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3)
"……."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최기석이다.
"일찍 왔네."
"일찍 일어났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남강준이 처치 물품을 정리하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최기석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필 흉부외과에 복귀한 시점에서 남강준을 짝턴으로 만날 게 뭐란 말인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은 캔 커피를 뽑아 휴게실 소파에 앉았다.
"못 본 사이에 완전 슈퍼스타가 되셨어? 아동학대 피의자를 잡고 아이돌도 구하고, 공중파 뉴스도 타고 말이야."
"부럽냐? 그럼 너도 나처럼 하던가."
최기석이 빈정거림을 맞받아쳤지만 남강준은 의외로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올라가는 건 힘들어도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건방 떨지 마."
"건방은 무슨. 게다가 난 사람을 만나자마자 빈정거리거나 악담을 하지는 않아. 누구처럼."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태호 새끼가 슬슬 널 버릴 때가 됐는데. 아직은 쓸 만한가 보다?"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하시지."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면서 한동안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병동 갈 거냐? 수술 보조 들어갈 거냐?"
"병동."
최기석의 질문에 남강준이 번개처럼 대답했다.
"병동 일이 더 힘들 텐데?"
"난 응급 대기가 싫어. 수술실에서 졸면서 자리 지키는 것도 질색이고."
"그럼 네가 병동 일 해. 내가 수술 보조 들어갈 테니까."
최기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내과 생활을 하면서 수술실이 그리웠다.
그런데 남강준과 별다른 다툼을 하지 않고도 수술 보조를 설 수 있게 됐다.
커피를 다 마신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회의실로 돌아갔다 본래 앙숙인데다가 역할 분담까지 끝났기에 서로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적막이 흐르는 회의실, 프린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최기석은 컨퍼런스 준비를 마친 후 병동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 달 만에 복귀한 흉부외과.
어떤 환자들이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 환자구나.'
최기석은 병실 밖에서 한 환자를 응시했다.
환자의 이름은 구승대.
나이는 45세로 얼마 전 본원의 정기 건강검진 결과 폐에 이상소견이 발견되었다. 이후 이뤄진 자세한 검사 결과를 통해 폐암 1기가 확정되었다.
오늘 오전 조지환에게 로봇 수술을 이용한 폐 절제술을 받을 예정이다.
복귀하자마자 조지환의 수술 어시라니.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똑. 똑. 똑.
최기석은 좀 전과 달리 노크하고 1인실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환자가 깨어 있었기에.
"몸은 좀 어떠세요?"
그의 인사에 여자 환자가 고개를 돌려 최기석을 응시했다.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큰 눈.
하얗고 투명한 피부.
그녀의 몸 주변에서는 반짝반짝 광채가 뿜어지는 것 같았다.
여자 환자는 바로 최기석이 응급처치를 해 주었던 강은하다.
"아, 네 괜찮아요."
강은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의사가운을 유심히 살폈다.
"선생님이 최기석 선생님이세요?"
"아. 네."
"감사드려요. 최 선생님 덕분에 제가 살았다고 들었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최기석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죠? 원래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네. 정말 답답해 죽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아세요?"
강은하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게…… 예전에 인터넷 기사로 본 것 같아요."
"그러셨구나."
강은하가 별말 없이 넘어갔고 최기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그는 정해진이 아니었기에 말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저는 언제쯤 퇴원할까요?"
강은하가 벽에 걸린 TV를 응시했다.
마침 음악방송에서 슈퍼 비너스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강은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사고 후유증이 크기 않았기에 잠깐의 휴식을 갖고 다시 활동 중이다.
"오늘 회의 시간에 담당 선생님께 물어보겠습니다."
"감사해요."
강은하의 미소에 가슴이 사르르 녹았다.
그녀는 그가 과거에 알고 지냈을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푹 쉬세요."
최기석은 회의실로 돌아왔다.
김철우에게 받은 심전도 노트를 보고 있는데 선생들이 하나둘씩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이다."
"얼굴이 환해지고 살도 붙은 것 같은데."
"내과에서 꿀 빠니까 좋았지? 다시 지옥 시작이다."
레지 선생들이 최기석에게 농담과 우스갯소리를 건넸고 최기석은 웃으며 말들을 받아 주었다.
친숙한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반가워요."
송명진이 웃으며 문 앞에 서 있는 최기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교수님."
"내과 공부는 해 보니까 어때요?"
"생각보다 배운 게 많았습니다. 김철우 교수님이 공부하라고 노트도 주셨고요."
"혹시 심전도 노트 아니에요?"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교수님이 어떻게……."
"나도 예전에 김 교수한테 신세 직전이 있거든요. 노트를 건네줄 정도면 최 선생을 많이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참고로 받을 때는 마음대로 받았지만 돌려줄 때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명심해요."
송명진이 한마디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본격적인 흉부외과 오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남강준이 자료를 띄웠기에 최기석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의국 멤버들을 훑었다.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새로 얻은 스탯인 정치력이다.
'미쳤네.'
최기석의 시선이 조지환에게 머물렀다.
조지환의 정치력은 무려 7, 의국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수치가 높았다.
괜히 송명진을 밀어내고 과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조지환 바로 아래 수준의 정치력을 가진 사람은 장혁필이다.
장혁필의 정치력은 6.5.
가히 조지환과 필적할 만한 수준이다.
'의외네.'
최기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아는 장혁필은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남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정치력이 조지환과 맞먹을 정도다. 그렇다면 호남(好男)의 이미지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기석은 문득 장혁필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럼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치프의 말에 선생들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진 회진은 무사히 끝났다.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은 송명진을 붙잡았다.
"교수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요."
"저번에 메이요 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그 일을 어떻게 결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최기석이 주변을 훑으며 모기만 한 소리로 물었다.
내과에 있는 내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송명진의 거취다.
"이번 주까지 답변을 주기로 했어요."
송명진이 시원하게 남기로 했다고 말했으면 좋으련만,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곧 외래 시간이라서 가 볼게요."
"네. 수고하세요."
최기석은 멀어지는 송명진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 * *
'왔구나.'
최기석은 스테이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9시 30분.
오늘의 첫 수술 스케줄, 즉 조지환의 로봇을 이용한 폐엽 절제술을 시행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드르르륵.
하던 일을 끝내고 한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분.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구승대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술을 앞둔 사람치고는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이다.
"이제 수술방에 들어가겠습니다."
최기석은 침대를 이끌고 수술실로 향했다.
환자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폐암 환자 1기라는 점.
일반 수술보다 훨씬 값비싼 로봇 수술을 한다는 점.
이 두 가지를 보면 조지환의 수술 스타일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모여서 조지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환자가 왔군. 수술 시작하지."
"네!"
스태프들이 스크럽을 하고 하나둘 로젯으로 들어갔다.
최기석도 소독 절차를 밟은 후 베드를 끌며 안으로 향했다.
수술대 옆에 놓인 로봇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로봇 수술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이 수술하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는 환자의 몸에 수술용 카메라와 로봇팔을 집어넣은 후 의사가 3차원 영상을 보며 수술을 한다.
로봇 수술의 경우 의사의 손 떨림을 방지하며 수술 부위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역시 값비싼 비용이다.
'오늘은 병풍인가?'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의례적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로봇 수술의 경우 시야 확보 어시스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자리를 채울 따름이다.
[용의 눈을 사용합니다.]
[수술에 필요한 최적의 시야를 제공합니다. 줌 인 모드와 줌 아웃 모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모드 촬영을 시작합니다.]
최기석은 용의 눈으로 수술실의 전경을 담기 시작했다.
용의 눈으로 저장할 수 있는 동영상의 수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수술실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순환기내과에 있을 때 PCI 와 ICD 삽입법도 동영상으로 찍어 보관 중이다.
이윽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마취의가 이중 기관 튜브를 삽입하여 전신마취를 했고 최기석은 환자를 옆으로 눕혔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제1보조가 환자의 가슴과 복부를 넓게 소독하고 방포를 씌였다.
"카메라."
"네.
조지환의 외침에 제1보조인 치프가 투관침을 들었다. 그리고 환자의 제6번 늑간 사이에 침을 꽂아 넣고 카메라로 환자의 흉강 내부를 살폈다.
환자의 우상엽 끝 부분에 늑막 유착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 다른 유착 부분은 없었다.
'다행이다.'
최기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환자에게서 흉막액이 검출되지 않았다.
폐암 1기라도 소량의 흉막액이 검출될 경우 생존기간이 크게 줄어든다.
흉막액이 발견되면 암이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1보조가 바쁘게 제3번 늑간과 제5번 늑간에 투관침을 꽂는 사이 최기석은 제2보조와 로봇 세팅에 들어갔다.
로봇팔에 필요한 도구와 카메라들을 부착하는 것이다.
"다 됐습니다."
좌측 팔에 포셉을, 우측 팔에 소작기를 장착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너 뭐야?"
제2보조인 레지 3년 차 한민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턴인 최기석이 로봇 수술 보조를 경험한 것처럼 척척 세팅했기 때문이다.
능숙한 정도를 따지면 그와 맞먹을 정도였다.
"로봇 수술 보조는 오늘이 처음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어시를 잘해?"
"그게…… 예전에…… 수술을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최기석은 간신히 핑계를 댔다.
오랜만에 보는 로봇 수술이 기대돼서 너무 나선 게 탈이다.
다행히 한민우는 더 캐묻지 않고 관심을 접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기계 소리와 함께 로봇 수술의 막이 올랐다.
조지환은 능숙하게 콘솔을 다루며 폐엽 절제술을 집도해 나갔다.
치이이잉.
로봇팔에 달린 전기 소작기가 출혈 부위를 지졌다.
덜컹. 덜컹.
조지환은 손으로 로봇 콘솔을 다루면서 발로 바닥에 있는 발판을 밟아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 정교하고 깔끔한 모습은 흡사 피아니스트를 연상케 할 정도다.
최기석은 조지환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송명진은 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외과의다. 다만 성정이 바르지 못하고 권력 욕심이 많아서 수술 솜씨가 묻혀 있는 것이다.
조지환에게 시선을 거두고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건만 비응급이었던 상태가 갑자기 응급으로 변한 것이다.
"환자 혈압이 떨어집니다!"
최기석은 환자 감시 장치를 보고 외쳤다.
130/80mmHg로 정상을 유지하던 혈압이 40/20mmHg으로 떨어졌으며 심박수도 분당 50회로 떨어졌다.
"에피네프린하고 페닐레프린 투여해."
"네!"
최기석은 소독간호사에게 물품을 받아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놓았다.
승압제를 투여하자 환자의 혈압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간 떨어질 뻔했네.'
조지환은 직접 환자의 상태를 살피다가 다시 수술 콘솔에 자리를 잡았다.
폐이식 수술까지 집도하는 그가 고작 폐엽 절제술을 못해서 환자를 죽인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다가는 기껏 얻은 과장 자리도 흔들릴지 모른다.
치이이익.
마음을 다스리고 폐문 부위의 출혈 부위를 전기 소작기로 지졌다.
"과장님. 혈압이 또 떨어집니다!"
탁!
최기석의 외침에 조지환이 신경질적으로 콘솔에서 손을 뗐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