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바라는 기적 (6)
"정말이십니까?"
[그럼 정말이지 가짜겠어? 이사장님이 지시를 내리니까 병원장님도 꼼짝 못 했다니까.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참 볼만했을 텐데 말이야.]
임병철의 목소리에 여유가 흘렀다.
"이사장님이 갑자기 의견을 바꾼 이유가 뭘까요? 어제는 반대하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나도 몰라. 하여간 일이 잘 풀렸으니까 계획대로 진행하자고.]
"알겠습니다. 제가 A.
P 엔터테인먼트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최기석은 대화를 끝내고 서둘러 수술실을 향했다.
* * *
오전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수술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기고 병동으로 향했다.
수술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게 있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고용진이 있는 1인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고용진이 최기석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방금 전에 남 선생이 드레싱하고 갔는데."
"한 가지 여쭤 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진료부원장님께서 자선 콘서트가 진행되도록 힘 써주셨습니까?"
"아니요."
고용진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자선 콘서트 이야기는 어제 막 최 선생에게 들었을 뿐이에요. 게다가 난 아직 정식으로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무슨 수로 병원의 결정을 뒤집겠어요?"
"그럼 대체 누가……."
"병원에 지니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고용진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지니라면 램프의 요정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요정 같은 누군가가 최 선생의 소원을 들어준 거죠."
"사실 전 그 지니가 진료부원장님일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왔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아쉽지만 난 아니에요."
"쉬시는 데 죄송합니다. 그럼 저녁 때 안부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최기석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병실을 떠났다.
고용진은 가만히 최기석을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인턴답지 않게 듬직한 것은 아마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기석은 그의 마음에 들었다.
자신보다 환자를 더 걱정하는, 환자 생각에 잠을 설치는 의사는 참 오랜만에 봤다.
지이이이잉.
탁자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떨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이사장이 문자를 보냈다.
[일단 부탁한 대로 진행했다. 아픈 네가 하도 부탁을 해서 들어준 거다. 앞으로는 이렇게 힘 못 써.]
문자를 확인한 고용진은 담담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최 선생. 난 지니가 아니야. 소원은 단 한 번뿐이라고."
목소리가 담담하게 병실에 퍼졌다.
* * *
평일이 모두 지나고 토요일이 찾아왔다.
일과가 끝난 최기석은 후련하게 수술실을 나왔다.
오늘은 반쪽짜리 오프가 있는 날, 응급수술만 터지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휴게실에서 병원 밖을 응시했다.
본관과 별관 사이의 공터에 스테이지가 만들어졌다.
스테이지 앞으로 꽤 많은 수의 의자가 놓였는데 벌써부터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콘서트는 한 시간 뒤에 시작하기에 그동안 한숨 돌릴 생각이다.
최기석은 본관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별관을 지나면서 스테이지를 눈앞에서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아직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콘서트를 통해 이주희 모녀의 사정은 한결 더 나아지리라.
그들이 새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
"저기…… 혹시……."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은하 언니 구해준 의사 선생님. 아니에요?"
"어머! 맞는 것 같은데?"
"우와. 우리 대박이다!"
여학생들이 최기석의 정체를 확인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맞죠? 선생님?"
"아. 네. 맞기는 한데……."
"감사해요. 선생님 덕분에 우리 언니가 살았어요."
여학생들이 고개를 숙여 최기석에게 감사를 표했다.
여학생들은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다면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좋을 대로 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여학생들과 사진을 찍었다.
"야. 저기 좀 봐!"
"최기석 선생님이다."
그를 뒤늦게 알아본 슈퍼 비너스 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벌떼처럼 몰려와 사진을 찍자고 했으며 심지어 사인까지 요청했다. 최기석은 졸지에 반 연예인이 되어 슈퍼비너스 팬들에게 팬 서비스를 해 주었다.
"슈퍼 비너스 팬클럽 아프로디테와 은하 언니 팬클럽 은하수는 항상 선생님을 응원할 거예요."
몰려든 팬들이 열렬한 지지를 드러냈다.
최기석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사람의 영향력이라는 게 어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지 강하나 한 명을 구했지만 그녀의 팬들이 전부 그의 편이 됐으니까 말이다.
그는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아지트로 들어갔다.
"왔어?"
소파에 앉아 있던 정설화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설화는 오늘 오프다.
"뭐 보고 있어?"
"이거."
정설화가 무릎에 놓았던 노트를 들어올렸다.
최기석이 얼마 전에 두고 갔던 심전도 노트다.
"이 노트 정말 대박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보다 훨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당연하지. 김 교수님이 손수 만든 거니까."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정설화의 옆에 앉았고 정설화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을 품에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이거 봐도 돼?"
"너만 보면 딱히 상관없어."
"고마워. 그나저나 벌써 픽스턴 할 때가 왔네."
정설화가 벽에 걸린 달력을 응시했다.
최기석이야 워낙 별종이라서 인턴 생활 3개월 만에 픽스턴을 했을 뿐이다.
보통 인턴들은 지금부터 픽스턴 할 과를 결정한다.
"결정했어? 어디로 갈지?"
"응."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 내내 계속 고민해봤는데…… 나는 외과 체질은 아닌 것 같아."
"왜? 설화 너도 손재주 좋잖아."
정설화는 과거 봉합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과거 대전 응급실에서 한 처치도 수준급이었다.
"손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 같아. 솔직히 그동안 수술 보조 설 때마다 괜히 긴장이 되고 떨렸거든."
"……."
"그래서 내과 쪽으로 가려고."
"내과면 어디?"
"순환기내과."
정설화가 대답을 하고서 얼굴을 붉혔다.
"내가 맡은 환자를 기석이 네가 수술해 주고, 네가 수술한 환자를 내가 보살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면 뭔가 부부끼리 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거 좋은데?"
최기석은 수줍어하는 정설화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근데 괜히 나 때문에 적성에도 안 맞는 순환기내과로 가는 건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우리 앞으로도 잘해 보자. 의진대병원 심장 파트는 우리 둘이서 접수하는 거야."
"응."
대화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설화다.
그녀의 뺨은 물론이요 귓불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나. 네 심장 소리 듣고 싶어."
"갑자기 왜?"
"그…… 그냥 의식 같은 거야. 이제 우리 둘 다 심장 파트에서 일하게 됐잖아."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최기석이 정설화를 마주봤다.
정설화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의 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잘 뛴다. 이식 수술 받은 것 같지 않아."
"당연하지."
최기석은 품에 안긴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번 주는 서로 바빠서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둘이서 오붓한 한때를 보낼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자. 이젠 네 차례야."
"나도?"
"당연하지."
최기석이 머뭇거리자 정설화가 당돌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싼 뒤 자신의 품 쪽으로 당겼다.
최기석은 졸지에 정설화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꽃처럼 상큼한 향수 냄새, 볼에 닿는 뭉클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박동은 어때?"
"……."
"기석아?"
"어? 어. 그…… 그게 한 90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바보.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정설화가 툴툴 거리며 최기석의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서…… 설화야. 잠깐만."
"왜?"
"이제부터 제대로 들어 볼게."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힘을 풀었다.
최기석은 그제야 정설화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귓가에 울리는 규칙적인 박동.
거기에 집중하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정설화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자 보드라운 느낌이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퍼져 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찰싹!
"나쁜 손!"
정설화가 최기석의 손등을 살짝 때렸다.
고개를 들자 정설화가 뾰로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최기석은 얼굴을 붉히며 정설화의 시선을 피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응큼해."
"……."
안절부절못하는 최기석을 보며 정설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심장 소리 듣자고 한 건 내 제안이었으니까 오늘은 너그럽게 봐줄 게."
"으…… 응."
"가자. 이제 콘서트 시작하겠다."
두 사람은 아지트를 나와서 스테이지로 향했다.
스테이지의 좌석은 이미 만석이다.
주변에는 아이돌을 보기 위한 팬들, 인근 주민들, 병원 직원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뤘다.
기획사 측에 관람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기에 두 사람은 VIP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도 불편하네.'
최기석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이사장과 병원장을 비롯한 병원 최고위 간부들이 근처에 있었기에.
"이번 일을 계획한 게 자네라면서?"
이사장 남궁재룡이 뒤를 돌아서 최기석을 응시했다.
남궁재룡은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외모를 가졌다. 눈썹은 석탄처럼 짙었으며 부리부리한 두 눈은 강렬한 빛을 쏘아 내는 듯 했다.
한눈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네. 맞습니다."
"아직 인턴이라고 들었는데? 수완이 좋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러던 중 이사장의 곁에 있는 조양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최기석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해 봐."
"네."
짧지만 숨 막혔던 대화가 끝났다.
최기석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곁에 있는 정설화는 남몰래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사회를 맡은 개그맨 임경완입니다. 의진대병원과 A.
P 엔터테인먼트가 진행하는 뜻깊은 행사에 초대해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임경완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그는 인기 개그맨답게 유머러스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을 이끌어갔다.
우선 콘서트에 취지를 설명했으며 이사장을 불러 준비된 축사를 듣기도 했다.
이후에는 이주희와 김지희 모녀의 영상이 스크린에 비춰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들 즐기실 준비 되셨나요?"
"네!"
"오늘의 첫 번째 무대는 늑대~소년들!"
임경완의 외침에 관객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화려한 조명과 가슴을 울리는 비트 속에 5인조 남자 아이돌의 무대가 시작됐다.
"넌 오늘부터 내 꺼!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꺼!"
"우와와와!"
"멋있어요. 오빠!"
박력 있는 춤동작에 팬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늑대소년들을 시작으로 A.
P 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들이 차례대로 무대를 채웠다.
병원에서 치러지는 이색 자선 콘서트.
모두의 반응이 뜨거웠다.
최기석은 콘서트를 보면서도 실시간으로 ARS 모금액을 확인했다.
현장 분위기는 뜨겁지만 모금액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늑대소년과 슈퍼 비너스의 무대에서 금액이 잠시 치솟았지만 이후로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사실 제가 이래서 콘서트를 반대한 겁니다. 이렇게 일을 벌려 놓고 모금액이 이런 수준이면. 쯧쯧……."
병원장 조양기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콘서트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한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얼마 전 퇴원한 강은하가 그 주인공이다.
"은하 씨. 무대에 서는 건 아직 무리 아닙니까?"
"춤은 못 추지만 노래는 부를 수 있습니다. 뜻깊은 행사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요."
진행자의 질문에 강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최기석이 앉은 쪽을 보며 윙크를 날렸다.
진행자가 내려간 후 본격적인 무대의 막이 올랐다.
"포기하지 않아요. 현실은 어두울지라도 난 아직 밝게 빛나고 싶어요. 이 걸음을 계속하면 언젠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죠."
잔잔한 반주와 더불어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목청껏 강은하의 이름을 외치던 팬들의 함성도 잦아들었다.
어느새 노래에 빠져든 것이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최기석도 뒤늦게 강은하의 감성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문득 바라본 ARS 모금액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