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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74화 (74/407)

당신이 바라는 기적 (2)

그날 오후.

점심식사를 마친 장혁필은 지석훈을 데리고 1층 카페로 내려갔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오전에 했던 팔로 4징증 수술이 머리를 스쳤다.

위험한 순간이 많았던 수술이다.

수술 중에 이렇게 긴장한 것은 올해 처음인 듯 했다.

"교수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한데요……."

"……."

"기석이 녀석 너무 봐주시는 것 아닙니까? 고작해야 인턴인데."

지석훈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인턴이면 어때?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교수님이 좋게 보셔서 그렇지 면허를 딴 지 1년도 채 안 된 뽀송뽀송한 놈입니다. 웬만한 일은 주혁이한테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주혁이는 그릇이 작아서 안 돼."

장혁필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민주혁은 그가 심장 마사지를 제안했음에도 두렵다며 뒤로 빠졌다.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은 피할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이 안 되는 타입이다.

의사도 일종의 승부사.

병을 이기기 위해서는 대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장혁필은 민주혁보다 최기석을 더 높게 샀다.

"그런데 기석이 같은 놈이 사람 잡는 스타일 아닙니까? 조만간 여기저기 쑤셔 대다가 크게 사고 칠 것 같은데……."

"있지도 않은 일 만들지 마."

장혁필의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그리고 아까부터 기석이를 깎아내리는 걸 보니까 어째 수상하다?"

"네?"

"주혁이, 혹시 네 라인이냐? 벌써부터 챙기려고?"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지석훈이 극구 부정했고 장혁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석훈의 태도만으로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기에.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장혁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하필이면 수술이 개판인 날에 늙은이가 참관을 하고 말았다.

이래서는 심장 파트를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그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지 모른다.

지이이이잉.

가운에 넣어 둔 휴대폰이 떨었다.

번호를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별일은 없고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과장님이세요?"

"어. 먼저 올라간다."

장혁필은 고개를 끄덕이고 흉부외과 과장실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똑. 똑. 똑.

노크하고 들어가자 조지환이 손을 들어 올리며 아는 체했다.

"거기 앉아."

"네."

조지환과 장혁필이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라기보다는 상대를 탐색하는 분위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술 참관 오신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오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을 썼을 텐데 말입니다."

장혁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미나 일정이 하나 취소돼서 말이야."

조지환이 담담하게 말했고 장혁필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여우 같은 노인네에게 틈을 보이면 곧바로 공격을 당한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나저나 오늘 수술은 좀 별로였어. 보는 내가 다 긴장할 정도였으니까.

"면목 없습니다."

"소아심장 수술 쪽은 자신 없나?"

조지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뿐입니다. 다음에는 잘할 수 있습니다."

"으음……."

장혁필의 대답에 조지환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장 교수가 생각하기에 우리 흉부외과에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조지환의 질문이 은은하게 퍼졌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팠다.

"왜? 대답이 없어? 그동안 생활하면서 느낀 게 있을 텐데?"

조지환의 압박에 장혁필은 신중하게 할 말을 정리했다.

"제 생각에 우리 과에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과장님이 계신데 우리 과에 무슨 문제가 뭐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잘 될 일만 남지 않았습니까?"

"50점짜리 대답이군."

조지환이 말을 이었다.

"송 교수가 나가게 돼서 후련하지만 그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건 자네도 잘 알 거야."

"네. 맞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심장 클리닉을 개편할 생각이야."

"개편이요?"

장혁필의 되물음에 조지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계획은 다름 아닌 특수 수술의 브랜드화였다.

다른 병원에서 잘 하지 않는 수술을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전문화하겠다는 것이다.

"바티스타 아니면 세이버, 둘 중에 뭘 더 잘할 수 있나?"

바티스타 수술과 세이버 수술은 심장이식의 대체제로 선택할 수 있는 수술로, 기능이 떨어진 좌심실을 축소시키고 성형하는 수술이다.

"둘 다 자신 있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고민해 봐. 내 이름을 걸고 처음 시도하는 계획이 될 테니까."

장혁필의 대답에 조지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그 말을 안했네. 송 교수가 가면 부교수 자리가 비잖아."

"네."

장혁필은 대답하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내심 조교수인 그를 조지환이 부교수로 올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본래 의진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직급이 또 올라가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조지환의 입김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일단 공석으로 둘 생각이야."

"네? 하지만 그러면 수술 스케줄이 꼬일 텐데요."

"공석으로 둔다는 거지 사람을 안 뽑는다는 소리는 아니지."

조지환의 말에 장혁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지환이 꿍꿍이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늙은 여우는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걸까.

"제종대 흉부외과에 권일수 교수를 데려올 생각이야."

권일수는 국내 소아심장 파트에 권위자 중 한 명이다.

그동안 수많은 고난도 수술을 성공시켰으며, 대내외적인 인지도 면에서도 장혁필을 앞섰다.

"그 뜻은……."

"부교수 자리를 공석으로 하되 두 사람을 공동 조교수로 쓰겠다는 말이야. 선의의 경쟁을 해서 더 좋은 성과를 보인 사람에게 부교수를 맡겨야지. 자네 생각은 어때?"

"역시 과장님다운 혜안이십니다."

장혁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나야 장 교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줬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단 말이지."

"괜찮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실력으로 증명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 봐."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장혁필은 인사를 하고 과장실을 떠났다.

쿵!

문이 닫히자 잘 포장되었던 영업용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과장실 문을 노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일과를 끝내고 신생아 중환자실을 찾았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주희의 침상.

이주희는 환자 감시 장치를 주렁주렁 단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주희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이가 힘든 수술을 버텨 줘서, 이렇게 무사히 살아 줘서 고마웠다.

'다행이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상태는 양호했다.

수술이 끝난 후 심실세동이 온 것은 아무래도 인공심폐기가 멈췄던 부작용이 아닐까 싶었다.

최기석은 한참 동안 이주희를 내려다보았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료되는 기분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중환자실을 나서는데 김지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덕분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어요."

"수술은 주치의 선생님이 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주 조금 거들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수술 전에 일어난 발작을 인턴 선생님이 고쳐 주셨다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하던데요."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얼마 전에 봤던 원무과 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병원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보호자 분. 힘드시겠지만 이번 달 안에는 중간 수납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희도 힘들어져서요."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김지희가 풀 죽은 모습으로 영수증을 받았다.

수술비가 추가되고 거기에 발생한 비급여 항목이 꽤 많았기에 입원비가 껑충 뛰어올랐다.

김지희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었다.

"선생님까지 시무룩해 하실 필요 없어요."

김지희가 최기석을 보며 미소를 짜냈다.

"이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인데요."

"그건 그렇지만……."

"하여간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묘한 게 선생님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 덕분에 주희도, 저도 이렇게 병원 생활을 잘 이겨 나가고 있다고요."

김지희가 할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눈물을 참기 위해 자리를 떴음을 최기석은 잘 알았다.

그래서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수술은 끝났지만 모녀 앞에 마냥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장병이 언제 또 도질지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김지희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전쟁과 다를 바 없으리라.

두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최기석은 씁쓸함을 지우지 못한 채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추스른 뒤 어제 구입한 영어 책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의학 공부가 아닌 순수한 영어 공부.

수능을 준비하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송명진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최기석은 영어 공부에 빠져 송명진이 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다.

'정말 대단해.'

송명진은 최기석을 보며 혀를 내둘렸다.

과거의 그조차도 최기석만큼 열정적으로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일과를 완벽하게 끝내고서도 논문 공부에, 집도 연습에, 영어 공부까지 하다니…….

이만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은 그 어떤 의사도 불가능하다.

만약 최기석이 이런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그도 머지않아 따라잡히리라.

제자에게 자극을 받은 송명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이어폰을 빼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노곤했다.

문득 확인한 체력은 5, 공부하기 전에 비해 두 단계가 떨어진 것이다. 수술 어시를 서거나 처치를 할 때보다 영어 공부를 할 때 체력이 더 떨어진다는 게 우스웠다.

그는 회의실 뒷정리를 하고서 정설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잤어?"

[응. 안 그래도 막 일어났어.]

정설화는 오늘 절반짜리 오후 오프가 있었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자마자 푹 곯아떨어졌다.

"날씨도 좋은데 바깥에서 좀 걸을까?"

[좋아.]

정설화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은 후 병동을 떠났다.

그런데 기숙사 근처 공원에 도착한 순간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정설화가 남강준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할 말 없어."

"잠깐이면 된다니까."

남강준이 정설화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끄는 순간 가슴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랐다.

최기석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강준의 팔을 뿌리치고 정설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남강준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치면서 주먹이 오고 갈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넌 껴들지 마. 설화랑 이야기 좀 하려는 거니까."

"설화가 싫다잖아."

"그러니까 네가 왜 거기에 껴드는 거냐고! 네가 설화를 알면 얼마나 아는데."

"적어도 너보단 많이 안다."

"너 나랑 설화가 고등학교 동창인거 모르냐?"

남강준이 코웃음을 쳤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지금 설화랑 사귀고 있으니까."

최기석의 폭탄발언에 남강준이 화들짝 놀랐다.

정설화조차 아무 말 못하고 눈을 깜빡거릴 따름이다.

"설화야 진짜야?"

남강준의 물음에 정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강준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별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정설화가 상황을 설명했다.

최기석을 보기 위해 나오다가 공원에서 남강준을 만났다.

그런데 남강준이 끈질기게 이야기하자며 달라붙었다고 한다.

"근데 괜찮을까? 강준이가 우리 사귀는 거 퍼트리고 다니면……."

"어쩌면 그게 속 편할지도 몰라."

"왜?"

"소문나면 다른 남자의사들이 너한테 안 찝쩍거릴 테니까."

최기석의 대답에 정설화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멋있네. 우리 기석이."

"그걸 이제 알았어?"

"걷지 말고 거기로 가자.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둘이 있고 싶어."

"그래."

최기석은 정설화와 아지트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에 나란히 누워서 라디오를 들었다.

요즘은 이렇게 라디오를 함께 듣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다음 달이면 가을 특집 야외 콘서트가 있는대요. 청취자분들 많이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DJ의 말이 문득 머리를 때렸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주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휴대폰을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그는 정설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통화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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