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끝을 잡고 (4)
최기석은 바닥에 쓰러진 윤지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휴대폰 플래시로 그녀를 비추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하아…… 하아…… 하아……."
최기석의 질문에 윤지혜는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눈동자는 살짝 풀려 있었으며 팔다리를 만져 보니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체력: 4/10
주 증상: 호흡곤란 / 피로 / 실신
아픈 부위: 신경 / 정신
진단명: 과호흡 증후군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이 환자는 폐소 공포증을 앓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증상을 확인한 순간 아차 싶었다.
최기석은 손에 들었던 비닐 봉투 안의 쓰레기들을 전부 바닥에 쏟았다.
이후 비닐 봉투를 윤지혜의 얼굴에 씌어 주었다.
과호흡 증후군이란 호흡을 통해 이산화탄소가 과잉으로 빠져나가는 증상을 말한다.
이때는 자신이 내쉰 숨을 자신이 마시게 하여 이산화탄소를 보충해 줘야 한다.
어둠 속에서 윤지혜의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교수님. 괜찮아요."
최기석은 계속해서 윤지혜를 다독였다.
과호흡 증후군의 원인이 폐소 공포증에 있었기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윤지혜의 머리에 씌운 봉투가 잘 유지되도록 신경 쓰면서 그녀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마사지를 하면 혈액순환이 도움이 되기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윤지혜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본 상태도 보통으로 돌아왔다.
"무…… 무서워."
윤지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댔다.
휴대폰 플래시가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깜깜하다. 암흑이 그녀를 당장이라도 먹어 치울 것만 같았다.
윤지혜는 있는 힘을 쥐어짜서 일어났다.
쿵! 쿵! 쿵!
"여기 사람이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윤지혜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렸다.
의미 없는 외침 속에 두려움은 더욱 깊어졌다.
이대로 어둠 속에 질식해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안정되어 있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다.
최기석이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진정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
"119에 전화했으니까 금방 도와주러 올 거예요. 우리 조금만 더 참아 봐요."
최기석은 침착하게 윤지혜를 안정시켰다.
윤지혜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과호흡 증후군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렇게 발작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진다면 손쓸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질지 모른다.
"무서우면 제 손을 꽉 잡으세요."
최기석이 허리에 둘렀던 손을 풀어 윤지혜의 손을 잡아 주었다. 윤지혜는 최기석에게 등을 기댄 후 그의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계속 괜찮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속삭이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
얕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
거기에 서로 꽉 쥔 손까지.
혼자가 아니라는, 이 어둠을 이겨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타다다다닥.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119 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듯 했다.
"우리 이제 살았어!"
윤지혜는 그제야 아이처럼 방방 뛰었고 최기석은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 사람 있어요?"
"네. 여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원들이 작업하면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마치 천국의 빛 같았다.
터어엉!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하게 열렸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119 대원들에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왔다.
문득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고작 십여 분이 지났다.
갇혀 있을 때는 일 분이 십 분처럼 느껴졌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그대로 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아까보다는."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정이 더 필요하실 것 같은데. 저랑 걸으실래요?"
"너 오프잖아. 기숙사에서 쉬어."
"잠깐 걷는 건데요. 뭐."
최기석의 제안에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숙사 근처의 산책로를 걸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무더위가 물러가면서 밤바람은 한층 시원하고 상쾌해졌다.
"고마워."
윤지혜가 먼저 운을 뗐다.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많이 무서우셨을 텐데, 교수님이 잘 참으셨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윤지혜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문득 최기석과 스킨십 하던 때를 떠올린 것이다.
"그…… 그런 것도 없지 않지."
윤지혜는 최기석의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야릇한 감정을 지우고 싶었다.
의사에게 감정은 사치다.
환자를 향한 감정도, 동료를 향한 감정도, 심지어 자기 자신을 위한 감정도.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질병에 대한 투쟁심뿐이다.
아버지의 말을 그녀는 아직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교수님. 혹시 폐소 공포증 있으신가요?"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어렸을 때 시골에 내려가서 우물에 빠진 적이 있거든. 그때부터 쭉 이래."
"그럼 치료는……."
"어렸을 때 잠깐 받고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받았어. 느낌이 안 좋을 때는 알아서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윤지혜의 말투는 담담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오늘 일은 다른 스태프에게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많이 진정됐으니까 네 볼일 봐."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윤지혜가 다시 감사를 표하는 순간 알림이 귓가를 때렸다.
띠링!
[윤지혜와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윤지혜(의료인): 2단계 - 믿음]
[특수 라포, 믿음의 사슬이 형성되었습니다.]
[믿음의 사슬]
- 대상이 당신에게 호의를 가졌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지지하고 존중하며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자발적으로 도우려 합니다.
- 당신이 먼저 상대를 배반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든든한데?"
최기석은 상태창을 보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의국의 고위 스태프 중 확실한 자신의 편이 생겼다.
상당한 수확이다.
지이이이잉.
가운에 넣어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때마침 정설화가 전화를 걸었다.
"어. 설화야."
[오늘 오프지? 지금 어디야?]
"기숙사 앞에 정원. 우리 과 교수님하고 산책하고 있었어. 안 그래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몰라!]
착각인지 몰라도 정설화의 목소리가 쌀쌀 맞았다.
"지금 당직실이지? 내가 거기로 갈까?"
[아니. 나 기숙사야. 잠깐 공부할 책 가지러 왔어.]
"그럼 정원에서 볼까?"
[내려갈게.]
정설화가 통화를 끊었고 최기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수를 빙빙 돌았다.
"설화야!"
최기석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정설화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정설화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오전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했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걸까.
"내가 들어줄게."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어."
정설화가 최기석의 손길을 뿌리쳤다.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그런 거 없어."
과거의 최기석이라면 정설화의 말을 듣고
'어. 그래?'
하고 흘려버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설화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녀를 살필 줄 알게 되었다.
"없기는 뭐가 없어. 얼굴에 나 언짢은 일 있다고 적혀 있는데. 잠깐 앉자."
최기석이 제안에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빨리 말해 봐."
최기석은 정설화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자신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아까 그 여자 누구야?"
"여자?"
"정원에서 같이 걸었던 여자."
정설화가 고개를 들어 최기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최기석은 그제야 정설화가 뾰족하게 구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그와 윤지혜가 걷는 것을 목격하고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정설화야 잔뜩 뿔이 난 상황이지만 모든 것을 아는 그에게는 지금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두 달 전에 들어온 우리 과 교수님이야."
"거짓말. 교수면 적어도 삼십 대 중반일 텐데, 어떻게 나랑 동갑으로 보여?"
"못 믿겠으면 보여줄까?"
최기석은 휴대폰을 꺼내서 병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흉부외과 스태프를 검색하자 윤지혜의 프로필이 자세하게 드러났다.
프로필을 확인한 정설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말 맞지?"
"그…… 그건 그런데 왜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어?"
"설명하자면 긴데."
최기석은 엘리베이터에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물론 윤지혜를 안심시키기 위해 스킨십을 했던 부분만 빼고서 말이다.
구체적인 설명에 정설화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떨었던 사람인데 같이 이야기하면서 진정시켜 주려고 했지. 매정하게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알았어."
"정말 알아?"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거?"
최기석의 시간차 공격에 정설화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최기석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의심하지 마."
최기석은 정설화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미안."
"뭐가?"
"내가 괜히 널 의심했잖아."
정설화가 최기석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네가 다른 여자랑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니까."
"이제 아닌 건 아니까 괜찮지?"
"응."
최기석은 귀엽게 대답하는 정설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정설화가 고개를 휘휘 젓더니 검지로 입술을 가리켰다.
슬쩍 주변을 훑자 딱히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과감하게 정설화와 입을 맞췄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키스하는 느낌이 상당히 색달랐다. 보통 입술을 마주치고 가볍게 부비곤 했는데 오늘은 정설화가 혀까지 쓰며 적극적으로 덤볐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오…… 오늘은 좀 다르네?"
"이…… 인터넷에 거…… 검색해 보니까…… 키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해서, 한 번 알아보고 해 봤어."
키스할 때는 격정적이었지만 키스가 끝나니 금방 부끄러움을 타는 정설화다.
말을 꺼내는 사이에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최기석의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지이이잉.
눈치 없이 울리는 콜폰.
최기석은 한숨을 쉬며 번호를 확인했다.
흉부외과 병동 콜이다.
[초 인턴 쌤. 병동 환자 ABGA(동맥혈 채혈) 좀 해 주세요.]
"저 오늘 오프잖아요. 강준이는요?"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아서요. 이거 응급이라서 빨리 해야 되는데.]
"갈게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정설화와 본관으로 향했다.
이후 그녀와 헤어져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그리고 속으로 남강준을 질겅질겅 씹으며 ABGA를 끝마쳤다.
'기왕 온 김에 라운딩이라도 할까?'
최기석은 처치 도구를 정리한 후 병실을 돌았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로 말이다.
그러던 중 강은하가 있는 1인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침상에 누워 있는 인물을 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황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드르르르륵.
마침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누구세요?"
최기석은 검지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인물의 팔을 꾹꾹 찔렀다.
"은하 씨 아닌 거 다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