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89화 (89/407)

백일야화 그 두 번째 (4)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 휴대폰으로 입원환자 명단을 살폈다.

과연 그의 앞으로 배정된 환자가 한 명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박순재.

나이는 오십 대 후반으로 병명은 대동맥판막 폐쇄부전증이다.

'피곤하네.'

최기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EMR(전자의무기록)상의 특수 메모에는 환자가 한국흉부외과협회 부회장이라는 정보가 떠 있었다.

하필이면 환자가 끗발 좋은 흉부외과 의사라니…….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조지환이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V.

I.

P를 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찰싹!

두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마음먹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신관 옥상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입구에 있던 보안 요원이 최기석의 명찰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V.

I.

P 층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VIP 라운지는 일반 병동과 외관부터가 달랐다. 인테리어는 정갈하고 우아했으며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도 왠지 모를 기품을 풍겼다.

하루 입원료가 최소 80만 원에서 200만 원가량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왔어?"

스테이션 근처 소파에 앉아 있던 윤지혜가 다가왔다.

"환자 정보는 확인했고."

"네!"

오는 중에 확인한 병명과 검사 결과를 읊자 윤지혜가 미소를 지었다.

"환자가 네 앞으로 떨어졌지만 사실상 주치의는 나라는 걸 잊지 마. 알았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고 중급 병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안에 들어가자 박순재가 바깥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뒤로 돌아 두 사람을 응시했다.

박순재는 동네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을 풍겼다.

가닥가닥 흰머리가 보였고 이마와 눈 옆으로는 보기 좋은 주름이 졌다. 무엇보다 은은하게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부담스럽게 인사하지 말고 어서 앉아."

박순재가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고 정 떨어지게 계속 부회장님이라고 부를 거야?"

"그럼……."

"편하게 교수님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순재는 과거 백진대 흉부외과에 있었던 시절 그녀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백진대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하곤 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아. 역시 세월은 못 이기나 봐."

박순재가 눈썹을 찡그리며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대동맥판막 폐쇄부전증을 앓으면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흉통,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온다.

"그건 그렇고 의진대병원은 다닐 만해?"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뭐. 장 교수가 같이 왔으니까 마음은 놓인다만…… 윤 선생이 워낙 괴짜라야지."

박순재가 최기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때? 윤 교수 잘 지내고 있나?"

"……."

최기석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기준으로 보면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의국에 온 지 10개월이 다 된 시점임에도 다른 스태프와 교류가 전혀 없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최기석이 침묵을 지키자 윤지혜가 손을 몰래 뒤로 빼서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매운 손맛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흐흡…… 죄송합니다. 재채기가 날 것 같아서."

최기석은 아픔을 연기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윤 교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새는 원래부터 의진대 스태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래요?"

최기석의 대답에 박순재가 껄껄 웃었다.

"윤 교수,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

"……네."

"나랑 있었을 때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박순재와 윤지혜가 서로를 응시했다.

의미심장한 대화와 오고 가는 시선 속에서, 최기석은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윤지혜가 화제를 돌렸다.

"오는 길에 백진대병원에서 가져오신 검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좌심실로 역류하는 혈액량이 많아서 역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윤지혜의 말에 박순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현역으로 심장외과 과장으로 활동했다.

본인의 상태를 살피지 못할 만큼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다.

"암,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박순재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내 판막 수술. 윤 선생이 해 줬으면 좋겠어."

"지…… 진심이세요?"

"당연하지. 적어도 대동맥 관련 수술이라면 윤 교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잖아? 네가 뭣하러 백진대병원을 두고 의진대로 왔겠어."

"하지만 제가 어떻게 교수님을……."

윤지혜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본래 외과의는 지인이나 핏줄에게 수술하는 것을 꺼린다. 집도에 큰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힘들겠지만 부탁해."

"아무리 부탁하셔도 무리입니다. 대신 장 교수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허. 장 교수에게 수술받을 거였으면 애초에 의진대에 오지를 않았다니까."

박순재가 말을 계속했다.

"수술대 위에서는 누구나 평등해. 환자는 환자일 뿐이라고. 의사로서 성장하려면 이런 일도 극복해야지."

"……."

"윤 교수가 정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대답 기다리겠어. 가 봐."

박순재의 손짓에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먼저 갈게."

윤지혜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 병실을 돌았다.

주치의로서 일과가 끝나기 전 환자를 살피는 것은 필수다.

'다행이다.'

복도로 나와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병동은 조용할 테니 응급실만 괴롭히지 않으면 영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듯싶었다.

"선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조은지가 있었다.

"저기…… 죄송한데…… 심전도 판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줘 봐."

최기석은 조은지가 건넨 심전도를 꼼꼼하게 살폈다.

"PQ파 시간이 짧고 QRS시간이 긴 걸 보니까 WPW(심실조기흥분증후군)네."

"대박. 역시 선배가 최고예요."

조은지가 싱글벙글 웃었다.

최기석이 없었다면 순환기내과에 가서 따로 판독을 받아야 한다.

최기석 덕분에 할 일이 줄었다.

"1년 차인데도 어떻게 심전도를 이렇게 잘 보세요?"

"죽어라 공부했으니까."

최기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호한테도 말해 놔. 심전도 판독할 거 있으면 나한테 부탁하라고.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순환기내과 선생님들 눈치 볼 필요 없잖아?"

"네!"

최기석은 조은지와 헤어지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장난해? 병원이 놀이터야!"

민주혁이 흥분한 얼굴로 허공에 삿대질을 했으며 이영호를 고개를 숙인 채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어. 왔냐?"

"아. 네. 전 이만 나갈게요."

"아니야. 나랑 같이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 너, 앞으로 일 똑바로 해!"

민주혁은 한 번 더 주의를 주고 최기석과 회의실을 나왔다.

"영호가 또 사고 쳤어요?"

"ABGA 오더 내렸는데 완전히 쌩까고 있잖아."

"오더 언제 내리셨는데요?"

"한 십 분?"

민주혁의 목소리가 살짝 작아졌다.

"비위관 삽입 환자 때문에 그러세요?"

인턴은 잡일이 많아서 바로바로 오더를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 처치를 십 분 안에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것은 꼬투리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따 하자."

민주혁이 대답을 회피했고 최기석도 그 부분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병원 인근 국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요새 바쁘죠?"

"말도 마. 눈은 뻑뻑하지, 손목은 욱신거리지 지옥이 따로 없다."

민주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일주일 전 권일수에게 논문정리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번 달 말일 의진대가 주최하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논문인데 자료가 무척 방대했다.

"그래도 잘 끝내면 권 교수님한테 눈도장 찍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죽어라 하고 있잖아."

"혹시 영호 혼낸 것도 그것 때문인가요?"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민주혁은 말없이 물을 한 컵을 단번에 들이켰다.

"사실 화풀이는 논문 때문이 아니라 치프 때문에 했지."

"치프요?"

"민우 선배. 치프 되니까 너무 변했어."

"왜요? 전 이상한 거 못 느끼겠는데."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선배랑 수술 어시스트 같이 들어간 적 있어? 아니면 맡은 환자 중에 폐식도 관련 중환자 있어?"

"아니요."

"그러니까 그렇지. 민 선배, 치프 되니까 잔소리 엄청 늘었어. 사사건건 시비를 못 걸어서 안 달 난 사람이 됐다고."

"전 아직 상상이 안 가요."

"상상할 필요 없어. 곧 현실로 만날 테니까."

민주혁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건가요?"

"변한 게 아니야.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 있었는데 이제야 드러났을 뿐이지."

"……."

"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말에 동의해. 그러니까 자리는 그저 그 사람의 본모습을 드러내도록 기회를 줄 뿐이라는 거지."

"선배가 본 치프의 본모습은 뭔데요?"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지 뭐."

최기석은 민주혁의 대답에 동의했다.

실제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본 한민우의 실력은 스태프 중에서 제일 떨어졌다. 그리고 항상 문제가 터지면 주변을 탓하곤 했다.

"뭐, 이해는 해. 그 사람의 유일한 생존 전략은 아랫사람을 까는 거밖에 없으니까. 네가 봐도 치프 혼자서 치고 올라갈 실력은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방 이모가 순대국과 모둠순대를 내왔다.

"그럼 선배의 본모습은 뭐에요?"

최기석이 순대를 하나 집어 먹고서 질문을 던졌다. 이에 민주혁은 순대 두 개를 한 번에 먹은 후 대답했다.

"이러면 알겠냐?"

* * *

그날 저녁 당직실.

최기석은 눈썹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설화가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침에 울었던 모습을 봐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불어났다.

"안 되겠다."

당직실을 벗어나 순환기내과 병동으로 향했다.

병동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정설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마주친 선생과 대화를 나눴는데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말뿐이었다.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그길로 별관을 찾았다.

박순재를 살피기 위함이다.

윤지혜는 시간이 남는 대로 박순재를 찾아가 상태를 보고하라고 했다.

똑. 똑. 똑.

병실에 도착해서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부협회장님."

최기석은 고개 숙여 박순재에게 인사했다.

박순재는 침대에 등받이에 기대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한 손에는 견과류가 담긴 비닐 팩이 들렸다.

"아까 왔는데 또 왔어요?"

박순재가 TV를 끄고 담담하게 최기석을 응시했다.

일부러 표정을 관리하는 건지, 그저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네. 부협회장님이 주무시기 전에 심전도를 한 번 더 찍어 보고 싶습니다."

"뭐, 주치의가 하자면 해야지."

"감사합니다."

박순재가 순순히 허락했기에 스테이션에서 포터블 심전도를 가져와 심전도를 촬영했다.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검사지를 내려다보았고, 박순재는 신기한 동물 보듯 그를 응시했다.

"최 선생은 연차가 어떻게 돼요?"

"올해가 1년 차입니다."

"1년 차가 심전도 본다고 뭘 알아요?"

박순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빨리 결과지를 내놓으라는 손짓했다.

"다른 레지던트는 몰라도 저는 압니다. 만약 제가 판독한 결과가 부협회장님이 판독한 결과와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허허, 참. 이렇게 당돌한 레지던트는 또 처음이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박순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최 선생 판독과 내 판독이 같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어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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