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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77화 (77/407)

당신이 바라는 기적 (5)

젬 박스를 살피던 최기석은 당직실을 벗어나 흉부외과 병동 1인실을 찾았다.

침대에 흉관을 꼽은 고용진이 누워 있었다.

그의 나이는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몸에는 전혀 군살이 없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중후한 멋이랄까, 신사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1인실에 들어온 것을 보면 경제적인 여유도 있는 듯 했다.

문득 고용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나. 안 잡니다."

고용진이 가만히 눈을 떴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까보다는 좋은데 이게 너무 불편해서."

고용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지로 흉관을 가리켰다.

가슴을 살짝 열어 놓고 거기에 튜브를 꽂아 놨으니 답답한 수밖에…….

"불편하실 건 알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튜브를 통해서 계속 피를 빼내야 하거든요."

최기석은 배액 상태를 살폈다.

튜브가 꼬이거나 꺾이지는 않았는지, 배액병에 피가 꽉 차지는 않았는지를 말이다.

흉관을 삽입한 환자는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잘못하면 피가 역류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심호흡을 크게 하시고 기침도 자주하세요. 그래야 폐가 일찍 펴져요."

"친절하군요."

고용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문득 최기석의 가운 가슴 주머니에 머물렀다.

"최 선생은 인턴이에요?"

"네."

"병원 밖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신경 쓸 정도면 나중에는 진짜 의사가 되겠어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동료나 선배들은 환타라고 핀잔을 주거든요."

"환타라……. 주변에서는 싫어할 수 있겠네요."

고용진의 답변에 최기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는 자연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연스럽지 못하기도 했다.

"환타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환자를 탄다는 말이잖아요. 나도 병원 밥을 먹은 지 꽤 오래됐습니다. 그 정도 은어는 알아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병원의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건 조만간 알 겁니다. 최 선생이 좋든 싫든 간에."

고용진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고용진이 입을 열었다.

"요새 일하면서 제일 힘든 게 뭐에요?"

"특별히 없습니다."

"인턴이 힘든 게 없다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정확히 말하면 힘든 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견딜 만해요."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선 인턴의 가장 큰 적인 수면 부족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역환단과 환자 바라기의 효과에 의해 항상 일정 이상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떤 처치도 척척 해내고 있었다.

답답한 건 오직 하나뿐.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에도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최 선생은 정말 특이하네요."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

"요새 힘든 일이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뭔데요?"

고용진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환자분에게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병원 내적인 이야기라서요."

"툭 터놓고 말해 봐요. 혹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최기석은 고민하다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병원 이야기를 생판 모르는 환자에게 하는 게 옳지 않음은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때도 없었고 말이다.

팔로 4징 수술을 받은 이주희와 아이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

연예인 기획사와 우연히 인연을 맺고 자선 콘서트를 추진했지만 무산됐던 이야기를 전했다.

고용진은 아무런 대꾸 없이 최기석의 이야기를 들었다.

설명이 끝난 후에는 그저 턱만 쓸어내렸다.

"제가 환자분께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죄송하지만 못 들은 걸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푹 쉬시고 내일 소독할 때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당직실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당직실에서 눈을 떴다.

침대에서 영어 공부를 하다가 그대로 졸고 말았다.

멍하니 당직실을 훑자 맞은편 침대에서 민주혁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배를 내놓고 자고 있었기에 담요를 덮어 주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후 스테이션에서 필요한 물품을 챙겨 처치에 나섰다.

첫 번째 처치는 관장.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인턴들이 가장 싫어하는 처치 중 하나다. 처치 부위가 항문인데다가 간혹 커다란 실례를 저지르는 환자가 있는 탓이다.

드르르륵.

병실로 들어가자 처치를 해야 할 양순재 환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하아……."

양순재는 최기석의 손에 들린 처치 물품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고생하셨다면서요. 오늘은 시원하게 일 보셔야죠."

"……알았어."

양순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기석은 환자 주변에 천막을 친 후에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양순재가 무릎을 접은 채 옆으로 눕도록 만들고 수술용 장갑을 착용했다.

그다음 구멍이 뚫린 방포로 엉덩이를 덮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항문과 항문에 삽입할 튜브에 충분하게 윤활제를 발랐다.

"아…… 싫다."

양순재가 준비과정을 지켜보다가 몸서리를 쳤다.

"잠깐이면 돼요. 아시잖아요."

"원래 아는 게 더 무서워."

예순이 넘은 양순재의 투덜거림이 귀엽기만 했다.

"이제 시작합니다. 숨 깊게 들이마시고 힘 빼세요."

최기석은 손에 쥔 튜브를 양순재의 항문으로 서서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 관장 용액이 든 통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튜브를 조이고 있었던 겸자를 놓자 관장 용액이 튜브를 타고 항문으로 흘러내렸다.

"아흐으윽윽."

양순재가 몸을 배배 꼬았다.

"배 아프시다고 곧바로 화장실 가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꼭 참았다가 정말 못 참을 것 같을 때 가세요."

최기석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에게 배변 욕구에 대한 인내심을 각인시켰습니다.]

[관장 처치로 2 P.

P를 획득하셨습니다. 레어 젬의 1.5배 보상 추가 효과로 3의 P.

P가 저장되었습니다.]

[환자 바라기의 활력 효과로 체력의 일부를 회복합니다.]

최기석은 알람을 확인하고 병동을 나왔다.

어제 고민한 결과 굳이 P.

P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병원 일의 80퍼센트는 처치다.

지내다 보면 P.

P는 자연히 쌓인다.

P.

P를 저축했다가 나중에 젬 박스가 아닌 좋은 물품들을 구입하는 게 좋으리라.

최기석은 관장을 시작으로 나머지 처치를 이어 나갔다.

P.

P를 벌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어서 금상첨화였다.

회의 준비까지 일치감치 끝내고 회의실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회의실은 있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기에 마음 놓고 회화 공부를 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공부하는 게 어색했지만 꾹 참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남강준이 들어왔다.

환자에게 엄한 짓을 한 이후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야기 좀 하자."

"나 바빠."

"잠깐이면 돼."

두 사람의 시선이 충돌하면서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탁!

최기석은 교재를 덮고 남강준을 따라 휴게실로 갔다.

"자."

그가 소파에 앉자 남강준이 캔 커피를 뽑아서 내밀었다.

최기석은 별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번 일은 내가 미안했다."

남강준이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정말 돌았나 봐. 환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악몽으로 잠도 못 잤어."

확실히 남강준은 전에 비해 핼쑥해졌다. 생기가 없어서 산송장 같은 느낌마저 풍겼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저 너한테 다시 사과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따로 할 말은 없어."

"난 신부님이 아니야. 뜬금없이 고해성사 하지 마."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으로써도, 의사로써도 네 행동은 인간 말종의 짓이었어. 넌 네가 한 짓을 평생 안고 가야 돼."

"나도 알아."

남강준이 푹 고개를 떨어트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남강준이 운을 뗐다.

"네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후 모든 게 꼬였어. 우리 패거리는 완전히 깨져 버렸고 태호는 널 증오해. 나 역시 너에게 설화를 빼앗겼지."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다?"

"아니. 그저 우리들의 악연이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야."

"시비를 건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건 너랑 태호 새끼야. 괜히 날 붙들고 늘어지지 마."

최기석의 언성이 올라갔다.

사과를 하겠다는 인간이 살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난 이제 태호 안 볼 거다."

"그 말을 믿으라고?"

"안 믿어도 상관없어. 너 믿으라고 한 소리 아니니까."

남강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깡!

그가 던진 캔 커피가 쓰레기통에 맞아서 튕겨 나왔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하여간 너 앞으로도 계속 조심해라."

"……."

"난 너한테 손을 뗐지만 태호는 아니거든. 언제 어떤 식으로 너한테 보복할지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음번에는 훨씬 더 악랄한 수법을 쓸 거라는 거지."

"맘대로 하라 그래."

최기석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다음에는 가만있지 않아. 이번에 한 짓에 이자에 이자를 붙여서 되돌려 줄 거다."

"제발 그래 봐라."

남강준이 한마디 덧붙이고 회의실을 나갔다.

최기석은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빈 캔을 휴지통에 던졌다.

탕!

캔이 깔끔하게 휴지통에 들어갔다.

* * *

흉부외과의 오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남강준의 논문 발표 이후 당직을 섰던 민주혁이 밤새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밤사이 받은 특별 환자는 한 명입니다. 환자 이름은 고용진. 어제 밤 9시 경, 혈흉으로 응급실을 찾아서 흉관삽관 하고 1인실에 입원시켰습니다."

"고용진?"

조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지인이십니까?"

조지환의 반응을 읽은 민주혁이 되물었다.

"지인 정도가 아니지. 다음 주부터 우리 병원의 진료부 원장을 맡을 분이니까."

"지…… 진료부원장님이요?"

민주혁이 눈을 크게 떴다.

진료부원장은 말 그대로 병원 내 각종 진료과를 책임지는 수장이다. 병원장과 부병원장의 뒤를 잇는 병원의 3인자라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어제 처치 도중에 실수라도 했다면 대형사고가 벌어질 뻔했다.

"이야기도 없이 응급실을 찾았을 줄이야."

조지환이 검지로 톡톡톡 테이블을 두들겼다.

"어제 실수한 건 없겠지?"

"네. 흉관삽관은 제대로 마쳤고 현재 상태도 좋습니다."

민주혁은 속사포처럼 환자의 상태를 브리핑했다. 그제야 조지환이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수술환자 브리핑이 끝나고 본격적인 회진이 시작됐다.

의국 스태프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고용진이 있는 1인실이다.

"안녕하십니까? 부원장님."

조지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용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이미 이틀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안면을 튼 사이였다.

"과장님 오셨군요.

"몸이 안 좋으셨으면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저희가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정식으로 취임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민폐 끼치긴 싫습니다."

"민폐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조지환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혹시 어제 치료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조지환의 질문에 민주혁과 최기석은 바짝 긴장했다.

상대는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진료부원장임을 알았다. 혹시라도 불평한다면 아주 뜨거운 불똥이 튄다.

"물론입니다."

고용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특히 최 선생은 병원 바깥에서 제가 불편해하는 걸 보고 응급실까지 부축해 줬는걸요? 그게 바로 어제 받은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잘했어요. 최 선생."

조지환이 최기석을 보며 잇몸 웃음을 드러냈다.

조지환과 고용진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가 병실로 들어왔다.

바로 병원장 조양기다.

그도 뒤늦게 고용진의 입원 사실을 들은 모양이다.

병원장인 조양기와 흉부외과 과장이자 그의 동생인 조지환, 거기에 새로운 진료부원장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최기석은 왠지 모르게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병원장님."

조지환의 인사에 조양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지환의 옆에 서서 고용진을 응시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주 좋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병원 권력의 핵심 축에 서 있는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스태프들은 그저 가슴을 졸이며 적당한 리액션을 취할 따름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병원장이 뒤로 돌아 최기석을 응시했다.

잔잔한 눈빛 속에 숨기지 못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병원장은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이후 회진은 정상적으로 끝났다.

아침부터 수술이 있었기에 최기석은 환자의 침상을 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지이이잉.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부병원장이다.

"네, 부병원장님."

[최 선생. 됐어! 됐다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선 콘서트 하기로 했어. 오늘 오전 회의 때 이사장님이 어제 결정을 뒤집었다고!]

임병철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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