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바라는 기적 (7)
강은하의 등장으로 모금액이 무려 2배로 뛰어올랐다.
계속 무대가 이어졌다.
경쾌한 리듬의 댄스곡이 흘렀고 강은하는 노래를 부르며 리듬에 따라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은하 언니, 사랑해요!"
"강은하! 강은하!"
팬들의 함성이 요란하게 주변을 흔들었다.
그 사이 모금액은 어느새 2천만 원을 돌파했다.
병원 관계자들을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돌아왔다.
이 자리는 대학병원과 중견 엔터테인먼트가 합작해서 연 자선 콘서트다.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금액이 커야 한다.
"우리 함께 영원히 사랑해요."
강은하가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면서 노래가 끝났다.
"하아…… 하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슈퍼 비너스의 강은하입니다."
라이브를 펼친 강은하가 숨을 몰아쉬며 인사했다.
이에 팬들이 다시 한 번 박수와 환호로 그녀를 반겼다.
"아시다시피 저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했고 의진대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퇴원했습니다. 치료를 받은 병원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뜻깊네요."
강은하가 한 손을 가슴에 얹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제 가슴은 지금 세차게 뛰고 있어요."
"……."
"이제 그 관심을 주희에게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한 아이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는 것,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강은하가 고갯짓을 하자 반주가 흘러나왔다.
본래 무대에서 부를 노래는 두 곡이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모금액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서 무대를 이어 갔다.
"다함께 손을 잡아요. 저기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봐요."
강은하가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최기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 노래 못하는데."
최기석이 거절 의사를 보였지만 그녀의 억척스런 손길과 주변의 시선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우…… 우리에겐 내일이 있어요. 햇살이 떠오르면……."
최기석은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며 노래를 불렀고 관중들은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공개적으로 음치인증을 하다니…….
그의 볼은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귀엽네.'
강은하는 최기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병원에서는 늠름했던 최기석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이다.
처음 알게 된 최기석의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듀엣 무대가 끝나고 최기석은 자리로 돌아왔다.
강은하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네 번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돌이랑 노래 부르니까 좋아?"
정설화가 팔짱을 낀 채로 입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아니. 완전 별로였어."
"흥! 쑥스러워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잘못 본 거야. 무대가 부담스러워서 그랬던 거라고."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사랑해.
그 한 마디로 정설화의 질투는 눈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두 뺨은 빨갛게 물들었으며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강은하의 네 번째 무대로 콘서트는 끝났다.
최종 모금액은 6천만 원.
강은하의 등장 이후 모금액이 무려 6배가 뛰어오른 게 특이사항이다.
최기석은 정설화를 먼저 기숙사로 보낸 후 스테이지 근처에서 김지희와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김지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콘서트 내내 펑펑 울었다.
입원비조차 내기 힘든 사정이었건만 지금은 퇴원 후 다시 살아갈 희망까지 얻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예요. 선생님이 저와 주희를 살렸어요."
"제가 한 일은 병원과 기획사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 밖에 없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에요."
"전……."
김지희가 말문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최기석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펑펑 우세요. 그리고 실컷 우세요."
"……."
"앞으로 흘릴 눈물, 이 자리에서 다 흘리고 주희랑 행복하게 사세요."
최기석은 김지희를 안정시키고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직 만나 봐야 할 사람이 남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찾은 곳은 바로 신생아 중환자실이다.
"이제 깼니?"
최기석은 눈을 비비고 있는 이주희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술 후 이주희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조만간 중환자실이 아니라 일반 병실로 갈 것이다.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엄마 속 썩이지 말고 건강해야 돼."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이주희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움직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이주희가 자꾸 허공에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놀아 달라는 건가 싶어서 손가락을 뻗자 이주희가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바로 그 순간!
띠링!
[레전드 아이템, 두루마리: 시간을 넘어서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초의 레전드 아이템을 획득한 보상으로 1000 P.
P 를 지급합니다.]
멍하니 상태창을 보는데 이주희가 꺄르르 웃으며 그의 손가락으로 계속 장난을 쳤다.
"주희. 네가?"
* * *
다음 날 저녁.
최기석은 택시를 타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절반짜리 오프 이후 꿀 같은 풀 오프가 이어졌다.
본래라면 수술대기 때문에 멀리 나갈 수 없지만 특별히 김건우에게 부탁해서 외출을 나갔다.
송명진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기에.
"으음……."
상태창을 통해 어제 얻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NEW [레전드 두루마리: 시간을 넘어서]
-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 봉인된 아이템으로 능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비밀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비밀의 열쇠는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을 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레전드 아이템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감, 시간을 넘어서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부추겼다.
'쓰려면 아직 멀었네.'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현재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젬 박스뿐.
비밀의 열쇠를 얻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비밀의 열쇠가 레전드 아이템을 개방하는 장치라면 필요한 P.
P도 만만치 않으리라.
등을 기대고 상점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처치를 통해 얻은 P.
P와 보상으로 얻은 P.
P를 합치면 1150 P.
P 다.
젬 박스 하나 정도는 굴려 봐도 좋을 듯싶었다.
'가자!'
최기석은 과감하게 레어 젬 박스를 선택했다.
[600 P.
P를 소모해 레어 젬 박스를 획득하셨습니다. 레어 젬 박스를 개방합니다.]
휘이이이잉.
박스가 열리면서 최기석만 볼 수 있는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났다.
띠링!
[축하합니다. 하급 젬을 획득하셨습니다.]
NEW [하급: 하품 횟수 1.5배 상승]
"아. 씨발."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품 횟수 증가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젬이란 말인가.
가챠(랜덤으로 아이템을 뽑은 일의 일본어 표기)는 가차 없다는 말은 과연 진실이다.
최기석은 다시는 젬 박스에 손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P.
P를 통해 할 일은 무궁무진할 테니까 이렇게 낭비할 수 없었다.
상태창을 확인하는 사이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가방을 챙겨 역 근처 아파트로 향했다. 벨을 누른 지 얼마 안 돼서 않아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반가워요.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송명진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최기석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기 전에 챙긴 음료수 병을 건넸다.
"뭘 이런 것까지 챙겨 오셨어요."
"빈손은 허전해서요."
"이쪽으로 오세요."
송명진의 부인 손정숙이 그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부엌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은 상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음식의 종류도 한식부터 중식, 일식까지 다양했다.
"교수님. 이건……."
"부담 갖지 말고 내 집처럼 생각해요."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후 최기석은 그의 가족과 저녁식사를 가졌다.
손정숙이 분위기를 편하게 이끌었기에 어색함 없이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
"한잔할래요?"
식사가 끝난 후 송명진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네. 물론입니다."
"거절해도 괜찮아요. 최 선생 몸 상태는 잘 아니까."
"괜찮습니다. 마시는 양은 제가 조절하겠습니다.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각종 아이템과 젬으로 컨디션이 좋았기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채애앵!
술잔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좋네요. 최 선생하고 이렇게 단둘이 술을 마실 수 있게 돼서."
"저도 좋습니다."
최기석은 송명진에게 술을 따라 주고 말을 이었다.
"혹시 떠날 날짜는 결정하셨나요?"
"안 그래도 아까 조 과장 전화를 받았어요. 후임자를 구했다고 하던데……. 아마 다음 주쯤에는 떠날 것 같아요."
"아. 네."
최기석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별은 마음 아프지만 스승을 보내야만 한다.
흉부외과 내의 알력 싸움과 환자의 죽음으로 송명진은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송명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국에 있더라도 최 선생이 볼 논문이나 필요한 정보는 앞으로도 꼬박꼬박 보내 줄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말아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죠."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웠다.
"최 선생도 쭉 봐서 알겠지만 나는 외골수 기질이 심해요. 주변 사람들 하고 충돌도 잦은 편이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기석의 당찬 대답에 송명진이 눈을 깜빡거렸다.
"교수님은 항상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환자를 이용하려는 일부 의사들과 충돌하셨던 것뿐이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송명진이 최기석의 시선을 피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최 선생을 만나서 정말 좋았다는 거예요. 만약 최 선생이 곁에 없었다면 난 의진대에서 금방 뛰쳐나왔을 겁니다."
송명진은 술기운을 빌어 진심을 전했다.
최기석이 보여 준 환자를 향한 배려, 의술에 대한 열정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초심을 되살려 지금까지 치료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가 최기석의 제자였던 걸지도 모른다.
"저도 교수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덕분에 기술이나 마음가짐이 다 성장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따스한 시선을 나누었다.
오늘 같은 자리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이에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더 오랫동안 담아 두려 했다.
"아. 교수님.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이요?"
"잠시만요."
최기석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확인해 보세요."
송명진은 최기석이 내민 상자의 포장을 벗겼다. 그러자 잘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 쓰시던 안경 부러졌잖아요. 그거 가지고 안경점에 갔습니다. 도수는 그 안경이랑 똑같이 맞췄는데 잘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송명진은 기존에 쓰던 안경이 부러지자 다 낡은 예비용 안경을 쓰고 다녔다.
새 안경은 맞출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최기석이 새 안경을 구입했다.
"좋은데요?"
송명진은 안경을 써 보고 미소를 지었다. 렌즈에 흠집이 없어서 사물이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최 선생."
"아닙니다. 다음에는 훨씬 더 좋은 선물 챙겨 드릴 게요."
최기석은 송명진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제 간의 대화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이야깃거리도 무궁무진했다. 대화할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럼 잘 들어가요."
"네. 교수님."
송명진과 작별인사하고 아파트를 떠났다.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저 달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빛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
최기석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 *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해는 짧아졌으며 시원하던 바람은 매서워졌다.
송명진은 메이죠 클리닉에서 자리를 잡았고 의진대 흉부외과는 그와 무관하게 별 탈 없이 굴러갔다.
최기석은 말턴(말년 인턴)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병동 일과 수술 보조는 언제나 완벽했다.
메이죠로 간 송명진이 꾸준히 논문을 보내 줘서 예전처럼 논문을 읽었다.
소 심장도 매일 배달되어 아지트에서 집도 연습을 했다.
대가의 제자 버프는 끊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이어졌기에.
또한 당직이 있는 날에는 영어 공부에 힘썼다.
시간이 흘러 전공의 시험을 치르고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전공의 면접을 보았다.
진작부터 픽스턴을 해서 능력을 입증했던 최기석이었다.
면접관이 장혁필과 윤지혜였기에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흉부외과 지원자는 단 한 명, 최기석뿐이었다.
올해에도 비뇨기과, 산부인과와 더불어 기피 진료과의 위상을 굳건하게 지킨 셈이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최기석은 알람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벽에 걸린 의사 가운을 응시했다.
가운 호주머니에 변화가 생겼다.
[흉부외과 최기석]
전과 다르게 소속이 붙었다.
이제 최기석은 레지던트가 됐다. 의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 것이다.
과거에 다 걷지 못한 길.
이번에는 끝까지 걸어 보리라.
최기석은 가운을 걸치고 병동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할 일이 산더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