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끝을 잡고 (3)
남강준은 최기석에게 얻어맞고 짚단처럼 쓰러졌다.
주먹에 맞은 부위가 얼얼하게 아파왔다.
"미친 새끼. 뭐야!"
남강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최기석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최기석이 의사 가운에서 알콜솜을 꺼냈다.
알콜솜에는 피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최기석이 소아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팔꿈치에 알콜솜을 누르고 있었던 건 연기란 말인가.
"개새끼. 넌 더 맞아야 돼."
최기석은 남강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재차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남강준은 또 힘없이 무너졌다.
최기석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손쓸 틈이 없었다.
"네가 정맥주사를 놔달라고 하면 내가 순순히 정맥으로 놓을 줄 알았나 보지?"
최기석이 싸늘하게 말했다.
말리언트는 소아 환자에게 종종 쓰는 주사약으로 그 색이 진한 노란색이다.
흉부외과 픽스턴으로 지내 온 그가 말리언트의 용법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남강준이 정맥주사를 부탁했을 때부터 모든 것을 눈치챘다.
"내가 싫으면 직접 나한테 덤벼. 왜 애꿎은 환자를 가지고 장난질이야. 말리언트가 정맥으로 들어가면 저 아이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나 해 봤어?"
"……."
"태호 새끼가 시켰냐?"
최기석이 재차 물었지만 남강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입술에 찢어진 피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뚫린 입으로 어디 말 좀 해 보라고!"
쿵!
최기석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는 가운데 남강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의사 면허 합격한 후부터 네가 미웠다. 설화가 널 좋아하는 것도 싫었고 네가 병원에서 잘나가는 것도 꼴 보기 싫었어.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네게 쓴맛을 보여 주고 싶었지."
"……."
"내가 멍청했다. 한순간 미쳐 버렸던 모양이야."
남강준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최기석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남강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쥔 후 소파 쪽으로 내팽개쳤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가운 벗어. 씹 새끼야. 넌 의사할 자격 없어."
최기석은 곧바로 간담췌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때마침 처치를 끝낸 조태호가 복도로 나와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너지?"
"뭐가?"
"네가 강준이한테 시켰잖아. 일부러 정맥주사 놓기 힘든 환자 고른 다음에 바람 잡으라고. 내가 근육주사를 정맥에 놓게 유도하라고."
조태호를 바라보는 최기석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남강준이 나쁜 놈인 것은 알지만 환자를 이용할 정도로 악질은 아니다.
즉 이번 사건의 배후는 따로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최기석에게 엿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조태호뿐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뭔 소리야? 정신 차려. 여긴 네 꿈속이 아니라고."
"시치미 떼지 마!"
최기석이 으르렁거렸다.
두 사람의 언성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더 할 말 없으면 꺼져. 나 바쁘니까."
"이번에만 그냥 넘어간다. 또 이딴 짓하면 가만 안 둬."
"무서워 죽겠네. 기저귀라도 차고 다녀야겠어."
최기석은 조태호의 빈정거림을 뒤로 하고 병동을 떠났다.
화가 나고 답답하지만 조태호나 남강준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은 없었다.
실제로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입증할 방법도 없었다.
너희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또 같은 짓을 했다가는 따끔한 맛을 볼 것이다.
이렇게 경고하는 게 지금은 최선일 따름이다.
한편 멀어지는 최기석을 바라보며 조태호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하아…… 병신 새끼. 그거 하나 처리 못하나?"
* * *
다음 날.
시간이 흘러 일과가 끝났다.
최기석은 수술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긴 후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오늘은 모처럼의 오프.
김철우에게 받은 심전도 노트를 정독할 예정이다.
회의실에서 심전도 노트를 챙겨서 복도로 나오는데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남강준이 보였다.
"……."
"……."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남남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최기석은 어제의 사건 이후 남강준을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남강준도 최기석에게 감히 인사를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못했기에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뭐해요?"
최기석은 스테이션에 있는 강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병동의 비타민인 그녀는 요즘따라 축 쳐진 모습을 자주 보였다.
"차트 입력이요."
"혹시 강준이랑은 진도 좀 뺐어요?"
"아니요. 전혀."
강하나가 모니터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돌려 최기석을 응시했다.
"사실 처음부터 남 선생님 좋아한 적 없어요. 남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하면 초 인턴 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을 뿐이에요."
"……."
"저요. 사실은 봤어요."
강하나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후배 간호사의 눈치를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요?"
"초 인턴 쌤이 다른 여자 인턴하고 데이트하는 거요. 둘이 사귀는 사이 맞죠?"
강하나의 지적에 가슴이 뜨끔했다.
정설화와의 관계는 아직 누구에게도 들킨 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거늘…….
"표정 보니까 맞네. 하여간 초 인턴 쌤은 순진해서 탈이라니까."
강하나가 힘없이 웃었다.
"누구한테 말 안 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요?"
최기석의 말에 강하나가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고마워요."
"여자분 속 썩이지 말고 잘해 봐요. 파이팅."
말과 달리 강하나의 목소리와 행동에는 평소의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단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장혁필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마침 잘 됐다. 이거 윤 교수한테 전해 줄래? 윤 교수, 지금 연구동에 있을 거야. 나는 지금 다른 과 교수들이랑 회의가 있어서."
"네. 제가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은 장혁필이 내미는 휴대폰을 받았다.
아무래도 윤지혜는 장혁필과 함께 있다가 휴대폰만 달랑 두고 연구동으로 간 모양이다.
"교수님. 요즘 바쁘시죠?"
최기석이 먼저 운을 뗐다.
"눈코 뜰 새도 없지. 잠깐 방송에 탄 것뿐인데 이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러고 보니까 이쪽으로는 기석이 네가 선배 아닌가?"
장혁필이 피식 웃었다.
화제성으로만 따지면 그조차 최기석을 감당할 수 없었다.
최기석은 초턴 시기 흉강 천자를 하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병원 최초로 아동학대 피의자를 잡았으며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돌을 구한 것으로 두 번이나 뉴스를 장식했다.
인턴의 행보치고는 파격에 파격을 더했다.
"송 교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섭섭하겠다?"
"네. 많이 섭섭합니다."
최기석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송명진의 밑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기에. 하지만 스승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흉부외과 재미있어질 거야."
"재미요?"
"너 과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장혁필이 가벼운 분위기를 싹 지우고 말했다.
"송 교수님이 떠나는 순간, 마지막 브레이크가 풀린다. 그때부터 과장님의 진가가 나오겠지."
"좋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거야 스태프들이 하기 나름이지. 누군가에게는 천국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장혁필의 의미심장한 말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을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장혁필과 헤어졌다.
최기석은 한동안 장혁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장혁필.
최기석이 의국의 스태프 중 유일하게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인물이다.
흉부외과에 온 지 두 달이 지났음에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에 대한 정보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송명진이 떠나면 장혁필도 변하지 않을까.
송명진의 빈자리는 누가 채우게 될까.
문득 의진대 흉부외과의 귀추가 궁금해졌다.
최기석은 1층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본관을 떠났다.
십 여분을 걷자 연구실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윤지혜의 연구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야?"
윤지혜가 최기석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장 교수님이 휴대폰을 드리라고 해서요."
최기석은 윤지혜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윤지혜는 짤막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휴대폰을 받았다.
"이제 휴대폰 고리는 안 하시나 봐요?"
최기석은 예전에 헬스를 끝내고 봤던 휴대폰 열쇠고리의 행방을 물었다.
특이한 만화 캐릭터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잃어버렸어."
윤지혜가 담담하게 대답하고 최기석의 손에 들린 봉투를 응시했다.
"기숙사에서 먹으려고 산 건데. 드실래요?"
최기석의 대답에 윤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혜가 과자와 빵 봉투를 뜯는 사이 최기석은 커피포트를 데우고 컵라면 세팅에 들어갔다.
잠시 후 세팅이 끝나고 두 사람이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진짜 잘 먹네.'
최기석은 라면을 먹던 중 윤지혜를 힐끔 쳐다봤다.
행동은 조신했지만 먹는 음식 양은 그와 필적할 정도다. 문득 회식 때도 그녀가 불판 위의 고기를 거의 다 해치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음식을 드셔도 살이 잘 안찌는 타입이신가 봐요?"
"맞아."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소형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 두 개를 꺼내서 한 개은 본인이 마시고 나머지는 최기석에게 건넸다.
"그래서 인턴 때 별명이 먹신이었어. 먹다가 죽을 귀신."
"교수님 이미지하고 안 어울리는 별명이네요."
"내 이미지가 어때서?"
윤지혜가 예상 밖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게…… 음…… 뭔가 냉철하고 차가운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환자뿐만 아니라 의국 스태프한테도 거리를 두는 느낌이랄까."
"직장 동료라고 해서 다 친하게 지낼 필요 없잖아. 감정 노동은 딱 질색이야."
윤지헤가 담담하게 한 마디 했다.
야식 타임이 끝나고 최기석과 윤지혜는 함께 연구실 바깥으로 나왔다.
윤지혜는 병동에서 볼 일이 있었고 최기석은 기숙사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문제가 생겼다.
덜컹!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크게 흔들거리더니 내부가 완전히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고장인가?"
최기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엘리베이터 사고와 인연이 있는지 비슷한 경우를 자주 경험했다.
거기다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 효과까지 있으니 지금 상황이 두렵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최기석의 질문에 윤지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섭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최기석은 휴대폰 플래시로 엘리베이터 단추들을 비추고 비상호출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몇 번이나 꾹꾹 눌러 봤지만 비상호출 버튼이 작동하지 않았다.
첩첩산중의 상황이다.
최기석은 그대로 119에 신고를 했다.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법.
지금은 구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쿵!
둔탁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플래시로 소리 난 곳을 비추자 윤지혜가 쓰러져 있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