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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65화 (65/407)

막바지 (5)

그날 저녁, 고된 일과가 끝났다.

컨퍼런스 준비까지 깔끔하게 마친 최기석은 곧바로 아지트를 찾았다.

아지트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침에 어느 정도 정리를 했음에도 잡다한 수술 도구와 스티로폼 박스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서둘러 아지트를 청소하고 아이템을 손에 들었다.

방향제 패브리스.

매일 수술 연습을 해서 아지트에 짙은 피 냄새가 뱄다.

본인이야 피비린내가 상관없지만 이곳에 올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패브리스를 뿌리고 냄새를 맡자 산뜻한 과일향이 났다.

"이 정도면 되겠지?"

최기석은 아지트를 훑어보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똑! 똑! 똑!

청소가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가 들어오라고 하자 정설화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여기가 거기야?"

정설화가 안으로 들어와 아지트를 살폈다.

아지트는 생각보다 넓었다.

창가 옆에는 책 대신 각종 수술 도구들이 놓여 있는 책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고압멸균기인 오토 클레이브도 보였다.

그밖에 소파나 옷걸이 같은 일상 가구들도 눈에 띄었다.

잠깐 훑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별명이 왜 아지트인지 알 수 있었다.

"송 교수님이 사비로 구입하신 것도 있고 시설부 지인한테 몰래 지원받은 것도 있대. 대단하지?"

"응."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않아 정설화가 사온 간식거리를 먹기 시작했다.

"나. 지금 너무 좋아."

"뭐가?"

"그냥 우리 있다는 게."

정설화는 스스로 말을 꺼내놓고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그래."

최기석은 웃으며 정설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실 병원 내에서 연애한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받기 힘들다.

인턴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병원 관계자라면 모두 안다. 그런데 도중에 연애를 한다는 건 인턴 일을 소홀히 한다거나, 배부른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사귀기로 했다. 메신저는 최대한 자제하고 전화는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번씩 하기로 했다.

애초에 바빠서 자주 연락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 말고 또 인턴 커플이 있을까?"

정설화가 중얼거렸다.

"글쎄. 내 눈에는 안 보이던데?"

"바보. 넌 있어도 못 보잖아."

"어쭈. 날 무시했다. 이거지?"

최기석이 옆구리를 간질이자 정설화가 꺄르르 웃으며 손길을 피했다.

"또 놀러가고 싶다."

"나도."

"다음번 풀 오프는 언제야?"

정설화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너랑 똑같아. 이번 주. 근데 이번 달에는 아무 데도 못 가."

"왜?"

"수술실 근무잖아. 응급수술 대기해야지."

최기석은 입술을 삐쭉하게 내미는 정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지만 또한 두렵기도 했다.

"내가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되면 지금보다 더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어. 100일 당직이 있는데다가 환자도 하나둘 맡을 거고 수술 보조까지 서야 되니까."

"괜찮아."

정설화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커플하고 다르게 우리는 24시간 동안 같은 일터에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그리고……."

"……."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돼."

정설화의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익었고 최기석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세상 사람이 모두 등을 돌려도 그를 지켜줄 단 한 사람.

최기석은 스승 송명진이 말했던 그 사람을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참. 줄 게 있어."

정설화를 놓아 주고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커플 열쇠고리다.

열쇠고리는 동물 캐릭터로 되어 있는데 남자 캐릭터는 남자 곰, 여자 캐릭터는 여자 곰이다.

각각 가슴에 반쪽짜리 하트 목걸이를 걸었는데 둘이 함께 있어야 사랑이 완성된다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너무 귀엽다."

정설화가 열쇠고리를 받고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최기석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게 바로 연애의 달달함일까.

"서로 달아 주자."

"응."

최기석과 정설화는 서로 상대의 휴대폰에 열쇠고리를 달아 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레어 아이템, 사랑의 증표를 제작하셨습니다.]

[사랑의 증표]

- 사랑은 당신이 당신을 위해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사랑의 멋짐을 모른다면 당신은 불쌍하죠.

- 아이템 착용시 애정도가 20퍼센트가 상승합니다.

- 아이템을 미착용시 애정도가 30퍼센트가 감소합니다.

"갑자기 왜 그래?"

최기석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자 정설화가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니. 별거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더 파고들면 다쳐."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좀 더 대화를 나누었다.

콜폰도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아는지 눈치 없이 껴들지 않아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설화가 최기석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이 아기 천사 같았다.

최기석은 정설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C로젯.

수술실에서는 송명진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대동맥판막 성형술을 진행 중이다.

최기석은 보조를 서며 동영상 모드로 수술 과정을 전부 촬영하고 있었다.

"메스."

"모스키토(혈관겸자)."

"보비(전기 소작기)."

송명진은 각종 도구를 이용해 수술을 이어 갔다.

'역시 스승님.'

수술을 지켜보면서 최기석은 혀를 내둘렀다.

언제나 그랬지만 봉합하는 솜씨와 속도가 예술에 가까웠다.

교련부 성형술, 판막엽 확장술, 주름 성형술 등이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본래 대동맥판막 수술은 4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그런데 중요한 과정이 거의 다 끝났음에도 고작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기석은 다른 스태프들은 모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송명진의 수술이 외국의 최신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과거 대동맥판막 성형술은 대동맥판막만 성형하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동맥 인근 부위와 대동맥판막을 동시에 고정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송명진에게 해당 논문을 받아 읽었기에 최기석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닫는 건 유 선생님이 좀 해 줘요."

"네."

송명진이 수술실을 나가자 치프인 유재현이 뒷마무리를 지었다.

수술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최기석은 스태프에게 인사하고 침상을 중환자실로 끌고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환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써 봤지만 상태는 양호했다.

환자를 무사하게 옮긴 후 잠시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렀다.

최기석은 가만히 이주희를 내려다보았다.

이주희는 팔로 4징증 수술이 예정된 영아 환자로 얼마 전에 그가 남강준 대신 ABGA를 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주희는 김지희의 판박이다.

크면 미인이 될 것 같았다.

"까꿍!"

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주희가 방긋방긋 웃었다.

"오늘은 주희가 잘 웃죠?"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 문미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어제랑은 완전히 딴 판이네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그러고 보니까 최 쌤은 주희가 울 때는 못 보셨죠?"

"네."

"주희는 커서 분명 여장부가 될 거예요.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한 번 울면 귀가 쨍쨍하게 아프다니까요."

"그러게 이야기하니까 얼마나 큰지 듣고 싶은데요?"

"봐주세요."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고서 다시 이주희를 내려다보았다.

"주희 수술은 송 교수님이 하시죠?"

"아니요. 새로 오신 장 교수님이 할 것 같아요."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괜찮을까요? 신생아 심장 수술은 난이도가……."

문미주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송 교수님은 이제 판막 수술만 하시니까."

최기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상대의 전공분야에 간섭하는 것은 싸우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장혁필이 스스로 수술을 포기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송명진이 주희의 수술을 맡을 확률은 없었다.

"혹시 주희 보호자 분에 대해서 들으신 건 없나요?"

최기석은 주변을 훑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주희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돼서 보호자의 남편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들었어요."

"보호자의 부모님은요?"

"글쎄요. 지금까지 면회 온 적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알았습니다."

최기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대기실을 향하자 벤치에 기대앉은 김지희가 보였다.

고작 하루 만에 다시 보는 것이지만 김지희는 그 사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

퀭한 눈과 쑥 꺼져 버린 두 볼.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수 있었다.

최기석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지하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아. 네."

최기석의 인사에 김지희가 한 박자 늦은 반응을 보였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아까 전에 먹었더니 생각이 없……."

꾸르르륵.

김지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곯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지희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왠지 주희 걱정에 식사도 못 하셨을 것 같더라고요. 괜찮으시면 이거라도 드세요."

"이렇게까지 안 챙겨 주셔도 돼요."

"오늘만 받으세요. 입맛이 없더라도 어느 정도 요기는 하셔야죠."

최기석의 끈질긴 설득에 김지희가 결국 그가 내민 음식봉투를 받았다.

"방금 중환자실 들어가 봤습니다. 오늘 따라 주희가 방긋방긋 잘 웃더라고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김지희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해요. 그동안 여기저기 병원을 많이 다녀봤지만 선생님처럼 챙겨 주시는 의사분은 처음이에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뭐."

"아니에요. 정말 감사해요."

김지희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고 최기석도 같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침묵 속에 김지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김주희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세요. 안 그러면 나중에 병 생깁니다."

"그게 사실……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요."

김주희가 최기석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딸아이 수술이 성공하길 바라지만 수술이 잘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병이 재발할 수도 있고, 애 키우는 문제도 있고. 요즘은 모든 게 다 부질없어 보이네요."

심장병을 앓는 아이와 홀어머니.

이 두 사람의 인생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최기석은 힘겹게 할 말을 찾았다.

"분명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다보면 언젠가 길이 보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김지희가 힘없이 웃으며 간식을 꺼냈다.

"잘 먹을게요."

"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최기석은 김주희와 작별인사하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아…… 이런.'

강은하에게 퇴원날짜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최기석은 강은하가 있는 1인실로 이동했다.

뜻밖에도 병실에 먼저 온 남자 손님이 있었다. 남자는 덩치가 컸으며 짧은 스포츠머리를 했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병실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야. 너 미쳤어?"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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