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야화 (4)
"동의서를 작성할 때 말씀드렸지만 쉽지 않은 수술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전에는 말씀을 안 드렸는데……."
유재윤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승찬이를 갖는데 저나 아내나 노력이 많았습니다. 시험관 시술을 몇 차례나 받았고 이젠 아이를 포기해야 하나 절망하고 있을 때 아내가 승찬이를 임신했습니다."
"……."
"저희에게 두 번째 아이는 없을지 몰라요."
수술을 코앞에 두고 유재윤이 속사정을 털어놓았고 최기석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다.
수술에 실패하면 시름에 젖을 부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확신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수술을 집도하는 권일수 교수님은 소아 수술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스태프가 승찬이의 안녕을 빌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기석은 과거처럼 환자를 반드시 살리겠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외과의는 그저 수술실에서 최선을 다할 뿐.
이제 생과 사의 영역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다.
명의라 불리는 송명진조차 모든 환자를 살리지는 못하기에.
"선생님. 제발 부탁 좀 드립니다."
유재윤이 최기석의 한 손을 붙잡았고 최기석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덮어 주었다.
"그럼 이만."
신생아 중환자실을 벗어나 병동으로 올라갔다.
지이이이잉.
가운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었다. 번호를 확인한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네, 교수님. 건강하게 지내시죠?"
최기석은 통화를 연결하고 밝게 인사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메이죠 병원에 자리 잡은 송명진이다.
[그럼요. 잘 지내죠. 혹시 바쁜데 전화한 건 아니죠?]
"아무리 바빠도 교수님 전화는 받아야죠."
[레지던트 생활은 어때요?]
"힘들기는 하지만 인턴 때보다는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환자를 돌볼 수 있어서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송명진이 껄껄 웃었다.
"교수님은 어떠세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이번 달 중으로 미국심장학회에서 발간하는 책에 심장판막 부분을 맡아서 원고를 보내 줘야 해요. 당장 다음 주에는 라이브 수술이 잡혔고요.]
"라이브 수술이요?"
최기석은 화들짝 놀랐다.
라이브 수술이란 말 그대로 수술 현장을 중계하듯이 외부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집도의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스태프들이 하도 제 판막 수술을 보고 싶다고 해서요.]
"제대로 된 의사들이라면 당연히 보고 싶겠죠. 교수님. 죄송한데 제가 영상통화로 다시 전화드려도 될까요?"
"뭐. 그렇게 해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은 뒤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그렇게 내 얼굴이 보고 싶어요?]
"당연하죠. 얼마나 뵙고 싶은지 요새는 교수님이 꿈에 나타난다니까요?"
너스레를 떨며 송명진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그의 상태는 한마디로 좋았다.
현재 체력은 8.
의진대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체력 수치다.
그 밖에 컨디션 난조로 능력치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행복하시구나.'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마음의 눈으로 상태를 살피자 그의 심장이 소나무처럼 싱싱한 초록빛을 띄었다. 예전에 봤던 칙칙한 회색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다행이다.
비록 외국에서라도 스승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최기석은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끊고 스테이션으로 올라갔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 * *
제2 수술실.
권일수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스크럽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수술 브리핑이 방금 끝났다. 이제 유승찬을 수술하는 일만 남았다.
때마침 이영호가 환자가 실린 침상을 끌고 수술실로 들어왔다.
환자와 스태프가 동시에 C 로젯으로 들어갔다.
'별일 없을 거야.'
최기석은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스태프들의 상태를 살폈다.
집도의 전임의 권일수.
제1보조(퍼스트) 펠로우 1년 차 송정율.
제2보조(세컨드) 레지던트 최기석.
제3보조(써드) 인턴 이영호.
대부분 컨디션이 좋았지만 송정율의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게 마음에 걸렸다.
"너 괜찮아?"
권일수가 송정율의 퀭한 눈을 보고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논문 준비하느라 잠을 조금 설쳤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니 너 말고 환자. 환자가 괜찮겠냐고?"
"……."
"네 손에 사람의 목숨이 달렸잖아."
"끄떡없습니다."
송정율이 힘차게 대답하자 권일수도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스태프들이 제 자리를 찾는 가운데 최기석은 이영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타임아웃(환자 확인 절차) 하라는 눈치를 준 것이다.
하지만 이영호는 최기석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멀뚱멀뚱 환자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 선생님. 타임아웃 해야죠."
"네? 이 환자 제가 잘 압니다. 대동맥 축착증을 앓고 있는 유승찬 환자입니다."
이영호의 대답에 최기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본래 타임아웃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와서 한 번 더 하게 되어 있었다. 혹시나 환자가 잘못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너 미쳤어?"
권일수의 언성이 커졌다.
기어이 일이 터졌다.
이영호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타임아웃을 했으며 조용히 지나갔을 것을, 스스로 매를 번 셈이다.
"동명이인이 올라와서 엉뚱한 사람이 수술받기도 한다는 거 알아 몰라?"
"……압니다."
"근데 왜 타임아웃을 안 하지?"
"……죄송합니다."
"인턴 주제에 수술실 절차나 무시하고 말이야."
권일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영호의 실수로 수술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후 이영호가 타임아웃을 하면서 본격적인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우선 마취의가 전신마취를 했고 최기석이 환자의 가슴을 소독한 후 방포를 씌었다.
스으으윽.
송정율이 메스로 환자의 여린 피부를 갈랐다. 그러자 복숭아뼈 모양의 흉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이이잉. 뿌드드득.
최기석은 전기톱을 들고 흉골을 조심스럽게 반으로 갈랐다.
이후 상행대동맥과 아래대정맥에 각각 케뉼라를 삽입했다.
드르르르륵.
최기석이 도관을 삽입한 것을 확인한 인공심폐기사가 체외순환을 시작했다.
"리트랙터(견인기)"
"아. 네!"
최기석의 지시에 이영호가 리트랙터를 건넸다.
최기석은 리트랙터를 절개된 부위에 부착하고 이영호와 함께 끌어당겼다.
이로써 수술 준비는 끝이다.
"잘하네?"
과정을 지켜보던 송정율이 한마디 했다.
그는 최기석과 수술에 들어간 게 오늘이 처음이다. 레지던트 1년 차라서 별 기대가 없었거늘, 모든 과정이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치프가 된 한민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지금부터 대동맥 축착증과 심실중격결손에 대한 교정술을 실시한다. 메스."
권일수가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건네받았다.
무명들의 빛을 반사한 메스가 유난히 밝은 빛을 뿌렸다.
스으으윽.
마침내 메스가 움직였다.
대동맥 축착증이란 말 그대로 대동맥의 여러 부위가 좁아지고 달라붙어 있는 질환.
우선 대동맥과 연결된 자잘한 동맥관들을 떼어 줄 필요가 있었다.
권일수는 메스를 이용해 협착된 부위들을 조금씩 박리해 나갔다.
취이이이익.
메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피가 흘렀고 송정율이 제때 석션기로 피를 흡입했다.
[용의 눈을 사용하여 최적의 수술 시야를 제공합니다. 필요에 따라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모드로 수술을 촬영합니다.]
최기석은 오늘도 수술 촬영에 나섰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수술을 녹화했다. 개중 겹치는 수술이 있으면 실력 좋은 집도의의 수술을 저장했다.
"실크."
권일수의 말에 소독간호사가 2-0 silk 봉합사를 건넸다.
권일수는 좁아진 대동맥 부위를 봉합사로 묶고 쇄골하동맥의 시작 부분을 판 고리를 사용해 묶었다.
'대단해.'
최기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권일수의 수술 보조를 서는 것은 오늘로 다섯 번째.
그럼에도 매번 환상적인 손놀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송명진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장혁필보다는 섬세했다.
소아심장 수술의 대가는 달라도 달랐다.
이대로만 간다면 오늘 수술은 별 탈 없이 끝나리라.
수술이 계속되는 가운데, 송정율의 반응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석션 타이밍이 한 박자 늦었다.
집도의가 편히 봉합을 하도록 조직을 단단하게 잡아야 하는데 손이 종종 떨려서 이를 잘 수행하지 못했다.
보통 인턴이라면 볼 수 없는 것을 최기석은 볼 수 있었다.
수술의 흐름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수술 보조 경험, 그리고 아지트에서 직접 집도한 경험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기에.
스으으으윽.
메스로 협착 부위를 박리하자 피가 강처럼 흘렀다.
권일수는 송정율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최기석이 눈치 빠르게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최기석은 한 손으로는 견인기를 벌리고 다른 손으로 석션기로 피를 빨아들였다.
인턴이라면 그저 견인기만 벌려야 하지만 레지던트는 석션기를 비롯해 몇 가지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피곤해?"
"아…… 아닙니다."
권일수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송정율이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논문 준비시켰으니까 이 정도는 봐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저…… 절대 아닙니다!"
"우리 병원에서 펠로우 끝내고 싶으면 똑바로 해."
권일수가 으르렁거리고 수술을 재개했다.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한 수술이지만 삼십 분이 지나자 송정율의 반응이 다시 느려졌다.
이런 식이라면 수술 시간이 늘어나고 권일수의 컨디션도 떨어진다.
물론 환자의 수술 경과도 나빠진다.
체외순환이 길면 길수록 환자에게 부담이 가니까.
'어쩔 수 없지.'
최기석은 왼손으로 견인기를 벌리는 한편 오른손으로는 송정율의 역할을 조금씩 대신했다.
때로는 석션을 하고, 때로는 포셉으로 권일수가 봉합을 잘하도록 조직을 잡아 주었다.
양손잡이 스킬 덕분에 한 손 처치도 문제없었다.
수술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쯤 그는 제1보조의 일을 절반 가까이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일수나 송정율은 그런 최기석을 제지하지 않았다.
최기석이 본격적으로 어시에 합류하면서 집도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어시에 나서는 최기석의 태도 또한 현명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항상 처치를 하기 전 그 말을 먼저 했다.
그래서 레지던트 주제에 함부로 나선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최기석이 할 일이 아니라면 못 하게 만들고, 할 일이라면 고개를 끄덕여서 하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권일수와 송정율의 반응을 살피고 혈관겸자를 풀었다.
이로써 대동맥 축착증 수술이 끝났다.
이어지는 심실중격결손 수술.
권일수의 집도, 송정율과 최기석의 보조가 조화를 이루면서 수술은 무탈하게 끝났다.
[대동맥 축착증 수술 보조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 P.
P와 강화석 3개를 제공합니다.]
[환자 바라기(+2)의 활력 효과로 상당량의 체력을 회복하셨습니다.]
알람이 정신없이 뇌리를 스치면서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보상이 기쁜 게 아니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환자의 상태가 양호라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른 느낌의 또 다른 기쁨.
그것은 수술을 거들 수 있는 레지던트의 기쁨이다.
뒷정리는 이영호에게 맡기고 권일수와 송정율과 함께 수술실을 나왔다.
"기석아. 잠깐 나 좀 보자."
"네!"
최기석은 권일수와 함께 1층 카페로 내려갔다. 그리고 커피를 주문한 후 권일수와 마주 보고 앉았다.
권일수와 독대한 것은 처음이라 긴장이 됐다.
'정말 특이한 녀석이야.'
권일수는 최기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 보여 준 최기석의 보조는 훌륭했다.
수술 과정을 꿰뚫고 있는 듯한, 집도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보조를 보여 주었다. 심지어 한 손으로는 보조기를 당긴 채로 보조를 하지 않았던가.
레지던트 1년 차의 보조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빙빙 돌리는 건 성격에 안 맞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
"심장 클리닉 리모델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전문 수술 시작된다는 거 알지?"
"네."
"나는 노우드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노우드 수술.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을 치료하는 수술로 사망률이 30퍼센트가 넘어가는 고난도 수술이다.
"지금부터 팀을 짤 건데 말이야. 거기에 네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권일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노우드 팀에 합류하시겠습니까?]
[노우드 팀에 합류하면 다른 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팀 내 활동에 따라 다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파티 수락 시간 열흘이 지나면 파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뭐야. 이건?'
최기석은 갑작스런 알림이 당황스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