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끝을 잡고 (6)
아지트에 내려와서 집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CABG(관상동맥 우회술)와의 긴 싸움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되리라.
최기석은 타이머를 준비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소 심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전쟁이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그의 집도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삐비비비빅!
타이머를 작동시키고 수술에 들어갔다.
송명진의 CABG 동영상을 질리도록 봤기에 수술 과정이나 필요한 도구를 쓰는데 거침이 없었다.
스으으윽.
메스로 좌측 내흉동맥을 박리했다.
박리한 동맥을 이용해 협착이 있다고 가정한 좌전하동맥으로 우회로를 만들어 주었다.
수술이 진행되면서 아지트에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흡입기가 피를 빨아들이는 소리.
전기 소작기가 출혈 부위를 태우면서 나는 탄 냄새, 봉합사를 자르면서 가위가 내는 짤칵 소리 등등.
아지트는 수술실을 방불케 했다.
'이 정도면.'
집도하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예상이 맞다면 현재 그의 수술 속도는 송명진의 집도 속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어시스트가 없다는 것을 감안해도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짤칵!
청량한 가위 소리와 함께 수술이 끝났다.
드디어 CABG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최기석은 한 손을 천장으로 치켜들며 기쁨을 만끽했다.
CABG를 완성했다는 것은 웬만한 수술을 집도할 수 있다는 능력의 반증이다.
또한 과거의 자신을 넘어섰다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했다.
띠링!
[숨겨진 임무, 아무도 모르는 위대한 수술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난 왼손잡이야' 스킬이 최대 레벨인 Lv.3으로 상승합니다. 스킬 레벨 최대 상승으로 인해 '난 왼손잡이야' 스킬이 '난 양손잡이야' 스킬로 변경됩니다.]
[외과적 처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그를 축하하듯 알림이 이어졌다.
최기석은 뒷정리를 하고 서둘러 병동을 향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CABG를 했더니 컨퍼런스 시간이 다가왔다.
병동으로 올라가자 남강준이 처치와 회의 준비까지 모두 끝냈다.
나름 기특한 짓을 했지만 인사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환자에게 한 짓도, 정설화에게 찝쩍거린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탁!
최기석은 챙겨온 영어 서적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영어공부는 저녁에 해야 할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최기석과 남강준은 회의실에 들어오는 선생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중에는 윤지혜도 섞여 있었다.
최기석이 인사하자 그녀는 좋은 아침이라고 대답하며 방긋 웃었다.
"말도 안 돼. 얼음마녀가 말을 하다니."
"심지어 웃기까지 했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윤지혜의 전례 없는 화답에 다른 스태프들이 조용히 쑥덕거렸다. 의국 내의 그 누가 인사를 하더라도 윤지혜는 무표정하게 고갯짓을 해 왔다.
그런데 오늘 대기록이 깨지고 만 것이다.
그녀가 변한 이유를 아는 최기석만이 쑥덕거리는 이들을 보며 미소 지을 뿐이다.
송명진과 장혁필, 조지환이 차례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는 화기애애했다.
조지환이 회의 도중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기 때문이다.
송명진의 메이죠 행이 결정되면서 조지환은 최근 부쩍 유쾌해졌다.
회의에 이어 회진까지 별일 없이 끝났다.
최기석은 콜폰으로 시간을 살폈다.
한 시간 후에 이주희의 팔로 4징증 수술이 있었고, 삼십 분 후에 송명진의 판막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 오전 수술은 이것 두 개뿐.
다른 때와 달리 시간이 널널했다.
"야. 너 뭐야!"
민주혁이 다가와 다짜고짜 헤드락을 걸었다.
"아파요. 선배. 왜 그러세요."
"네 죄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엉?"
"말을 해야 알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쵸코과자뿐이라고요."
최기석의 농담에 민주혁이 헤드락을 풀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에 어떻게 된 거야?"
"……."
"왜 윤 교수님이 너한테 인사말을 하고 웃어 주냐는 말이지. 상식적으로 말이 돼?"
"그게…… 그럴 일이 있어요."
"어쭈. 하늘 같은 선배한테 말 못하겠다 이거냐?"
민주혁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기에 최기석은 어쩔 수 없이 어제 사건을 털어놓았다.
장혁필에게 부탁을 받아 윤지혜에게 휴대폰을 준 것, 정원에서 대화를 나눈 것 등등을 말이다.
물론 엘리베이터 사고는 쏙 뺐다.
"짜식. 운 좋았네."
민주혁이 최기석의 어깨를 툭 치고 말을 이었다.
"하여간 윤 교수님 어떻게 해 볼 생각 마. 이유는 알지?"
"네."
"가 봐."
최기석은 민주혁과 헤어진 후 신생아 중환자실을 찾았다.
오늘 수술받는 이주희를 살피기 위함이다.
이주희는 저번과 달리 힘없는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최기석이 까꿍하며 장난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다.
굳이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상태가 악화되었음을.
"주희도 오늘 수술한다는 걸 아는 것 같아요. 아침부터 쭉 가라앉아 있더라고요."
중환자실 간호사 문지주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정말이네요. 이렇게 힘이 없는 걸 보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바로 그 때, 이주희가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심하게 헐떡거렸다.
얼굴까지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으아아아앙!"
때마침 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시끄럽게 울어 댔다.
신생아 중환자실이 한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어머! 어떡해!"
"침착하세요."
최기석은 발을 동동 구르는 문미주를 진정시키고 이주희를 엎드려 눕혔다.
그 상태에서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려 주었다.
이것은 슬흉위 또는 가슴 무릎 자세로 불리는 자세다. 이 자세를 하면 팔로 4징으로 무산소 발작이 일어났을 때 큰 도움이 된다.
'주희야. 제발.'
이주희의 자세를 유지시켜 주며 간절히 빌었다.
가슴 무릎 자세로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이주희의 발작이 가라앉고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최기석과 문미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 쌤. 대단하네요. 얘가 숨이 넘어가는데 어쩜 그렇게 침착해요?"
"의사가 침착해야 환자가 살죠."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이주희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불길함은 마치 송명진과 대동맥 박리 수술을 들어갔을 때를 닮았다.
혹시 이번에도 환자가 죽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교수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최기석이 중환자실을 나오는데 대기실 쪽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주희의 보호자인 김지희와 그녀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그놈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김지희의 어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능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너 임신이나 시키고 말이야."
"그만해. 엄마."
"그만하긴 뭘 그만해! 딸년 인생이 망가졌는데 그만하게 생겼어?"
"……."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응? 아비도 없는 애, 혼자서 어떻게 키울 거냐고. 네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이 험한 세상에 혼자 애를 키워."
"알아서 할게."
"지금까지 알아서 한 게 이 모양 이 꼴인 거 몰라? 넌 대체 언제 철들래. 어이구. 못 살아!"
최기석은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듣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남의 가족 일에 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다만 요 며칠간 지켜본 김지희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했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아이가 심장병에 걸렸다.
그녀의 부모마저 저렇게 거칠게 나오니 그녀는 대체 누구에게 기댄 단 말인가.
어떤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찰싹.
최기석은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무거워지는 기분을 다잡았다.
시간이 흘러 팔로 4징증 수술 시간이 다가왔다.
이주희가 무산소 발작을 했던 만큼 수술 시간이 삼십 분 앞으로 당겨졌다.
최기석은 이주희가 누워 있는 베드를 끌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오늘의 스태프는 다음과 같았다.
집도의, 심장외과 펠로우 장혁필.
퍼스트, 심장외과 펠로우 지석훈.
세컨드, 레지 2년 차 민주혁.
서드, 인턴 최기석.
최기석이 스태프들의 상태를 살핀 결과 모두 체력 및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즉 누군가가 몸이 안 좋아서 수술 경과가 나빠질 일은 없다.
잠시 후 스크럽을 끝내고 다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스태프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라포 2단계 이른 민주혁에게 특수효과 기민함이 부여됩니다.]
[기민함: 처치 및 보조 속도가 1.5배 증가.]
최기석은 격려를 사용하고 제 자리에 위치했다.
수술대에 누워 있는 이주희를 내려다보자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아파왔다.
이주희는 한참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랄 시기에 수술대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힘내라, 주희야.'
속으로 이주희를 응원했다.
마취의가 이주희를 전신마취하고 지석훈이 이주희의 몸을 넓게 소독했다.
"지금부터 팔로 4징증에 대한 완전 교정술을 실시한다."
장혁필의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려 퍼졌다.
"메스."
장혁필이 간호사에게 메스를 받아 이주희의 목 아래부터 명치까지의 피부를 갈랐다.
뿌드드득. 뿌드드득.
이후 민주혁이 톱을 들고 이주희의 흉골을 반으로 갈랐다. 대동맥 박리 환자 때처럼 손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흉골의 절단면도 상당히 깔끔했다.
"목공 해도 되겠는데?"
장혁필이 민주혁을 칭찬했고 민주혁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윽고 대동맥과 정맥에 캐뉼라를 삽관하고 인공심폐기를 돌렸다.
본격적인 수술에 서막이 오른 것이다.
"견인기."
"네."
최기석은 이주희의 가슴에 리트랙터를 걸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용의 눈으로 수술 시야를 확보하고 동영상 촬영에 나섰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릿속으로는 아침에 읽은 팔로 4징증 논문을 되새김질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만반의 채비를 갖춘 셈이다.
"메스."
장혁필이 메스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우심방을 절개했다.
심장내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심방 절개만으로는 시야를 다 확보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우심실까지 절개를 이어갔다.
"흐음……."
장혁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팔로 4징증 수술의 첫 번째 단계는 좌심실과 우심실을 나누는 벽에 난 구멍을 메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주희의 경우 이 구멍의 크기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손상된 부위가 대동맥판 조직하부까지 이어질 정도다.
"패치. 5-0 prolen."
장혁필의 외침에 소독간호사가 물품을 건넸다.
장혁필은 손상이 난 부분에 패치를 덧대고 단순 단속 봉합으로 문합해 나갔다.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봉합 장면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어설프게 손을 놀렸다가 나중에 봉합 부위가 터지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기우라는 듯이 장혁필은 깔끔하게 봉합을 끝냈다.
다음은 좁아진 우심실 유출로를 넓혀 줘야 할 차례.
"메스."
장혁필이 메스를 받아서 우심실 유출로의 비대해진 근육을 잘라 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불길한 전자음이 수술실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