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끝을 잡고 (5)
그의 말에 침대에 누운 인물이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침묵을 지키며 자는 연기를 계속했다.
최기석은 한숨을 쉬며 가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누워 있는 환자가 강은하가 아닌 이유.
그것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증상 때문이다.
강은하는 수술이 끝난 후에도 흉통과 팔목 통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누워 있는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즉 강은하가 대타를 침상에 눕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래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돼요. 만약 사고 터지면 은하 씨랑 그쪽도 재미없을 걸요?"
은근한 협박에 가짜 환자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 후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은 여자는 강은하와 상당히 닮았다.
"누구시죠?"
"저는…… 은하 언니 친동생 강지은이에요. 그게…… 언니가 병원에 있는 게 너무 답답하다고 해서…… 잠깐만 대신 병원에 있어주면 안 되냐고 했거든요. 그래서 잠깐……."
강지은이 주눅 든 표정으로 말했다.
"하아……."
최기석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VIP 환자가 병동을 탈출하다니,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은하 씨는 어디 있죠?"
"저도 잘 몰라요. 잠깐 바람만 쐬고 온다고 해서요."
"연락은요?"
"돈만 가지고 나가서 안 돼요."
강지은의 대답에 한숨이 깊어졌다.
몰래 빠져나간 강은하에게 일이라도 벌어지면 흉부외과는 발칵 뒤집어진다.
강은하가 강지은과 약속한 대로 제 시간에 복귀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
우선 그녀를 찾는 게 급선무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간호사가 라운딩을 도는 모양이다.
'빨리.'
최기석이 입으로 신호를 보내자 강지은이 마스크를 쓰고 이불을 덮었다.
"초 인턴 쌤. 뭐해요?"
"잠깐. 은하 씨 상태 좀 보고 있었어요."
"자고 있는 사람을요?"
강하나의 지적에 가슴이 뜨끔했다.
강하나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최기석의 옆에 나란히 섰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지금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간호사들이 강은하가 나간 것을 모른 채 강은하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강하나가 강은하의 무단 외출을 안다면 길길이 날뛸 테니까 말이다.
"음……."
강하나가 누워있는 강지은과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초 인턴 쌤. 이러면 안돼요."
"뭐…… 뭐가요?"
"아이돌이 자는 거 훔쳐보려고 들어왔죠? 맞죠?"
"저…… 저를 변태로 몰지 마세요!"
"흥분하는 걸 보니까 수상한데…… 오늘만 너그럽게 봐줄게요."
강하나가 피식 웃으며 병실을 떠났다.
'십 년 감수했네.'
최기석은 강지은에게 주의를 주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사실 강은하의 탈출을 알았을 때 짚이는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택시를 타고 곧바로 선유도 공원으로 향했다.
최기석은 공원 입구에 있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며 주변을 훑었다.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캄캄한 하늘, 그 위로 떠 있는 보름달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리 아래로는 검은 물줄기가 흘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말하는 힐링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정신 차리자.'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 공원 내부를 돌았다.
인근 주민들과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로 인해 제법 사람이 많았다.
눈을 부라리며 공원을 방황하던 중, 외진 곳에서 하염없이 강을 쳐다보고 있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최기석은 그녀가 강은하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강바람 쐬니까 마음이 좀 편해져요?"
강은하의 옆에 서서 말을 걸자 그녀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서…… 선생님?"
"놀랐죠?"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고생을……."
"별로 고생은 안 했어요."
"네?"
"경치 좋은 곳을 걷다보니까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잠자코 있던 강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곳에 온다는 사실은 누구도 몰랐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그런데 최기석은 이곳을 단번에 찾아왔다.
"아. 그거야 예전에 이야기를 들어서……."
최기석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의 휴식처가 선유도 공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정해진이다.
지금의 최기석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들었다는 거죠?"
강은하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그게…… 정확히 말하면…… 정해진 선생님에게 들었습니다."
"정해진 선생님이요?"
"네.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던 그분의 심장을 제가 받았습니다. 유품 중 일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은하 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최기석은 속사포처럼 이야기하고 한숨을 돌렸다.
즉흥적으로 지어낸 소설을 강은하가 믿는 기색이다.
"그럼 저랑 정 선생님의 관계도 아시겠네요?"
"네. 정 선생님이 맡은 첫 번째 환자가 은하 씨라는 걸, 당시 은하 씨가 연습생이었다는 걸 압니다."
"정 선생님.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강은하가 강을 쳐다보며 운을 뗐다.
"일하는 건 서툴렀지만 병원에 있는 누구보다 환자를 챙겼어요. 특히 제가 입원하면서 아이돌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정 선생님이 저를 붙잡아 줬어요."
"……."
"정 선생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강은하의 말이 은은하게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바쁜 스케줄 속에서 전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이제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한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혹시 저번에 매니저분하고 싸운 이유는 뭔가요?"
"아. 그거요? 제가 아이돌 그만둔다고 했거든요."
강은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요? 이제 데뷔한지 얼마 안 됐잖아요. 인기도 막 얻기 시작했고."
"지쳐서요."
강은하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돌이 됐지만 아이돌 생활이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지옥 같은 스케줄과 먹는 것 없이 이어지는 육체활동.
본인의 감정은 다 억누르고 다른 사람 앞에서 예쁘고 귀엽게만 보여야 한다는 강박 등등.
그녀가 기대한 아이돌 생활과 지금의 생활은 괴리가 심했다.
한편 최기석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강은하를 쳐다보았다.
질끈 묶은 뒷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흔들리고 있는 머리가 아님을 알았다.
"정 힘들면 그만둬야죠."
"네?"
"억지로 할 거면 아예 아무것도 안하는 게 낫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의외의 대답이네요. 매니저 오빠한테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저보고 미쳤다고 하던데. 이제 막 뜨기 시작했는데 왜 그만두냐고요."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니까요."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보세요."
"……."
"힘들면 그만두는 게 맞지만 딱 한 번만 더 무대에 서 보고 나서 결정하는 건 어때요?"
"한 번 더요?"
"네. 사람이라는 게 당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일이 지치고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들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왜 이렇게 힘들까.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라고 말이죠."
"……."
"그런데 그 생각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최기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하루 수십 번씩 생각했어요. 병원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이에요. 내가 항문에 줄이나 꽂고 주사기나 놓으려고 의사가 됐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요?"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제 일이 좋아요. 환자들이 건강하게 퇴원할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하죠."
최기석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응시했다.
"사실 중요한 건……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예요."
"……."
"힘들다고 포기하기 전에 한 번 더 무대에 서 봐요. 다시 한 번 무대에 섰을 때 아무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과감하게 그만둬도 좋을 것 같아요."
최기석의 말에 강은하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선생님 이야기대로 해 볼게요."
강은하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과거 진성대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보여 주었던 미소와 닮았다.
당차고 씩씩했던 때의…….
"그만 갈까요?"
"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의진대병원으로 돌아갔다.
가는 도중 강은하는 최기석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공원에서 대화를 나눈 후부터 그에게서 정해진의 모습이 겹쳐졌다.
마음씨 따뜻하고 자상했던, 그녀가 남몰래 좋아했던 그 사람이 말이다.
쿵! 쿵! 쿵!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이 요동쳤다.
잘생긴 남자 아이돌을 봐도 미동 없던 심장이 오늘따라 난폭하게 뛰었다.
"다 왔네요."
최기석이 택시비를 내고 먼저 택시에서 내렸고 강은하가 그 뒤를 따랐다.
"저기요. 선생님.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제 연락처요?"
"네. 나중에 몸이 불편하면 상담이라고 받고 싶어서요."
"그럼 휴대폰 주세요."
"저 휴대폰 없어요."
강은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아이돌은 이미지 관리나 연애 방지 등을 위해서 소속사에서 휴대폰을 금지시킨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피곤하겠네요."
"그래도 다음 활동 때는 휴대폰 금지령이 풀릴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네요. 제 번호는 병실에 들어가서 적어 드릴게요. 그전에 잠깐 서점 좀 들를까요?"
최기석의 제안에 강은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인근 서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서점 내부를 이리저리 돌다가 멈춘 곳은 바로 영어 서적들이 놓여 있는 곳이다.
"여기 있다."
최기석은 망설임 없이 시퍼런 책과 시뻘건 책을 손에 쥐었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영어 회화 책과 리스닝 서적이다.
송명진의 부름을 받기 위해서, 메이죠 클리닉에 가기 위해서 영어 공부는 필수.
앞으로는 처치 공부에 영어 공부까지 박차를 가해야 한다.
책값을 계산하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돌아갔다.
"아까 면회 왔던 강은하 씨 보호자예요. 전해 줄 거만 주고 잠깐 이야기하고 간다니까 봐주세요."
최기석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스테이션 간호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간호사들과 노닥거리는 사이, 강은하는 병실로 돌아가 동생과 옷을 바꿔 입었다.
"수고하세요."
강지은이 병동을 떠나면서 무단 외출은 완전범죄로 끝났다.
최기석은 간호사들과 대화를 마치고 강은하의 병실로 향했다.
"오늘은 무사히 잘 넘어갔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안 돼요. 알았죠?"
"네."
강은하가 웃으며 최기석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번호를 알려 달라는 표시였기에 최기석은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메모지를 돌려주었다.
"근데 선생님은 제 사인 필요 없으세요? 다른 선생님들이나 환자분들은 저 보면 사인부터 해 달라고 하던데."
"저까지 그러면 은하 씨가 피곤하잖아요."
최기석은 빈말을 했다.
상대가 어떤 유명한 사람이 됐든 사인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전 괜찮아요."
"그러면…… 혹시 20장 정도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전 했던 이야기랑 지금 하는 이야기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부탁드려요."
"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강은하는 최기석이 가져온 A4용지에 사인을 해 주었다.
"피곤할 테니까 푹 쉬세요. 내일 또 뵙죠."
최기석은 강은하의 사인을 챙겨 기숙사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본인에게는 사인이 필요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사인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보육원 아이들이 사인을 좋아하지 않을까.
한편 최기석이 떠난 후 강은하는 그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싹 트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송명진이 보낸 준 논문을 살폈다.
그리고 감상문을 보낸 후 그동안 읽었던 논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파일로 들어가자 팔로 4징증에 대한 논문이 열 개 정도 드러났다.
최기석은 찬찬히 논문을 읽어갔다.
오늘은 이주희의 팔로 4징증 수술이 있는 날이다.
중요하고 어려운, 그가 보조로 들어가는 수술이기에 내용을 복습할 필요가 있었다.
팔로 4징증.
다른 말로는 TOF(Tetralogy of Fallot)라고 불리기도 한다.
팔로 4징증은 선천성 심장 질환의 일종으로 심실중격 결손, 폐동맥 협착, 대동맥기승, 우심실 비대의 네 가지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장기 미션인 '최고를 위해서'에 속한 수술이기도 했다.
"으음……."
논문을 훑는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소아의 심장 수술은 성인의 심장 수술보다 섬세한 솜씨가 요구된다.
문제는 의진대 흉부외과에는 소아 수술에 특출 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송명진이라는 만능에 가까운 명의가 있지만 지금은 판막 수술만 맡고 있었다.
즉 오늘은 장혁필이 소아 환자를 얼마만큼 케어할 수 있는지가 드러나는 자리다.
"잘하시겠지."
최기석은 그대로 기숙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