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2)
"미안."
최기석은 품에 안긴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본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조태호와 술자리를 가졌던 날, 조태호가 그에게 직접 알려줬던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설화와 깊이 있는 만남을 가져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거니와 흉부외과에 들어간다면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설화를 만나고 더 깊이 알아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상대가 정설화라면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졌다.
"이제 괜찮아?"
"응."
정설화가 품에서 떨어져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래도 너도 남자네."
"무슨 뜻이야?"
"솔직히 먼저 고백을 들을 줄은 몰랐어. 넌 환자랑 의료공부밖에 모르는 바보잖아."
정설화가 수줍게 몸을 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너한테 사귀자는 이야기 꺼내려고 했어. 네가 거절하면 편하게 마음 접으려고 생각했거든."
"미안."
최기석은 또 사과했다.
정설화가 그동안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먼저 고백하려 했겠는가.
"앞으로는 내가 잘 할게."
"흥. 안 믿어."
"진짜야. 약속할게."
최기석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정설화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좀 걷자."
최기석은 정설화의 손을 꼭 잡은 채 인적이 드문 곳을 걸었다.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친 후라서 그럴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난 말이야. 내가 널 좋아하는 티를 열심히 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는 날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잖아. 그래서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
"그럴 리가. 넌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
"아부도 너무 늦어."
정설화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토라진 척하는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렇게 대화를 도중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맞았다.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감정 속에서 최기석은 정설화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입술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은 꽃잎처럼 부드러웠으며 따뜻한 숨결은 인중을 간지럽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긴 입맞춤을 나눴다.
* * *
지이이잉.
진동에 잠이 깼다.
최기석은 휴대폰 알람을 끄고 씻은 후 책상에 굴러다니던 초코바로 아침을 때웠다.
평소와 같은 하루.
노트북으로 송명진의 논문을 읽고서 아지트에서 집도 연습까지 마쳤다.
'그러고 보니…….'
병동으로 향하던 중 떠올랐다.
오늘이 순환기내과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말이다. 일과를 마치고 다음 달 인턴에게 인수인계를 하면 흉부외과로 돌아가게 된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무거워졌다.
내과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아이템을 얻으며 갖가지 지식을 쌓았던 것은 분명 성과다.
그럼에도 본래 이뤄야 할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임무 보상이 유니크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한 주 전 정설화와 수영장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일이 꿈만 같았다.
워터파크에서 신나게 놀았던 것이며, 정설화에게 고백해서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최 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이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도 고개 숙여 인사말을 건넸다.
"처치하기 전에 이것부터 챙겨 가세요."
김아라 간호사가 간식이 든 바구니들과 편지들을 내밀었다.
그가 강은하에게 응급처치를 한 것이 방송으로 나간 후, 슈퍼 비너스 팬클럽은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간식과 손편지를 보내왔다.
"괜찮습니다. 마음만으로 충분해요."
얼마 전 1층 로비로 내려가 팬클럽 회원에게 의사를 전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은하가 무사 퇴원할 때까지는 계속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선생님들이 드시고, 이건 의국에 있는 선생님들 드릴게요."
최기석은 간식 중 일부만 챙겨서 회의실에 놓았다. 이후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일과 전 처치에 나섰다.
"오늘이 퇴원이네?"
처치를 끝내고 병실에 들어가서 이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페이스 메이커를 삽입한 이후 그녀는 오히려 안색이 좋아졌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
며칠 전 대화를 나눠본 결과 페이스 메이커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라져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분은 어때?"
"좋아요."
"선생님이 전에 말했던 주의 사항 명심하고 3개월마다 꼭 심장 클리닉에 와야 된다. 알았지?"
"네."
이정아가 밝게 웃었다.
최기석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회의실로 향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내과 서적을 보며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띠링!
[내과 처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연계 퀘스트를 완수하여 유니크 아이템을 지급합니다.]
"좋았어!"
최기석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알림 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다행히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드르르륵.
"아침부터 웬 난리야? 소리까지 지르고"
회의실로 들어온 양진석이 최기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한 게 있지."
"혹시 강은하가 너한테 사귀자고 했냐?"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마. 회의 준비 아직 안 했으니까 대신 좀 해 줘."
최기석은 회의실을 나와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NEW [젬 박스: 유니크]
- 원래 인생은 한 방이야. 인생 역전 박스 뽑기!
- 노멀 등급부터 유니크 등급의 젬을 뽑을 수 있습니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아이템 부분에 황금빛 항아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설명이 떠 있었다.
최기석은 당장 박스를 열고 싶은 것을 참았다.
기왕이면 내과 근무가 끝난 후에 확인하고 싶었다.
마음을 달래며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좋은 아침. 통화 괜찮아?"
[응. 마침 휴게실이야. 나 혼자밖에 없어.]
정설화의 밝은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교재를 시작한 후 정설화와 아침 통화를 하는 게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나도 그런데.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
그가 너스레를 떨자 정설화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석이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못할 이유도 없잖아."
[내일부터 흉부외과지?]
정설화가 화제를 바꿨다.
[다음 달 흉부외과 짝턴이 강준이인 거 알아?]
"남강준? 걔가 왜?"
최기석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가 알기로 그의 이번 달 흉부외과 짝턴은 의진대 동기 중 한 명인 이승국이다.
[승국이 며칠 전에 인턴 그만두고 병원 나갔대. 그래서 강준이로 바뀌었나 봐. 특별한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태호 부탁을 받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 마. 무슨 짓을 하던지 당하는 건 걔가 될 거니까."
[응. 믿어.]
정설화의 대답에 힘이 났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 나중에 또 통화하자.]
"그래. 고생하고."
[응. 사랑해.]
정설화가 통화를 끊기 전에 한 마디하고 입술로 쪽 소리를 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서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정설화의 달콤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평소처럼 깔끔하게 병동 처치를 해냈다.
임무를 완수하고 아이템까지 받았기에 처치는 더욱더 거침이 없었다.
환자 바라기의 재생 효과로 체력도 항상 팔팔했다.
병실과 중환자실, 응급실을 쉴 새 없이 오가다 보니 어느새 일과가 끝났다.
최기석은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을 비롯해 환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순환기내과에 많은 정이 들었다.
그에게도 이별은 쉽지 않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저기 교수님. 흉부외과로 가는 날이라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최기석은 작업 중인 김철우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혹시 흉부외과 말고 내과에 픽스할 생각은 없어?"
"죄송하지만 흉부외과 말고 다른 곳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긴 그러니까 3개월 만에 픽스를 했겠지."
김철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시험이나 해 볼까?"
"……."
"관상동맥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 ACE 차단제를 쓰려고 하는데 사용 목적과 금기 사항은?"
"ACE 차단제는 특히 좌심실 부전이 있는 환자에게 좋은 효과를 보입니다. 차단제를 복용하면 좌심실의 운동능력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최기석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약을 사용하면 좌심실 기능 저하가 없더라도 여러 가지 예방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약을 쓰면 환자가 기침을 많이 할 수 있는데 그때는 SARTAN계 약물로 대신 쓸 수 있습니다. 유일한 금기로는 저혈압 환자에게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됐다."
김철우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그리고 이거……."
최기석은 가운에 넣어 두었던 심전도 노트를 꺼냈다.
"벌써 다 봤어?"
"아니요. 아직 절반 정도밖에 못 봤는데 돌려 드려야 될 것 같아서……."
"공부 끝나면 그때 가져와. 대신 그때도 시험이 있을 거야. 통과 못 하면 받아쓰기 시킨다."
"자신 있습니다."
최기석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사하긴 뭐.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어간 건데. 외과 간다고 해서 내과 공부도 너무 손 놓지 마."
"……."
"누가 그랬거든. 환자를 살리는 데는 내·외과가 없다고."
김철우가 과거 최기석이 했던 멘트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순환기내과 병동을 벗어났다.
최기석은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끼며 기숙사로 향했다.
"자, 그럼."
도중에 손바닥을 비비며 상태창을 띄웠다.
순환기내과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최후의 의식을 치를 차례다.
최기석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젬 박스를 바라보았다.
박스를 열고 싶다고 마음먹자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박스에 금이 가며 환한 빛이 쏟아졌다.
위이이이잉.
하얀빛과 함께 박스가 터지면서 젬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레어 젬을 회득하셨습니다.]
NEW [레어: P.
P 획득량 1.5배 상승]
최기석은 젬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어 등급라이면 꽤 괜찮은 효과를 가진 젬이다.
근데 P.
P는 대체 뭐람?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순환기내과 근무를 마치고 다시 흉부외과로 돌아오게 됐다.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 인지던트구나.'
병동으로 향하면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인지던트란 인턴과 레지던트의 사이 기간을 말한다.
그가 인턴을 시작한 지 벌써 7개월이 지났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전공의 시험을 쳐야 한다.
고된 인턴 생활도 바야흐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초 인턴 쌤!"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강하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랜만이에요. 강 쌤."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앞으로 바람 안 피울 거죠?"
"바람이요?"
"흉부외과 말고 다른 과에 가는 게 바람이지 뭐에요? 멋진 흉부외과 의사가 되겠다고 해 놓고."
"그게 그렇게 되나요?"
최기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특별한 일 없으면 앞으로 과 옮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역시 초 인턴 쌤은 지조 있는 의사라니까."
강하나의 말에 최기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순환기내과에 있는 동안 그녀의 활발한 분위기와 입담이 종종 그리울 때가 있었다.
"의국은 별일 없죠?"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장 교수님이 들어오고 나서 라운딩 분위기도 훨씬 밝아진 것 같고요.
"다행이네요."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품을 놓은 카트를 응시했다.
"처치 준비 안 끝났어요?"
"저를 물로 보는 거예요? 최 선생님이 초 인턴이라면 저는 초 간호사라고요."
강하나가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남 선생님이 먼저 와서 처치 중이에요. 저기 오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강준이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