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건가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김건우는 토사물과 락스가 묻은 환자의 옷을 정리하며 추가처치를 고민했다.
"바이탈은 어느 정도 돌아왔으니까 이제 검사하자. 흉부 엑스레이하고 피 검사, 소변 검사, 식도 검사까지."
"네!"
김건우의 지시에 진용태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검사 결과가 하나둘 모니터에 떠올랐다.
김건우는 검사 결과를 살피고서 최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석아, 응급실로 와. 응급이다!]
"바로 갈게."
최기석은 별다른 말 없이 통화를 끊었고 김건우는 다시 환자의 곁에 섰다.
락스를 한 통 다 마신 박지애.
문득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는지 궁금했다.
"무슨 일인데?"
최기석이 허겁지겁 달려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환자 락스 한 통을 거의 다 마셨대. 바이탈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검사해 보니까 식도협착이다."
"식도협착?"
최기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히포크라테의 눈으로 살핀 결과 환자는 식도협착을 앓고 있을 뿐 아니라 천공(구멍이 뚫린 상태)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하다.
'어쩐다?'
최기석은 눈썹을 찌푸리며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폐식도 질환은 흉부외과의 영역이기에 그가 처리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병원에 폐식도 관련 처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하는 수 없이 박용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교수님. 노티 드리고 싶은 환자가 있습니다."
[말해 봐요.]
그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자 박용일이 침음성을 흘렸다.
[당장 수술 준비해. 별관에 있으니까 금방 도착한다.]
"네."
통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용일이 수술을 할 수 없었다면 환자를 전원시켜야 했을 것이고 상태도 더욱 나빠졌으리라.
최기석은 이어서 민주혁과 한민우에게 연락했다.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직 이영호만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응급실로 왔다.
"너희 둘뿐이야?"
응급실에 도착한 박용일이 얼굴을 구겼다.
"3년 차와 치프에게 연락 했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 셋이서 간다."
"네!"
최기석와 이영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세 사람은 그길로 수술실을 찾았다. 이후 스크럽을 하고서 C 로젯으로 들어갔다.
[살려야 한다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얼어붙은 심장, 혹한 효과가 동료들에게 발동됩니다. 동료들의 감정동요가 줄어들며 돌발 상황으로 인해 능력치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격려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면역력, 저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멘토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영호에게 특수효과 끈기가 부여됩니다.]
[끈기: 긴 시간의 처치에도 집중력과 체력 감소량이 대폭 줄어듭니다.]
능력을 사용하자 알림이 쉴 틈 없이 울렸다.
최기석은 제1보조 자리에 서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음독을 시도한 이지애, 그녀의 아픔이 무엇인지 그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가 수술대에서 죽는다면 그 아픔이 무엇인지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죽음에 그 또한 아픔에 시달릴 거라는 것이다.
"올라오면서 말했지만 진행할 수술은 식도절제술과 식도재건술이다. 사망률이 20퍼센트가 넘는 수술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
"네!"
"특히 기석이 너, 너는 제1보조라는 거 명심해."
"알겠습니다."
박용일의 당부가 끝나자 마취의가 전신마취를 시도했다.
최기석은 환자를 옆으로 눕힌 후 환부를 넓게 소독하고 방포로 덮었다.
이로써 수술 준비는 모두 끝났다.
"메스."
박용일이 메스를 건네받아 환자의 가슴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