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야화 그 두 번째 (3)
띠링!
[세이버 팀에 합류하시겠습니까?]
[세이버 팀에 합류하면 다른 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팀 내 활동에 따라 다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파티 수락 시간 열흘이 지나면 파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안과 더불어 알림이 울렸다.
권일수 때와 같은 팀 합류 메시지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기석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장 교수님까지 저를 스태프로 삼으려고 하시는 이유를 말입니다. 저는 이제 레지던트 1년 차일 뿐인데……."
"레지던트 1년 차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실력이지."
"……."
"너도 수술 보조 서 봐서 알 텐데? 우리 과 스태프들의 솜씨는 썩 좋지 않아. 다른 대학병원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 그걸 지금까지 메우고 있었던 게 송 교수님이고."
최기석은 장혁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같은 대학병원 흉부외과라도 과거 레지 생활을 했던 진성대병원이 의진대보다 수준이 높았다.
"길게 보면 연차만 높고 실력 떨어지는 스태프를 쓰는 것보다 널 키우는 게 훨씬 이득이야. 넌 그동안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줬으니까."
"……."
"자, 이제 네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두 가지가 아니고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우드 아니면 세이버 팀에 들어가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게 의외다.
"당연하지. 어느 쪽에라도 안 갈 수 있잖아. 뭐 네가 그런 판단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최기석의 대답에 장혁필은 그저 웃었다.
"넌 실력 있는 의사가 되는 게 목표다. 이런 고난도 수술 팀에 합류한다는 건 큰 재산이 되지. 네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잖아?"
장혁필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100퍼센트 최기석을 꿰뚫어 본 말, 장혁필의 정치력이 높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질 수 없지.'
최기석은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젠 장혁필에게 끌려 다니지 않으리라.
"교수님 덕분에 제 가치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럼 제가 노우드 팀이 아니라 세이버 팀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주 맘에 드는 질문이야."
장혁필이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일단 네가 합류하면 난 너를 제2보조로 쓸 거다."
"그건 권 교수님과 같은 조건입니다."
"나도 알아. 말을 끝까지 들어 보라고. 하지만 나는 너를 제1보조로 올려놓을 생각도 하고 있다."
"……."
"라이브 시연이나 중요한 수술에서는 제2보조로 쓰겠지만 그 이외의 수술에는 널 유동적으로 제1보조로 쓰겠다는 말이다. 어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권 교수님도 이미 같은 말을 하셨으니까요."
최기석은 일부러 배짱을 부렸다.
사실 권일수는 제1보조를 시켜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장혁필이 알지는 못하리라.
"……."
달변을 구사하던 장혁필이 침묵을 지키자 침묵이 흘렀다.
최기석은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렸다. 상대가 교수라고해서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까.
문득 이런 식으로 심리전을 하는 게 정치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안을 하나 더 하지."
"……."
"네가 수술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마.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의 허용 범위 안에서 널 돕겠어."
"말씀이 추상적인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조만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은 꾸벅 인사를 하고 옥상을 벗어났다.
그가 떠나자 장혁필이 야경을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우가 되려는 곰이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아지트에서 수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의 수술은 팔로 4징증.
고난도 소아심장 수술이지만 그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보조가 없음에도 각종 수술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일부러 망가트린 심장을 복원시켜 갔다.
"휴우……."
수술을 끝낸 후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은 멀쩡했지만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수술이 반쪽짜리 수술이기 때문이다.
진짜 팔로 4징증 수술이라면 심장의 크기가 더 작아야 한다.
팔로 4징증 수술은 소아심장 수술이기에.
최기석은 뒷정리를 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정육점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송명진을 통해 연락처를 받았으며 가끔식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원래 일찍 깨는 거 알잖아요.]
"요새 장사는 좀 어떠세요?"
[뭐. 그럭저럭이에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러시군요. 저기 제가 부탁 한 가지만 드려도 될까요?]
[뭐든 말해 봐요. 안 되는 거 빼고는 다 들어줄 테니까.]
사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매일 소 심장을 보내 주고 계시잖아요. 혹시 이것보다 크기가 작은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요?"
[더 작은 심장이요?]
"네. 좀 더 정교한 수술을 연습해 보고 싶어서요."
[으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일단 찾아볼 테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수술이 끝나서 그런지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권일수와 장혁필이다.
심장 클리닉에 패권을 두고 경쟁을 펼치는 두 교수.
그들 모두에게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고 조만간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조건으로 따지면 세이버 팀에 들어가는 게 유리하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장혁필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말이다.
말로 한 약속은 언제 어떻게 어그러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계약서를 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기석은 생각을 정리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초 레지 쌤! 하이요."
강하나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최기석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최 쌤은 진짜 이상해요."
"뭐가요?"
"100일 당직한 지도 일주일이 넘었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쌩쌩해요?"
강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 쌤은 이때쯤부터 레지던트 데빌 찍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제가 원래 체력은 끝내주거든요."
"우와! 여자친구가 좋아하겠어요."
"……이젠 아재개그 말고 다른 쪽도 개척 중이에요?"
"제 전공은 원래 이쪽이에요."
강하나가 말을 마치고 피로회복제를 건넸고 최기석은 단번에 유리병을 비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강하나는 평소와 다른 느낌이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억지로 밝은 척하는 기분도 들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있으면 들어줄 거예요?"
"당연하죠. 제가 강 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칫. 말로만."
강하나는 삐친 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요…… 근무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갈까, 한잔할까 고민하던 중이에요."
"그게 고민이에요?"
뜻밖의 대답에 맥이 탁 불렸다.
"그럼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햄릿도 그랬다고요. 술이냐 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제가 아는 햄릿하고 강 쌤이 아는 햄릿은 다른 사람인가 보네요."
최기석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오프 아니에요? 그럼 마셔도 될 것 같은데."
"하긴 그렇겠죠? 근데 술 마실 사람이 없어요. 쟤들은 소주 한 잔도 못해요."
강하나가 옆에 앉은 고미영과 최혜진 간호사를 가리켰다.
"그럼 집에서 혼자 마셔야겠네요."
"재미없지만 그래야겠어요."
최기석의 대답에 강하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최 쌤. 나중에 시간 맞춰서 나랑 한잔할래요?"
"그래요."
"그럼 약속."
최기석은 강하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조은지가 황급하게 병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그래?"
"그…… 그게 사실은요. 나…… 남자 환자 소변줄을 꽂고 있었거든요."
조은지가 떠듬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젤을 바르고 튜브를 꽂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게 크고 단단해져서……."
뒷말을 흐렸지만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여자 의사가 손으로 물건을 만져 주니 환자가 자신도 모르게 발기했던 모양이다.
"처치는 이게 마지막이야?"
"……네."
"들어가서 컨퍼런스 준비해. 소변줄은 내가 꽂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조은지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황급하게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귀여웠다.
최기석은 폴리 세트를 새로 챙겨서 병실로 들어갔다.
"휴우…… 이제야 남자 선생님이 오셨네."
환자 박병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 선생님 앞에서 바지를 까려니까 불편해 죽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통제가 잘 안 되고."
"자연스러운 겁니다."
최기석은 박병필을 다독이며 소변줄 삽입에 나섰다.
조은지 때와 다르게 얌전해진 물건, 폴리 카테터 삽입은 번개처럼 끝났다.
처치 세트를 정리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 * *
오전 회의와 컨퍼런스가 끝났다.
최기석은 급하게 변동된 수술 스케줄을 정리하고 순환기내과로 내려갔다.
흉부외과로 협진이 난 환자가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순환기내과 병동을 이리저리 훑었지만 정설화가 보이지 않았다.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나 제세동기 처치를 보조하러 간 모양이다.
그는 병동을 살피다가 의국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배."
"왔어?"
의국실에 혼자 있는 유성진이 인사를 받았다.
유성진은 순환기내과 레지 2년 차로 의진대 선배다.
"의뢰하신 환자는 어디 있어요?"
"조금만 일찍 오지. 방금 막 심초음파 찍으러 갔는데."
유성진이 협진 환자의 차트를 띄어놓았다.
"협심증 환자인데 좌심실 기능이 계속 떨어진다. 약물로 컨트롤이 잘 안 되네. 원래는 이번 주 중으로 PCI 할 생각이었는데 힘들 것 같아."
"검사를 살펴봐도 될까요?"
"그래."
최기석은 심전도와 운동부하검사 등을 확인했다.
집중적으로 약물치료를 했음에도 환자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좁아진 관상동맥의 수도 많았고 협착의 정도도 심각한 수준이다.
"선배. 이 환자 아무래도 CABG(관상동맥 우회술)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이유는?"
"이 정도 협착이면 PCI 해도 스텐트가 안 펴질 거예요. 혈관이 망가질 수도 있고요."
"제법인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유성진이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주혁이보다 100배는 낫네. 주혁이 새끼 레지 1년 차 때 어리바리했던 거 생각하면 어휴……."
유성진이 뜬금없이 민주혁을 디스했고 최기석은 민주혁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일단 CABG 수술하는 윤 교수님께 말씀드리고 전화드릴게요. 그때 전과하겠습니다."
"오케이."
유성진과 대화를 끝내고 의국실을 나왔다.
드르르륵.
타이밍 좋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정설화가 바깥으로 나왔다.
"설화야."
반가운 마음에 정설화에게 다가가는데 정설화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닌데. 왜 울어?"
"미안.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나 지금 조영실로 내려가 봐야 돼서."
정설화가 쌩 하니 지나쳐 병동을 빠져나갔고 최기석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이이이잉.
콜폰의 진동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윤지혜가 전화를 걸었다.
"네, 교수님."
[얼마 전에 과장님이 말한 V.
I.
P 환자, 지금 V.
I.
P실에 입원했어. 주치의가 너로 되어 있으니까 확인하고 당장 V.
I.
P실 스테이션으로 와. 나도 곧 갈게.]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서둘러 순환기내과 병동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