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4)
"다시 승압제!"
조지환의 지시로 다시 승압제가 투여되었다.
약효로 환자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수술실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식으로 환자의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면 수술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딱. 딱. 딱.
최기석은 수술 스태프를 훑으며 이를 부딪쳤다.
혈압이 두 번째로 떨어진 순간 깨달았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것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동안 읽었던 논문에 해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지금이 과장님이 말씀하신 그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수술이 잠깐 멈춘 사이, 최기석이 조지환을 보며 한마디 했다.
"케이스?"
조지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최기석에게 케이스 스터디를 시킨 적이 없거늘, 갑자기 웬 케이스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네. 제가 내과에 가기 전에 읽어 보라고 주신 논문이 바로 이 케이스 아니었습니까?"
"……."
"논문에서는 폐엽 절제술 도중 전기 소작기로 지혈하면 아주 드물게 환자에게 저혈압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소작기가 미주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최기석의 설명에 조지환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입가에 금방 미소가 떠올랐다.
"다들 기석이 말 들었나?"
"……."
"너희들에게 이 케이스를 어떻게 설명해 줄까 고민하는 중에 기석이가 벌써 정답을 말해 버렸다."
조지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대로 전기 소작기로 지혈하는 경우 아주 드물게 미주신경이 자극받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는 소작기를 사용하지 않고 클램프로 출혈 부위를 잡아 준 후에 봉합하면 된다. 알겠어?"
"네!"
스태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그는 조지환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수술이 실패해서 그의 얼굴에 똥칠이 됐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었던 건 환자 때문이다.
그가 입을 다물면 애꿎은 환자가 피해를 본다.
그렇게 본인의 이득을 위해 환자를 내팽개친다면 조지환과 자신이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소작기 사용을 중단하면서 수술은 순조로웠다.
아까처럼 혈압이 떨어지는 경우도 없었다.
스으으으윽.
암 조직이 있는 우상엽 부분을 절제하여 utility incision을 한 부위로 빼냈다.
오늘 수술의 백미가 끝난 셈이다.
"biopsy(생체검사)."
"네."
소독간호사가 떼어 낸 생체조직을 받았다.
"나는 외래 갈 테니까 마무리는 알아서 잘들 해."
조지환이 콘솔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로젯 바깥으로 나가던 중 최기석에게 한마디 했다.
"내과에서 재미있는 걸 배워 왔어."
"아, 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걸?"
조지환의 눈이 반달 모양을 그렸다.
저혈압이 연달아 발생했을 때, 최기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문제의 원인을 알려 주었다.
"제가 논문을 봤는데 이런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최기석이 그런 식으로 나왔으면 그의 자존심은 크게 구겨질 뻔했다.
교수이자 흉부외과 과장이 인턴에게 논문 케이스를 듣고 수술을 진행한다는 건 치욕이니까.
그런데 최기석은 아까의 모든 상황을 전부 조지환의 덕택으로 돌렸다.
한마디로 위신을 세워 준 것이다.
조지환은 로젯을 벗어나기 전 최기석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로젯을 떠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봇 수술을 이용한 폐엽 절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세 시간에 걸친 비교적 짧은 수술이었지만 중간에 과장이 참여했기에 스태프들의 부담은 더욱 컸었다.
로젯을 나오는 스태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너, 송 교수님 밑으로 들어간 거 아니야?"
한민우가 말을 걸었다.
"네. 맞아요."
"근데 조 과장님이 너한테 케이스 스터디 숙제를 내줬다고? 그림이 좀 이상한데?"
"제 생각에도 그래요."
최기석은 모른 척하며 질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스태프들과 휴게실에서 한숨을 돌렸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동료들을 살피자 다들 체력이 2에서 3 정도까지 깎여 있었다.
오직 최기석만이 체력의 변화가 없었다.
역환단과 환자 바라기 아이템의 시너지 효과 덕분이다.
수술실에서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 단순 처치보다는 수술 보조를 할 때 회복량이 더 높았다.
지이이잉.
갑작스레 콜폰이 울렸다.
콜폰을 가운에서 꺼내 확인하니 난생 처음 보는 번호가 찍혔다.
"네. 흉부외과 최기석입니다."
[선생님. 여기 신생아 중환자실인데요. 이주희 환자 ABGA 좀 해 주세요.]
"강준이 시키면 안 될까요? 저 수술 막 끝났고 금방 또 어시 들어가야 되는데."
[그건 아는데요. 휴우…….]
전화를 건 간호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벌써 남 선생님이 두 번이나 찔러서 실패했어요. 쓸 만한 혈관도 하나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도무지 믿음이 가야죠. 최 선생님 아니면 누가 신생아 ABGA를 하겠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최기석은 자리를 털고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드르르륵.
안으로 들어가자 구석 쪽 베드에 나란히 서 있는 남녀가 보였다.
남강준과 전화를 준 문미주 간호사다.
"최 쌤. 바쁜 거 아는데 부탁해요."
문미주가 간절한 어투로 말했고 곁에 있는 남강준은 대놓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처치에 실패해서 그가 불려 왔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주희를 내려다보았다.
이주희는 태어난 지 5개월이 된 여자아이로 조만간 수술이 예정된 흉부외과 환자다.
체력: 3/10
주 증상: 청색증 / 무산소 발작 / 흉통
아픈 부위: 심장
진단명: 팔로 4징증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게 이렇게 가혹한 질병이 찾아오다니 말이다.
ABGA가 연달아 실패하면서 울었던 걸까.
아이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할 수 있겠어?"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지."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냥 어린애도 아니고 생후 4개월 된 아이한테 ABGA 하는 거라고. 너라고 별 수 있을 것 같아?"
남강준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최기석은 담담하게 이주희의 혈관을 살폈다.
A급이었던 요골동맥은 남강준이 이미 써 버렸고 상완동맥에도 이미 주사 자국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상완동맥은 문미주가 실패한 흔적이란다.
최기석은 고심 끝에 발등에 있는 족배동맥을 택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주희 착하지. 야, 뭐라도 좀 해 봐. 얘 울려고 한다."
"내가 보모냐?"
"ABGA 실패한 건 벌써 까먹었어? 그것 때문에 얘가 얼마나 아팠을지는 생각 안 해?"
최기석의 지적에 남강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시선을 끌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
최기석은 토니켓을 이주희의 발목에 묶은 뒤 주사 놓을 부위를 알콜솜으로 닦았다.
푸우우우욱!
주삿바늘이 거침없이 피부를 꿰뚫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가 적용됩니다.]
[채혈 확률이 100퍼센트로 적용되며 환자의 통증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최기석은 깔끔하게 ABGA 채혈을 끝냈다.
"말도 안 돼."
남강준은 피가 차오른 주사기를 보며 혀를 찼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에이스 간호사마저 실패한 채혈을 최기석이 해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가 채혈에 실패하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는데.
이래서는 완전히 망했다.
"역시 최 선생님이 짱이야. 하나 말대로 초 인턴이라니까."
문미주가 싱글벙글 웃었다.
"채혈 힘든 환자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자. 랩(LAB:검사실)은 네가 가라."
최기석은 주사기를 남강준에게 맡기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중환자실 대기석 쪽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 젊은 여성과 양복을 입은 남자 직원이 실랑이 중이다.
자세히 보니 남자 직원은 직원증을 착용했으며 손에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원무과 직원인 듯 보였다.
"사정을 알겠지만 이번 달까지 일부 금액이라도 납부해 주세요. 아셨죠?"
"……네."
젊은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해 보이는 모습은 잠시뿐, 그녀는 원무과 직원이 떠나자마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병원 근무를 하면서 우는 사람을 본 것이 한두 번도 아니지만 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찡했다.
"흠흠."
최기석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흉부외과 인턴 최기석입니다."
"아. 네."
여자가 영수증을 든 손의 손등으로 둘러 눈물을 훔쳤다.
영수증에 적힌 환자의 이름은 바로 이주희다.
"주희 어머님이시죠?"
"그걸 어떻게……."
"수납 영수증에 써 있으니까요."
최기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나가는데 울고 계셔서 걱정이 돼서 와봤습니다. 혹시 성함이……."
"김지희예요."
"아. 죄송합니다. 저번 달에 내과에 있어서 보호자 분 이름을 기억 못했네요. 힘들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지희가 휘휘 손을 내젓자 입원비가 살짝 보였다.
"그건 그렇고 치료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셨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영수증을 자세히 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최기석은 김지희가 내민 영수증을 훑었다.
이주희의 입원기간은 거의 2달 가까이 되었다.
팔로 4징증으로 산정특례를 받고 있지만 그래도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이주희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또한 중증등록이라고 해도 급여의 10퍼센트, 비급여 비용은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앞으로 받을 팔로 4징증 수술비를 비롯해 이후 치료비도 만만치 않으리라.
"부담이 크시겠습니다."
"……네. 병원에 있는 사회 사업팀에도 부탁을 드려 봤는데 지금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고……."
김지희가 다시 울먹거렸으며 최기석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김지희 푸념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최기석은 김지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속사정을 구체적으로 캐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이이이잉.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콜폰이 떨었다.
"기운 내세요. 다음에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최기석은 신생아 중환자실을 떠나며 전화를 받았다.
빨리 수술실로 오라는 호출이다.
침상 위에서 꼬물거리던 이주희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그날 오후.
길고 험난했던 일과 시간이 끝났다.
인턴은 거의 24시간 근무지만 일과가 끝난 후에는 그나마 여유가 나는 편이다.
남강준은 필요한 처치를 끝마치고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조태호가 먼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먼저 왔네."
남강준의 인사에 조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남강준이 마실 음료를 시켰다.
"본론부터 말하자. 너 이번 달 흉부외과 인턴이라며?"
"어."
"기석이 새끼. 엿 좀 먹여 봐."
조태호는 한마디 하고 커피를 쭉쭉 들이켰다.
최기석을 생각할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말을 무시한 것도, 봉합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각종 사건을 겪으면서 병원 직원들은 최기석을 스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의대 시절만 해도 자신의 밑에서 빌빌 기던 녀석인데 감히…….
"그럴 필요 있어? 너희 작은 아버지가 흉부외과 과장이잖아."
"몰라. 지금까지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글렀어."
"기석이 새끼를 엿 먹인다라……."
남강준이 턱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얄미운 녀석을 한 번 손봐 주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방법이 없어서 나서지 못했을 뿐.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봐."
조태호는 주변을 훑고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함에도 표정 변화는 조금도 없었다.
"진심이야?"
이야기를 들은 남강준이 몸을 들썩거렸다.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이거면 그 새끼는 한 방에 골로 가는 거라고."
조태호는 남강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요즘 설화랑 기석이랑 자주 붙어 다니는 건 아냐?"
"……."
"이러다가 너 기석이 새끼한테 설화 뺏긴다."
조태호의 말에 남강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조태호가 그의 마음에 어두운 부분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봐. 그러면 모두 행복해진다니까. 일단 기석이 새끼 병원에서 쫓겨나서 통쾌하고, 넌 설화랑 다시 친해질 수 있잖아."
"……."
"그리고 내가 바깥에서 병원 차리면 누구를 밀어주겠어? 믿음직한 너밖에 더 있냐?"
조태호의 달콤한 속삭임에 남강준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두 눈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씨발. 못할 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