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86화 (86/407)

백일야화 그 두 번째 (1)

한승우의 부탁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설마 문신에 응룡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줄이야.

"빨리 안 꿰매고 뭐해?"

한승우 뒤에 있던 사내가 윽박을 질렀다.

"상처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단순 단속 봉합법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단순 단속 봉합법은 외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봉합법으로 찢어진 부위를 한 땀 한 땀 꿰매는 것이다.

상처 부위를 재차 소독한 후 주사기에 국소마취제인 리도카인을 넣었다.

"따끔합니다."

푸우우욱!

주삿바늘이 피부를 꿰뚫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 덕분에 한승우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최기석은 마취를 끝내고 봉합사의 포장을 뜯었다.

끼기기긱.

봉합침을 니들홀더로 조이자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실력 좀 발휘해 볼까?'

그의 눈이 의욕으로 불탔다.

새로운 삶을 얻은 후 환자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봉합을 하게 됐다. 천생 외과의라서 그런지 이 상황이 부담스럽기보다는 자극이 되었다.

성형외과 못지않은 봉합 솜씨를 보여 주리라.

"분명히 말했어. 엉터리로 꿰매면 재미없다."

한승우가 협박조로 말했다.

그 뒤에 선 사내들까지 날 서린 시선을 보냈지만 최기석은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쑤우우욱.

봉합침이 피하조직을 꿰뚫으면서 느껴지는 감각이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다.

최기석은 포셉으로 반대편 살점을 붙잡고 봉합침을 통과시켰다. 이에 피하조직 아래로 봉합사가 연결되었다. 그 상태에서 실을 교차하여 당기고 검지 매듭법으로 봉합을 완성했다.

찰칵!

가위로 실을 자르자 봉합 하나가 완성되었다.

매듭 하나를 짓는데 걸린 시간은 15초밖에 되지 않았다.

한 번 손맛을 본 최기석은 번개처럼 봉합을 이어 나갔다.

새롭게 양손잡이 패시브와 그동안 두 단계 성장해서 6이 된 외과 레벨.

이 두 가지 덕분에 손이 춤추듯 움직였다.

한승우와 사내들조차 어느덧 최기석에 대한 경계를 풀고 봉합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막 진료를 끝낸 김건우까지도.

'이 새끼. 미쳤네?'

김건우는 최기석의 봉합에 혀를 찼다.

속도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봉합 간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해서 로봇이 꿰맨 것 같았다.

인턴 때 봉합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알았지만 그 후로도 이렇게 실력이 늘었을 줄은 몰랐다.

찰칵!

마지막 가위질이 끝났다.

길게 찢어졌던 팔 부위가 깔끔하게 붙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마음에 드세요?"

"……."

"이 정도면 문신이 크게 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흠흠…… 이 정도면 충분하지."

봉합을 감상하던 한승우가 뒤늦게 한마디 했다.

"형님. 저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꿰맨 자리 때문인지 응룡이에게 등비늘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이네? 하하하하!"

부하들의 말에 한승우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최기석의 가슴을 응시했다.

"고마워. 의사 선생. 이름이 최기석이라고? 오늘 일은 잊지 않겠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분간은 동네 의원에서 꾸준히 소독받으세요."

"알았어."

한승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명함을 건넸다.

"주먹이 필요한 일 있으며 연락해. 까부는 새끼들 있으면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최기석이 명함을 받자 한승우와 사내들이 진료비를 계산하고 병원을 떠났다.

바로 그 순간!

[한승우와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한승우(환자): 1단계 - 친밀]

[숨겨진 임무, '응룡이를 부탁해'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강화석 5개와 추가 500 P.

P를 추가 지급합니다.]

보상을 확인한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이런 것도 임무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고생 많았다. 나가서 한잔하자."

김건우가 먼저 응급실을 빠져나갔고 최기석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응급실 근처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딸칵!

김건우가 건넨 캔 커피를 쭉 들이켰다.

병원 생활을 하면 물 대신 달고 다니는 게 커피다. 오늘만 해도 벌써 다섯 잔이 넘는 커피를 마셨다. 그럼에도 쉬거나 여유가 생길 때는 어김없이 커피가 생각났다.

"너 진짜 대단하다."

"뭐가?"

"방금 전 봉합. 얼마 전에 성형외과 3년 차가 와서 봉합하는 거 봤거든? 근데 네가 그 사람보다 훨씬 잘하더라."

"그걸 이제 알았어?"

최기석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성형외과 당직의면 조태호 아니야? 1년 차 주제에 빨리빨리 안 내려오고 뭐한데?"

"오늘 당직은 다른 사람일 걸? 성형외과는 1년 차 레지들이 세 명이잖아. 혼자서 100일 당직 서는 누구랑은 다르지."

"내 이야기를 왜 왜 빙빙 돌려서 하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일주일째 당직 서는 거 아니야? 안 피곤해?"

"딱히."

최기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100일 당직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응급의학과는 어때?"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흉부외과보다야 할 만하지. 우리야 입원환자도 없고 1년 차여도 따박따박 오프 쓸 수 있으니까."

"……."

"진상 환자들이 많고 가끔 교통정리가 빡세지만 이만하면 버틸 만해. 이제는 응급의학과에 온 거 후회 안 한다."

"잘됐네."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우는 응급의학과에서 픽스턴을 할 당시 무척 힘들어했다. 환자와 대판 싸운 일이 있었고 같이 픽스턴을 한 동기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어려움을 다 이겨 낸 듯 보였다.

위이이이잉.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구급차가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구급차에 긴장하는 것은 의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쉬고 계셨나 봐요?"

응급차 조수석에서 예쁘장한 여자 구급대원이 내렸다.

"아니요. 쉬던 게 아니라 세라 씨 마중 나왔던 건데요?"

김건우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답했고 이세라는 그의 말에 방긋 웃었다.

최기석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은 꽃피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환자예요?"

김건우가 구급차 후방을 가리켰다.

"나흘 전에 응급실에 한 번 왔던 알콜 환자에요."

"다행이네요. 방금 막 조폭 환자가 왔다가서 피곤했거든요."

"조폭이요?"

놀란 이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욕하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제압하느라 혼났어요."

김건우는 최기석이 봉합했던 조폭 환자를 자기가 치료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도중에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다는 MSG를 쳐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최기석은 옳다구나 하고 김건우의 편을 들어주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부리는 남자의 허세는 무죄이기에.

"먼저 올라간다."

"오케이. 수고."

최기석은 김건우와 헤어진 후 병동을 찾았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들을 살폈다. 다행히 문제가 될 만한 환자는 없었다.

적어도 밤사이 입원환자로 골머리 앓을 일은 없으리라.

그는 당직실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노우드 팀에 합류하시겠습니까?]

상태창 최상단에 있는 메시지가 눈에 밟혔다.

사실 권일수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심장 클리닉의 주요 팀 멤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럼에도 유예를 둔 것은 혹시나 권일수에게 남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노우드 수술이라…….'

심장 수술의 끝판 왕이라 불리는 노우드 수술을 보조할 수 있다면 큰 재산이 될 텐데.

지이이잉.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콜폰이 울렸다.

[기석아! 빨리 내려와!]

김건우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왜? 무슨 일인데?"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그냥 내려오기나 해!]

김건우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최기석은 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다.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환자의 가슴에 사이드 미러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케이스에 최기석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뭐야?"

"T.

A(교통사고) 환자고 기본적인 처치는 끝냈어. 근데 보다시피 상태가 심각해."

김건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체력: 3/10

주 증상: 호흡곤란 / 흉통

아픈 부위: 폐 / 갈비뼈

진단명: 흉부외상 / 비장파열 / 횡경막파열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폈지만 특별히 치료법을 찾기 힘들었다.

환자 감시 장치로 활력징후를 확인한 결과.

혈압은 80/55mmHg, 맥박은 140회/분, 호흡은 40회/분, 체온은 36.8도이다.

"다른 검사는?"

"저기 모니터에 띄워 놨어."

최기석은 의자에 앉아서 검사 결과를 살폈다.

의식이 없는 쇼크 상태지만 각종 수치들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문제는 가슴에 박힌 사이드 미러를 어떻게 빼내느냐갸 될 것이다.

그는 서둘러 윤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타깝지만 이 환자는 그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교수님. 제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발을 동동 굴렀다.

환자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가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폐부종이 진행되는 것인지 모른다.

윤지혜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혁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 뚜우우…….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길었다.

그런데 좌절감에 젖어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장혁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교수님. 저 기석입니다. 응급환자가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무슨 환자인데?]

"T.

A 환자인데 사이드 미러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최기석은 속사포처럼 환자의 검사 수치와 상태를 보고 했다.

[혹시 손으로 사이드 미러 뺄 수 있어?]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환자가 다치지 않을까요?"

[그건 케이스마다 달라. 이 경우에는 무조건 사이드 미러를 빼야 돼. 영상통화 연결하고 나한테 환자 보여 줘 봐.]

"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영상으로 환자를 보여 주자 장혁필이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일단 사이드 미러 빼 보고 안 되면 그대로 활력징후만 유지해.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며 환자의 가슴에 박힌 사이드 미러에 손을 얹었다.

"손으로 빼려고? 미쳤어?"

김건우가 팔짝 뛰었다.

사이드 미러를 빼는 순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 지시야."

"뺄 때 빼더라도 수술방 안에서 빼야 되는 거 아니야? 너 잘못하면……."

"괜찮아. 할 수 있어."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고 사이드 미러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하지만 사이드 미러는 뭔가에 단단하게 걸린 듯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이드 미러의 쇠 부분이 흉부 어딘가에 깊숙하게 박힌 모양이다.

이대로 환자에게서 사이드 미러를 내버려 둬야 할까.

아니면 폭군의 강림을 써서라도 빼내야 하는 걸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야. 환자 바이탈 떨어진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김건우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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