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82화 (82/407)

백일야화 (3)

"환자분. 전 아가씨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에이. 의사가 아니라 인턴이잖아."

"인턴도 엄연한 의사예요."

조은지도 지지 않고 덧붙였다.

드르르르륵.

최기석이 병실로 들어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이봐요 의사 양반. 아침부터 가슴이 계속 아파. 지금은 숨쉬기도 힘들고."

고길동이 얼굴을 찌푸렸다.

체력: 2/10

주 증상: 호흡곤란 / 가슴 통증

아픈 부위: 폐

진단명: 폐 색전증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비후성 심근증

고길동의 상태를 확인한 최기석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폐 색전증.

이것은 혈전(혈액이 응고되어 생긴 덩어리)이 폐의 혈관을 막는 질환이다. 수술 후 종종 발생하며 방치할 경우 쇼크가 찾아오며 장기적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아침의 흉통이 폐 색전증의 전조였던 모양이다.

"추가적으로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 선생, 환자분 피 검사하고 심전도 찍어 봐. 나선형 전산화 단층 촬영(spiral CT)까지."

"검사를 그렇게 많이요?"

조은지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환자는 수술 후의 적응증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기석의 지시는 좀 과하다 싶었다.

"참 나. 이 병원 진짜 왜 그러냐?"

이때다 싶어 고길동이 대화에 껴들었다.

"환자 관리도 개판이고 돈에 환장해서 검사만 찍자고 하네."

"……."

"그리고 아침에 피를 잘 뽑아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쪽도 레지던트 1년 차밖에 안 되잖아. 내 상태를 모르면 그냥 모르겠다고 해. 검사만 막 한다고 뭘 알겠어?"

고길동이 얼굴을 찌푸렸다.

"알 수 있습니다."

"뭐라고?"

"검사를 받으면 환자분이 왜 괴로워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최기석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실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의 상태를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검사를 하는 이유.

그것은 환자를 비롯한 다른 의사들에게 진단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또한 검사를 통해서 환자의 상태를 더 자세히 알 수도 있고 말이다.

"검사를 하면 할 수 있다라……. 내 귀에는 무책임한 소리로 들리는데? 막상 검사해서 아무 것도 발견 못 하면 정상이라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대충 넘어갈 거잖아."

"그렇게 저를 못 믿으시겠습니까?"

"믿음이 갈 만한 행동을 해야 믿지? 뭐. 검사가 정상으로 나왔을 때 비용을 다 까 주면 모를까."

"그렇게 하세요."

"최 선생님!"

최기석의 대답에 조은지가 화들짝 놀랐다. 반면 고길동은 미끼를 물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야? 검사가 정상이면 검사비 대신 내 줄 거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검사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저도 환자분께 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조 선생에게 아가씨라고 했던 거 고개 숙여서 사과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제 치료계획을 전적으로 믿어 주시고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고길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아서 미끼를 던질 줄이야.'

폭군의 강림을 쓰려고 했었건만, 고길동의 제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환자를 스킬로 제압하는 것보다 직접 고개 숙여 사과하도록 만드는 게 더욱 통쾌하다.

"오더 내릴 테니까 CT까지 찍고 와."

"하지만……."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어."

최기석은 조은지의 어깨를 두드리고 당직실로 들어갔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에 마음 편하게 야식을 주문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조은지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선배. 검사 다 끝났어요."

"고생했어. 환자가 너 불편하게 하진 않았지?"

"너무 협조적이라서 불편했어요."

조은지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이러다가 검사 결과에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선배는……."

"다 생각이 있어."

"사실 환자 상태는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잖아요. 근데 지금 선배는 이미 환자 상태를 다 알고 있으면서 확인차 검사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직감이 장난이 아닌데?"

"네?"

"됐어. 방금 한 말은 못들은 걸로 해."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야식 시켰으니까 영호한테 당직실로 올라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은지가 이영호에게 연락하는 사이, 최기석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하아……."

그는 한숨 쉬며 고개를 푹 떨어트렸으며 조은지는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선배. 결과 나왔어요?"

"나오기는 나왔는데……."

최기석은 조은지의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낭패라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설마……."

"일단 환자한테 가자."

두 사람은 당직실을 나와서 복도로 걸었다.

눈 깜짝하면 닿을 짧은 거리가 조은지에게는 백 미터처럼 길게 느껴졌다.

'괜히 나 때문에…….'

조은지는 최기석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최기석은 환자 때문에 자존심을 구긴 자신을 위해서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왜?"

"환자한테 검사비 물어 줘야 하는 거면 저도 보탤게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최기석의 씁쓸한 미소가 다시 한 번 마음에 걸렸다.

"왔어?"

누워 있던 고길동이 벌떡 일어나서 두 사람을 반겼다.

"야밤에 CT까지 찍으면서 난리를 쳤는데 뭔가는 발견했겠지?"

"그게……."

최기석이 더듬거렸으며 조은지는 곁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환자분은 지금 폐 색전증을 앓고 있습니다."

"폐…… 폐 색전증? 그게 뭔데?"

"폐 색전증이요?"

고길동과 조은지가 동시에 몸을 들썩거렸다.

"혈액이 굳어 생긴 덩어리가 혈관을 막고 있는 질환입니다."

최기석은 폐 색전증에 대한 설명을 이었고 고길동은 오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자…… 장난치는 거지?"

"의사는 환자 몸으로 장난하지 않습니다."

"……."

"피 검사 결과 혈전증의 지표를 나타내는 D-dimer 수치가 700ng/㎖, 심장 질환과 상관성을 보이는 BNP수치는 250입니다. 심근손상에 있을 경우 수치가 올라가는 Troponin I 수치 또한 상당히 높습니다."

최기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CT 사진에서 혈관을 막고 있는 혈전이 보인다는 점이죠. 못 믿겠다면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은 고길동과 조은지를 데리고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니터에 고길동의 CT 사진을 띄웠다.

"이게 환자분의 혈관을 막은 혈전입니다."

최기석이 검지로 영상의 일부분을 가리켰다.

이에 고길동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어떠십니까?"

"……."

"환자 관리가 개판이고 돈에 환장해서 검사만 찍자고 하는 병원은 아니죠?"

그는 고길동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 이런 줄은 몰랐는데."

"지금이라도 아셨으면 됩니다. 이제 약속을 지키시죠."

최기석의 말에 고길동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조은지 선생. 내가 의사 선생을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막말을 했어요."

고길동이 고개를 숙였다.

건성으로 하는 사과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사과다.

"아닙니다. 몸이 아프시니까 실수할 수도 있죠."

조은지가 사과를 받으면서 사건은 일단락 마무리 지어졌다.

"환자분 색전증이 심하지는 않으니까 노말 샐라인(생리식염수)에 헤파린(항응고제) 믹스해서 주세요."

"네."

조은지가 스테이션에서 필요한 물품을 챙기는 사이, 최기석과 고길동은 병동으로 돌아갔다.

"최 선생님한테도 미안해요. 예전부터 몸이 안 좋아서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녔는데, 항상 검사만 해 대고 알아내는 건 없어서 검사를 별로 안 좋아하게 됐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최 선생하고 조 선생을 무시할 생각은 원래 없었어요. 내기도 발끈해서 제안한 거예요."

띠링!

[고길동과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고길동(환자): 2단계 - 믿음]

알림이 머리를 스쳤다.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쓰지 않은 것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폭군의 강림은 말 그대로 환자를 강제적으로 제압하는 스킬.

폭군의 강림을 단 한 번이라도 사용하면 그 환자와는 라포를 형성할 수 없었다.

"그럼 편히 쉬시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최기석은 인사를 하고 당직실로 돌아왔다.

언제 왔는지 이영호가 야식 세팅을 끝내고 의료 서적을 보고 있었다.

"벌써 다 끝냈어?"

"제가 원래 좀 빠르잖아요."

이영호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리고 보던 책을 치운 후 음식 앞에 앉았다.

타이밍 좋게 조은지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선배! 뭐예요!"

조은지가 팔짱을 낀 채로 최기석을 흘렸다.

"왜?"

"검사 결과 잘 나왔으면서 왜 저한테는 아닌 것처럼 속였어요? 놀랐잖아요."

조은지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의 연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와서 꼼짝 없이 검사비를 물어 줘야 한다.

거기에 클레임이 걸린다면 충분히 징계까지 받을 수 있었다.

"놀래 주려고 했지."

"몰라요!"

"어쨌든 잘 풀렸잖아. 야식 먹자."

최기석은 조은지를 앉히고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항상 민주혁의 주도로 야식을 먹었는데. 이제는 그가 인턴들을 데리고 야식을 먹는 입장이 되었다.

입장이 바뀌니 기분이 묘했다.

"선배. 저 선배가 흉강천자 했던 때 이야기 듣고 싶어요."

이영호가 눈을 반짝이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됐어. 그건 묻지 마."

"왜요? 그게 전설의 시작이잖아요."

이영호는 천자 하는 시늉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 멋있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된다고 했던 걸 선배는 기어이 해냈잖아요."

"너 설마…… 나 따라 하려는 건 아니지?"

"같은 상황이 오면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요?"

"너랑 나랑은 달라."

최기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흉강천자를 할 수 있었던 이유.

그중 하나는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가 기흉임을 알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레지 3년 과정까지 밟았기에 천자를 할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인턴이 그를 흉내 내면 위험하다.

"저 이래 뵈도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PK 때도 처치 잘한다고 칭찬 받았고요."

"그거랑 그거는 달라."

최기석이 딱 잘라 말하자 이영호가 침묵을 지켰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미리 생각해 둔 과는 있어?"

"저는…… 정재영 중에 하나 골라서 가고 싶어요."

조은지가 먼저 대답했다.

정재영이란 의대생들이 선호하는 과로 정신재활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를 말한다.

과거에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 인기가 좋았지만 요즘은 정재영이 더 뜨고 있었다.

"저는 외과 쪽에 가고 싶어요. 이번 달에 흉부외과 돌고 나서 신경외과랑 대장관외과까지 가 본 다음에 정하려고요."

"외과를? 특이하네."

"전 손 써서 일하는 게 좋아요. 뭔가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잘해 봐라."

"네. 꼭 선배같이 화끈하고 멋진 의사가 될 게요."

"그런 낯뜨거운 말은 하지 말고."

최기석의 말에 조은지와 이영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다음 날.

오전 회의와 회진이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자신이 맡은 환자를 살피고 필요한 처방을 내렸다.

이후 신생아 흉부외과 병동으로 가서 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의 이름은 유승찬.

생후 삼십 일이 된 남자아이로 최기석이 주치의이고 권일수가 오늘 집도하기로 예정됐다.

유승찬이 앓고 있는 질환은 대동맥 축착증.

대동맥 축착증이란 COA(Coarctation of Aorta)라는 약자로 불리는 질병으로 대동맥의 어느 한 부분이 선천적으로 좁아져 있는 질환이다.

유승찬의 경우 대동맥 축착과 심실사이막결손증을 함께 앓았다.

즉 질병의 예후가 좋지 않았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부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승찬의 보호자다.

"선생님. 우리 승찬이 살 수 있겠죠?"

보호자가 다가와 그를 응시했다.

눈빛 속에 담긴 절실함이 가슴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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