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6)
이대로 가만있으면 이야기를 엿듣는 그림이 되고 만다.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강은하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들어오세요."
강은하의 돌발행동에 남자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최기석은 그대로 병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슈퍼 비너스 매니저 나태일입니다."
남자가 먼저 소개를 했다.
"인턴 최기석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데 괜히 끼어든 건 아니지 모르겠네요. 사실 은하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최기석은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은하 씨의 퇴원날짜는 다음 주 쯤이 될 것 같습니다."
"아. 잘됐네요."
"그쯤이면 뭐. 괜찮을 것 같네요.
강은하와 나태일이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시던 이야기 계속 하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순순히 병실을 물러갔다.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다투는지 궁금했지만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 인턴 쌤!"
스테이션을 지나가는데 강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최기석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나이트예요?"
"네. 오늘은 밤을 지켜요."
강하나가 밤 근무를 뜻하는 나이트와 기사 나이트를 이용한 말장난을 쳤다.
영어로도 아재개그를 치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다.
아재개그로 유명한 셰프와 강하나를 붙여 놓으면 꽤 볼 만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초 인턴 쌤. 혹시 강준 쌤이랑 친해요?"
"대학 동기이기는 한데 지금은 원수예요. 왜요?"
"히이이잉. 친하면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 했는데."
강하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왜 원수가 됐어요?"
"이야기하면 복잡해요. 하여간 중요한 건 강 쌤이 강준이한테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최기석이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제가 지켜봤을 때는 절대로 좋은 녀석이 아니에요. 설령 사귄다고 해도 강 쌤만 피곤해져요."
최기석의 설명에 강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왜 그러게 쳐다봐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초 인턴 쌤. 지금 내가 강준 쌤 좋아한다니까 질투하는 거죠? 그렇죠?"
강하나가 콧대를 높이고 우쭐거렸다.
"순수한 충고예요."
"충고가 아니라 이간질 같은데……."
"강 쌤이 그렇게 믿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요. 대신 강준이는 절대로 안 돼요! 제가 초 인턴인 거 아시죠? 제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도 없어요."
강하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멀리서 남강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는 행동을 보니 전생에 양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너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다. 민 선배가 야식 먹자고 했어."
"안녕하세요. 남 선생님."
강하나가 남강준을 보며 조신하게 인사했다.
최기석 앞에서는, 방금 전까지는 말괄량이같이 굴던 강하나가 갑자기 요조숙녀로 변했다.
그 변화에 최기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로 남강준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아까도 인사했잖아요."
"아. 그게……."
남강준의 지적에 강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이 또한 최기석이 흉부외과 픽스턴을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
충격은 배가 되었다.
"민 선배, 당직실에 있지? 가자."
최기석은 남강준의 팔을 끌고 회의실로 갔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강하나의 찌릿한 눈빛과 마주쳤지만 그냥 흘려버렸다. 만약이라도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깊어지는 것은 절대 반대다.
"오 왔냐?"
최기석이 당직실로 들어가자 민주혁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늘은 수술 스케줄이 갈려서 제대로 인사 못 드렸네요."
"괜찮아, 괜찮아. 저기 앉아."
민주혁이 맞은편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인마. 잘 왔다. 네가 혹시라도 흉부외과 픽스턴 관두고 순환기내과에 짱 박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이렇게 돌아오니까 너무 반갑다."
"한 번 흉부외과는 영원한 흉부외과잖아요."
"암 그렇고말고. 역시 최기석은 사나이야. 의리!"
민주혁의 오버에 최기석은 그저 웃었다.
흉부외과 막내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우리 새끼. 뭐 먹고 싶어?"
"제가 골라도 되요?"
"어허. 말해 뭐해. 빨리 골라."
"네."
최기석은 야식메뉴를 보쌈으로 결정하고 가게에 주문했다.
세 사람은 병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TV를 켰다.
민주혁의 손에서 정신없이 채널이 바뀌었다.
이윽고 채널이 멈춘 곳은 한 음악채널에서 하는 자선 콘서트였다.
"넌 사랑을 몰라! 아무 것도 몰라!"
터프한 이미지를 가진 걸 그룹의 무대가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혁은 입을 벌린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최기석도 마찬가지였다.
야식이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확실히 TV가 무섭긴 하더라."
민주혁이 음료수를 마신 후 운을 뗐다.
"왜요?"
"장 교수님 오늘 '아침 정원'에 명의로 나왔잖아. 흉부외과 외래로 전화 엄청 왔대. 진료 예약 환자도 거의 두 달 가까이 꽉 찼고 말이야."
"고작 TV 출연 한 번 한 게 그렇게 효과가 좋아요?"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고작이 아니라 엄청난 거라고."
민주혁이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주워들은 거니까 어디서 말하지 마. 이번에 장 교수님이 명의 출연하게 된 거, 조 과장님 입김이 컸다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장 교수님을 띄워서 나중에 결국 송 교수님을 내치겠다는 거 아니냐?"
"……."
"역시 과장님은 고단수야. 사람을 피 말리게 할 줄 안단 말이지."
"송 교수님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겁니다. 흉부외과에서 누구보다 인망이 두터우신 분이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라고."
최기석의 대답에 민주혁이 혀를 찼다.
"원래 인망이 두터운 사람일수록 작은 충격에 무너진다고. 아주 조그만 허점을 보여도 주변에서 벌떼같이 달려든단 말이지.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
"……."
"송 교수님이 수술한 환자가 죽었다고 치자. 그러면 어떤 반응이 생길 것 같아?"
"환자를 백 퍼센트 살리는 건 그 어떤 의사라도 불가능해요. 송 교수님이 수술했더라도 환자는 죽을 수 있어요."
"그건 순진한 네 생각이지."
민주혁이 손가락 좌우로 까닥거렸다.
"교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교수님을 쪼아 댈 거야. 그동안의 수술이 거품이었네 마네 하면서 말이야. 웃긴 건 그런 말들이 점점 많아지면 사람들이 그 말을 진짜로 믿는다는 거지."
"더럽네요."
"원래 더럽고 좆같은 게 현실이야.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너도 여기에 발을 담가야 해."
민주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지금 네 포지션은 두 개다. 하나는 송 교수님 제자고 다른 하나는 우리 병원의 스타 인턴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거고 어떻게 커 갈 건지 잘 생각하라고."
"오늘따라 선배가 멋져 보이네요."
최기석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민주혁의 정치력은 괜히 높은 것이 아니다.
"난 원래 멋져. 하여간 잔소리는 여기까지고 뒷정리 잘 해라."
민주혁이 콜폰을 받고 당직실을 떠났다.
그의 부재로 당직실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최기석과 남강준은 말없이 청소만 했다.
"너 설화랑 무슨 사이냐?"
청소가 끝나자 남강준이 입을 열었다. 최기석을 향한 시선이 날카로웠다.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설화가 너 좋아하니까. 설화한테 마음 없으면 괜히 흔들지 마. 여린 애라서 상처 받아."
남강준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남강준이 정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조태호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신경 꺼. 너랑 상관없으니까."
최기석의 차가운 대답에 남강준이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날 저녁.
송명진은 일과를 끝내고 원룸에서 쉬고 있었다.
지이이잉.
진동이 느껴지는 순간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번호를 확인하고서 다시 여유를 찾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
통화를 연결한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의대 동기이자 지금은 미국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차현석이 전화를 걸었다.
차현석의 전공은 신경외과.
수술 쪽 재능은 평범했지만 영어를 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동기 중 제일 잘나가고 있다.
[당연히 잘 지내지. 근데 너는 안녕 못하다면서?]
"……."
"얼마 전에 현철이가 네 이야기 하더라. 조지환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수작 부려서 네 자리 꿰찼다면서?]
"신경 안 써. 환자를 치료하려고 의사됐지 과장 달려고 의사된 건 아니니까."
[쯧쯧. 꽉 막힌 생각은 여전하구나.]
차현석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어디 그런 의사 안 나오려나? 수술 실력은 너만큼 뛰어나면서 처세술까지 뛰어난 놈 말이야. 그런 놈이 있으면 이 바닥도 재미있어질 텐데.]
"조만간 생길지도 몰라."
[혹시 네가 키운다는 제자? 난 안 믿어. 네 밑에 있으면 걔가 네 물밖에 더 들겠어. 결국 송명진 투가 나온다는 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 빙빙 돌리는 거 성격에 안 맞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가라.]
"가라니…… 어디를?"
[메이죠 클리닉.]
차현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스카우트 조건도 좋은데 뭐하러 거지 같은 의진대병원에 붙어 있어? 거기서 네 실력에 맞는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 틀려?]
"……."
[우리나라 의료계를 위해서라는 둥 헛소리하지 말고 그냥 가. 시원하게 가 버리라고.]
차현석의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간신히 잠재웠던, 미국으로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되살아났다.
[너는 일방적인 희생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을 말이야. 근데 그렇게 해서 몇몇 환자들은 살아남을지 몰라도 정작 너 자신은 죽어 버릴걸?]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차현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솔직히 난 널 좋아하면서 존경해. 네 수술 솜씨는 경이적이고 환자를 위하는 마음씨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지. 그런데 말이야, 가끔은 널 위해서 살라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전화 왔다."
송명진은 소파 위에 있는 콜폰을 응시했다.
콜폰은 떼쓰는 아이처럼 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타이밍 한 번 그지 같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지금 뭘 하고 싶은 거야. 의진대병원에 남고 싶은 거야? 아니면 메이죠로 가고 싶은 거야?]
"끊어."
[야이 새끼…….]
차현석이 뭐라고 했지만 담담하게 통화를 끊고 콜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응급환자가 발생했다.
가운을 걸치고 번개처럼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진대병원에 남고 싶은 거야? 아니면 메이죠로 가고 싶은 거야?]
차현석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지만 고개를 저으며 물리쳤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민주혁이 남자 환자를 내려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환자는요?"
"순환기내과 외래를 다니던 환자인데요. 심한 흉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검사를 해 보니까 대동맥 박리가 의심돼서……."
"확인해 볼게요."
송명진은 꼼꼼하게 검사 결과를 훑었다. 온화하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 위에서 뒹굴었고 민주혁은 환자에게 다가가 안심을 시켰다.
"대동맥 박리 맞아요. 바로 수술 들어갑시다! 환자가 아파하니까 울마이트부터 IV로 놔 주세요."
"네!"
민주혁은 필요한 처치를 하고서 환자의 보호자에게 동의서를 받았다. 그리고 수술실과 마취과에 전화해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교수님?"
민주혁의 대답에 송명진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응급실 벽만 바라볼 뿐이다.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교수님?"
"……."
"교수님. 이제 수술실로 가셔야 합니다."
"아. 미안해요."
송명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최기석이 응급실로 내려오면서 민주혁과 최기석이 나란히 베드를 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앞서 걷는 송명진이 있었다.
"야. 오늘 교수님 이상해."
민주혁이 고갯짓으로 송명진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