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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68화 (68/407)

인턴의 끝을 잡고 (2)

그날 저녁.

대동박 박리 환자의 수술이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최기석은 민주혁과 당직실에 자리를 잡았다.

스스스스슥. 스스스슥.

뜨개질을 하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가강에서 흘러넘치던 피, 절망으로 가득 찬 송명진의 눈빛이 머릿속을 스쳤다.

당시의 아픔을 잊기 위해 뜨개질에 몰두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처음도 아닌데.'

최기석은 쓴 웃음을 지으며 물끄러미 바늘코를 내려다보았다.

과거 레지 3년 차까지 해 본 최기석이다.

환자가 죽는 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환자의 죽음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환자가 죽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뒤따라오는 자괴감과 무력감도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환자 죽는 거 처음 봤어?"

민주혁이 담담하게 물었다.

"아니요."

"근데 왜 그렇게 우거지상이야? 송 교수님이나, 나나, 너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 그 상황이었으면 누가 수술방에 들어왔더라도 환자는 죽었다고."

"······."

"괜히 자학하지 마."

"자학은 아니에요."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저 제 손에서 환자가 죽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아요. 오늘을 기억해야 다음번에는 환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자학 맞네."

민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병원에서 죽는 사람이 하나둘이냐? 게다가 우리 과는 흉부외과라고. 사람 죽는 게 일상인 곳이야."

"······."

"너처럼 죽는 사람을 헤아리다간 네 가슴속에 묘지를 만들어야 될걸?"

민주혁의 말에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은 있었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해 봤자 싸움밖에 날 게 없다.

지이이잉.

가운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었다.

번호를 확인한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배. 저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올 때 컵라면이나 하나 사 와."

"네."

대답을 마치고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입에서 뿜어지는 담배 연기가 구름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뜻밖의 모습에 최기석은 돌처럼 굳었다.

"교수님?"

"왔어요?"

송명진이 담배를 깊게 뱉어내며 다가오는 최기석을 응시했다.

"······원래 담배 피셨어요?"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콜록. 콜록."

송명진이 기침하며 한 손을 이마에 올렸다.

"원래 담배는 전문의가 되면서 끊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수술환자가 죽었을 때마다 피우고 있죠."

"아······."

"오랜만에 피우니까 어지럽네요."

송명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담뱃재를 털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최기석은 슬쩍 송명진을 훔쳐봤다.

담배를 피며 고통스러워하는 스승의 모습이 가슴을 찔렀다.

민주혁이 말한 자학이란 사실 이런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환자는 죽었죠."

송명진이 최기석의 위로를 차갑게 받아쳤다.

무겁고 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송명진이 운을 뗐다.

"미안해요. 마음이 비틀려 있으니까 말도 비틀려서 나오는 모양이에요. 나는 인성도, 수술 실력도 아직 멀었나 봐요

"아닙니다. 교수님은······."

"나 결심했습니다."

송명진의 최기석의 말을 끊고 말을 이었다.

"메이죠 클리닉에 가기로."

담담한 목소리가 옥상에 울려 퍼졌다.

최기석은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흉부외과의 쓸데없는 권력다툼으로 지친 송명진에게 수술 중 환자가 죽는 시련이 찾아왔다.

제아무리 명의라도 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일 때문에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해도 부정하지 않을게요."

"······."

"어떻게 됐든 당분간은 한국을 떠나고 싶네요."

"네."

최기석은 송명진을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저도 교수님을 따라 메이죠 클리닉에 갈 수 있을까요?"

"물론 갈 수 있죠."

송명진의 대답에 최기석은 놀라서 몸을 들썩거렸다.

메이죠 클리닉은 미국 최상위권 병원 중 하나로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자자하다.

그곳에서 수련할 수 있다면 영광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송명진의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직은 한국에 더 있어야 해요"

"······."

"내가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 최 선생을 부를게요. 그러니까 그동안 열심히 영어 공부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없어서 힘들겠지만 웬만하면 다른 병원에 가지 말고 우리 병원에 남아요."

"우리 병원이요?"

최기석이 되물었다.

송명진이 떠난다고 하면 솔직히 의진대병원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능력이면 다른 대학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되기에 충분했기에.

"우리 흉부외과는 다른 병원보다 권력다툼이 심한 곳이에요. 조지환 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장 교수도 만만치 않을 거고. 여기서 버틸 수 있다면 그 어떤 병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

"최 선생이 메이죠 클리닉에서 일할 만한 그릇이 된다는 걸 보여 주세요."

송명진의 말이 최기석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장기 임무, '메이죠를 향해서'가 생성되었습니다.]

① 영어를 마스터하라. 영어 능력치를 전부 중급 이상으로 올리세요.

- 현재 능력치

- 독해: 중

- 회화: 하

- 리스닝: 하

② 송명진의 제안이 올 때까지 의진대병원에서 버텨라.

[임무 성공 시 원하는 스킬의 레벨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스킬 북이 주어집니다.]

[송명진의 도움을 받아 메이죠 클리닉에 입성할 수 있는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네.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송명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 선생은 대답이 늘 씩씩해서 좋아요. 이제 들어갑시다."

송명진이 앞장서고 최기석이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최기석은 송명진과 헤어지고서 민주혁에게 컵라면을 사다 준 뒤 기숙사로 돌아갔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서 오늘 촬영한 수술 동영상을 살폈다.

[교수님! 피가 안 멈춥니다.]

[블러드 팩 달고 지혈제 IV.]

[오후 9시 30분. 환자 유기환, 테이블 데스.]

동영상에는 스태프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 환자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의 고통이 그를 괴롭혔지만 동영상을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다음에 또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최기석은 동영상을 보며 연신 눈물을 흘리다가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오전 회의가 진행됐다.

입원환자의 경과보고 및 수술환자 브리핑이 끝나면서 잠시 여유가 생겼다.

"송 교수님. 할 말 없습니까?"

조지환이 송명진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드러나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간밤의 사건을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지금 이야기 할 생각이었습니다."

송명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젯밤 급성 대동맥 박리 환자가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곧바로 응급수술에 들어갔지만 대동맥궁에 있는 가강이 터지면서 큰 출혈이 있었습니다."

"······."

"출혈을 잡지 못해서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송명진의 말이 메아리처럼 회의실에 울렸다.

송명진이 직접 집도해서 환자가 죽은 것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송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 보호자가 가만있어요? 내가 봤을 때 이건 소송에 걸려도 할 말 없을 것 같은데."

조지환의 약 올리는 듯한 말투.

그것은 마치 보호자가 의료소송 하기를 바라는 듯 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보호자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별 말씀은 안 하셨어요."

"뭐. 그러면 다행이지만······ 방심은 하지 마세요."

조지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송 교수님을 안심시키고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까요. 보호자는 환자가 살아 있을 때만 의사 편이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죠?"

"압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송명진이 분위기를 잡았다.

"얼마 전부터 메이죠 클리닉에 러브콜을 받았어요. 거취를 고민하던 중에 결국 메이죠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의진대 흉부외과에는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만 남아 있겠어요."

"이야~ 역시 송 교수님입니다. 메이죠 클리닉에서 러브 콜이라니······."

조지환이 활짝 웃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죠. 우리 흉부외과에는 아직 송 교수님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 마세요."

송명진이 따가운 일침을 날렸다. 그럼에도 조지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어쨌거나 이미 뜻을 정했다면 보내 드려야죠. 유 선생. 이번 달 중으로 송별회 날짜 잡아 봐."

"네."

조지환의 말에 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고 오전 회진이 펼쳐졌다.

밤사이 환자가 죽고 최고의 실력자인 송명진은 떠난다는 소식을 밝혔다.

그럼에도 흉부외과의 일상은 톱니바퀴처럼 무탈하게 굴러갔다.

* * *

터벅 터벅.

최기석은 오만상을 쓰며 병동으로 향했다.

모처럼의 오프를 맞아서 열심히 심전도 공부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남강준이 환자 처치를 도와달라며 전화를 걸었다.

물론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문제는 남강준 때문에 힘들어할 환자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흉부외과 소아병동에 도착해서 병실을 훑었다.

어린 환자 앞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남강준이 보였다.

"왔어?"

남강준이 아는 척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담당의 지시에 따라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놔야 하는데 도무지 정맥라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최기석을 불렀다고 한다.

"인턴이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 IV도 못 놓냐?"

"이 애 혈관이나 보고 말해."

남강준이 말을 마치고 얼굴은 잔뜩 구겼다.

"갑자기 왜 그래?"

"아까 우유랑 빵을 급하게 먹었는데 그게 잘못됐나 봐. 화장실 갔다 올게."

남강준이 급하게 병실을 떠났다.

최기석은 탁자에 놓인 주사기를 발견하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의 이름은 윤소망.

나이는 두 살로 선천성 승모판 기형증을 앓았다. 이번 주 안으로 송명진이 수술에 들어가는 환자다.

"놀고 싶어?"

최기석의 말에 아이가 손으로 힘차게 허공을 휘저었다.

"까꿍! 까꿍!"

장난을 치자 아이가 방글방글 웃기 시작했다.

최기석도 환하게 웃었다.

'하필이면······.'

남강준은 얼굴을 찌푸리며 좌변기에 앉았다.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아랫배가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

볼 일을 끝낸 후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번개처럼 병실로 달렸다.

최기석은 알콜솜으로 아이의 팔목 부위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남강준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얼마 전 조태호가 알려준 작전은 성공했다.

최기석을 병신으로 만들어서 병원에서 내쫓아 낼 수 있는 바로 그 작전 말이다.

사실 그가 최기석에게 정맥주사를 부탁했던 주사제는 말리언트다.

말리언트는 소아 환자에게 자주 쓰이는 약물로 근육주사용이다. 정맥으로 주사를 놓을 경우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기석은 그의 계략에 속아 근육주사용 약제를 정맥에 놓고 말았다.

명백한 의료사고를 낸 것이다.

"전 아무 잘못 없습니다. 강준이가 정맥주사를 부탁해서 정맥주사를 놨던 것뿐이에요."

사건이 터지고 최기석이 그렇게 부인해도 소용없었다.

"저는 분명 근육주사를 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강준이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되면 최기석은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병원에서 쫓겨날 것이다. 조태호의 미션을 잘 수행한 남강준은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고 말이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감정이 복잡했다.

최기석을 쫓겨날 것은 통쾌하지만 환자에게는 아무 죄도 없었으니까.

"이 아이. 확실히 혈관이 안 보이더라."

"그······ 그렇지?"

"근데 얘 참 귀엽지 않냐?"

최기석이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방긋 웃으며 남강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 줄기 남은 죄책감 때문일까.

남강준은 본능적으로 아이의 눈길과 손짓을 피했다.

"커피 한잔할까?"

"좋지."

그는 최기석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휴게실에 도착한 최기석이 문을 쾅 닫고 코크를 눌러 안을 잠갔다.

지금 휴게실에 있는 사람은 오로지 둘뿐.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너 사람 맞냐?"

최기석이 먼저 운을 뗐다. 남강준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꽃처럼 뜨거웠다.

"갑자기 왜?"

"그걸 몰라서 물어?"

퍼어어어억!

최기석의 주먹이 정통으로 남강준의 안면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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