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80화 (80/407)

백일야화 (1)

아지트에 도착하자 문 앞에 놓인 스티로폼 박스가 보였다.

송명진이 해외에 갔음에도 정육점 아저씨는 꾸준하게 소 심장을 보내 주었다.

송명진이 부탁을 하고 갔기 때문이다.

"오늘도 반갑다."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박스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 년 가까이 해 온 작업,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오늘 연습할 수술은 대동맥 박리 수술이다.

처음으로 제1보조를 서서 송명진을 도왔던, 처음으로 수술대 위에서 환자를 떠나보냈던 그 수술 말이다.

딸깍!

최기석은 혈관겸자로 상행대동맥의 혈류를 차단했다. 이후 메스를 이용해 대동맥을 반으로 갈랐다.

치이이이익.

대동맥에서 흐르는 피를 석션기로 흡입하자 대동맥 내부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 심장은 멀쩡했지만 동영상처럼 망가진 것을 가정하고 수술을 해 나갔다.

스으으윽.

손놀림이 번개 같았다.

특히 인조혈관으로 찢어진 내막을 봉합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흉부외과 스태프가 만약 이 장면을 봤다면 놀라서 뒤로 자빠졌을 것이다.

레지 1년 차가 고난도 대동맥 박리 수술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으니까.

상행대동맥을 봉합한 후 활처럼 굽은 대동맥궁을 바라봤다.

출혈로 피바다가 됐었던 과거가 머릿속을 스쳤다.

최기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처치에 나섰다.

지금까지 연습한 대로라면 그때의 상황이 다시 와도 환자를 살릴 수 있다.

"후아……."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생각한 것보다 빨리 수술을 마쳤다.

장기 임무 중 하나인 최고를 향해서.

최기석은 거기에 필요한 두 가지 수술, 팔로 4징증 수술과 대동맥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레지던트 1년 차인 그가 실제로 집도를 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누가 시간을 앞으로 돌려 주면 안 되나?"

혼자서 우스갯소리를 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초 인턴 쌤. 하이요!"

스테이션에 있는 강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거 안 보여요. 이거."

그가 검지로 가슴 주머니에 달린 박음질을 가리키자 강하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최 쌤이 레지던트라는 게 아직 적응이 안 돼요."

"앞으로 적응하게 해 드릴 게요."

"그건 그렇고 여자친구가 뭐라고 안 했어요?"

강하나가 스테이션을 한 번 훑고서 화제를 돌렸다.

최기석이 동료 여의사와 사귄다는 사실은 아직 그녀만 알았다.

"흉부외과에 있겠다고 하면 질색할 법도 한데."

"처음부터 알고 만났는데요, 뭐."

"우와. 여자친구 마음씨가 완전히 부처님이네요. 아무리 바빠도 섭섭하지 않게 잘해 주세요."

"암. 그래야죠."

최기석은 강하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스테이션을 빠져나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실험실에 쥐새끼처럼 보여? 엉?"

환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복도 끝에 있는 1인실이다.

바깥에서 병실을 바라보니 인턴 조은지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면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무슨 일이에요?"

"아…… 최 선생님. 그게…… 환자 ABGA(동맥혈 채혈)를 실패해서……."

"줘 봐요. 내가 할 테니까."

최기석은 환자 고길동에게 양해를 구한 뒤 직접 ABGA에 나섰다.

푸우우우욱.

주삿바늘이 거침없이 피부를 꿰뚫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를 발동합니다.]

[채혈에 100퍼센트 성공하며 환자의 통증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여기 선생님이 하니까 한 번에 되네. 별로 아프지도 않고."

환자가 조은지를 위아래로 훑었고 조은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방금 한 채혈은 난이도가 높아서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도 종종 실패하곤 합니다. 환자 분이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렇게 말하면 하는 수 없지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최기석은 고길동의 상태를 물었다.

레지던트 1년 차와 인턴의 가장 큰 차이점.

그것은 주치의가 되어서 환자를 관리하며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고길동은 최기석이 맡은 환자 중 하나다.

"가슴이 조금 욱신거리기는 한데."

"아마 어제 수술할 때 흉골을 절개해서 그럴 겁니다. 그 이외에 따로 불편한 점은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그럼 저희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조은지를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잔뜩 풀 죽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감사해요."

캔 커피를 뽑아서 내밀자 조은지가 고개를 꾸벅였다.

조은지는 의진대 한 학년 후배다.

의대 생활을 할 때 귀요미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체구가 작고 웃을 때마다 눈썹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서 많은 남자 학우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ABGA 좀 실패했다고 너무 기죽지 마. 너 말고 다른 애들도 다 못해."

"정말요?"

"당연하지. 인턴 때 하는 처치 중 제일 어려운 게 ABGA야."

최기석의 말에 조은지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조은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선배. 진짜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뭐랄까…… 태호 선배만 따라 다니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태호 선배랑 갈라지고 강해지신 것 같아요."

조은지는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꺼냈다.

후배들 사이에서 최기석은 전설 중 하나다.

인턴 시절의 흉강천자, 아동학대 피의자를 잡은 일, 아이돌을 구하고 자선 콘서트를 구상한 것 등등.

그 화제성을 놓고 보면 이미 원내 스타다.

"사람은 변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너도 곧 변할 거야."

"저도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요?"

"굳이 나처럼 될 필요 없어.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너다우면 되는 거야."

"선배. 멋있어요."

조은지의 칭찬에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ABGA 말고 힘든 건 없어?"

"따…… 딱 하나 더 있어요."

조은지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소…… 소변 줄이요. 왜? 제가 남자 환자들 소변 줄을 꽂아야 돼요?"

남자 환자에게는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에게는 여자 의사가 소변줄을 꽂는 게 보통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건 어쩔 수 없네. 짝턴한테 부탁해 봐."

"……네."

"그만 일어나자."

최기석은 조은지와 함께 휴게실로 들어갔다.

"선배. 안녕하세요."

또 다른 흉부외과 인턴 이영호가 최기석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영호 역시 의진대 한 학년 후배다.

그는 두 사림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의 준비를 끝냈다.

"행동이 빠릿빠릿한데?"

"감사합니다."

이영호가 미소를 지었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 노트북이 놓인 자리를 응시했다.

송명진이 종종 일찍 와서 앉았던 자리가 텅 비었다.

스승의 공백을 확인한 순간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가슴을 채웠다.

찰싹!

최기석은 두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레지던트가 됐다고 해서 잡 일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형태로 늘어났다.

수술 스케줄을 잡고 회진 준비를 하고 처방을 내리고 케이스 발표도 준비해야 한다.

간신히 할 일을 마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이 곁에 앉은 권일수에게 인사하자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권일수.

송명진이 나가고 들어온 소아심장 수술의 대가다.

그의 직급은 장혁필과 같이 조교수.

의진대에 자리를 잡은 후 별 트러블 없이 생활하는 중이다.

권일수는 눈이 작고 가늘며 턱선이 날카로워 차가운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도 꼼꼼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동료들의 실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항상 좋은 말로 스태프들을 다독이는 장혁필과는 정반대다.

조지환과 장혁필이 회의실에 들어오면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과거 최기석과 조지환의 로봇팔 수술 보조를 했던 한민우가 치프가 되어 회의를 이끌었다.

입원환자의 상태 보고, 간략한 수술 브리핑이 끝나고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인턴 이영호가 긴장한 모습으로 프로젝터 앞에 섰다.

"제가 오늘 발표 드릴 내용은 관상동맥 우회술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영호가 포인터로 파워포인트를 넘기며 설명을 이었다.

초반에는 긴장한 듯 말을 더듬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은……."

이영호가 말을 마치기 전에 권일수가 손을 흔들었다.

"네, 교수님."

"우회술을 할 때 내흉동맥(심장내 동맥)만 쓰는 건 아니야. 경우에 따라서 요골동맥과 다리의 대복제정맥도 쓰지."

"네. 맞습니다."

"그럼 요골동맥으로 우회술을 펼칠 때 주의 사항은?"

"그…… 그건……."

이영호가 머뭇거렸다.

필사적으로 대답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답변은 하지 못했다.

"발표 준비 좀 제대로 하자. 흉부외과 안 들어올 거라고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야?"

권일수가 얼굴을 찌푸리며 파워포인트 자료로 책상을 톡톡 내리쳤다.

"발표 내용에 30퍼센트는 요즘 추세하고 안 맞아. 게다가 내흉동맥으로 우회술을 했을 때 동맥이 좁아진다는 게 단점이라고 했는데 그건 완전히 잘못된 내용이고."

"……."

"혹시 슈퍼 캠퍼스에 있는 내용 그대로 가져다 썼니?"

"아닙니다."

"똑바로 하자. 똑바로."

권일수의 지적에 이영호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을 따름이다.

'짜식. 단단히 준비하라고 말해 줬더니.'

최기석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레지던트 사이에서 통하는 권일수의 별명은 팩트 폭격기.

항상 옳은 말만 해서 상대의 기를 꺾는다고 해서 최기석과 민주혁이 붙인 이름이다.

"권 교수님. 오늘이 첫 발표인데 너그럽게 봐주시죠."

장혁필이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장 교수. 아무리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지. 쟤가 말한 대로 수술하면 환자는 죽어."

권일수는 지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같은 조교수지만 나이와 경력은 권일수가 장혁필보다 높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팽팽했지만 조지환은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권일수와 장혁필이 충돌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야."

옆자리에 앉은 민주혁이 팔꿈치로 최기석을 건드렸다.

최기석은 그 뜻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오늘 발표할 내용은 소아 환자에게 발생한 폐동맥 협착증의 치료입니다."

세세하고 꼼꼼한 발표가 이어졌다.

픽스턴이 된 이후 그의 발표는 빈틈이 없었다.

논문이 쉬웠어요 칭호를 얻은 후에는 더욱더 견고해졌고 말이다. 발표가 끝나자 장혁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궁금하신 게 있으면 질문은……."

최기석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팩트 폭격기인 권일수가 출격신호를 보내왔다.

심지어 그가 발표한 내용은 권일수의 전공분야인 소아심장 수술 파트다.

모두가 숨죽여 두 사람을 응시했다.

"애초에 소아 환자에게 수술하는 것 자체가 부담 아닌가? 풍선 성형술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권 교수님의 말이 원칙적으로 맞지만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폐동맥판막이 지나치게 좁으면 스텐트를 삽입할 수 없습니다."

"……그럼 동맥관 개존증은?"

권일수가 화제를 돌렸다.

동맥관 개존증이란 대동맥과 폐동맥을 이어 주는 관이다.

본래 출생 직후 닫혀야 하나 이것이 정상적으로 닫히지 않는 질환이 동맥관 개존증이다.

"왜 집도의는 수술 중에 동맥관 개존증을 발견하고도 닫지 않았지?"

"제가 발표한 케이스에서는 동맥관이 열린 정도가 작았으며 자연적으로 닫힐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경과 관찰을 하면서 환자를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기석이 똑 부러진 대답에 권일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영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이 '선배,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권일수에게 당한 게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네, 교수님."

"수술 후에 CPR 상황이 있었어. 기관 삽관을 제거한 후에 앰부백을 짰는데 그 이유는 뭐지?"

"본 환자는 위 천공이 있었는데 마스크를 통한 인공호흡은 위 팽창을 일으킬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권일수가 이제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침내 가라앉은 팩트 폭격기, 회의실은 평화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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