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1)
"꺄아아아악."
물에 맞은 정설화가 비명을 질렀고 최기석은 아도겐을 남발하며 기세를 잡았다.
이에 정설화가 뒤로 돌아서서 물을 튕겼다.
최기석만 얼굴에 물을 맞고 정설화는 물에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항복! 항복!"
최기석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상대가 또래 남자들이었으면 죽기 살기로 덤볐겠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설화다. 물싸움에서 이겨 봤자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겼다!"
최기석의 항복 선언에 정설화가 환하게 웃었다.
이후 두 사람은 파도풀에서 파도를 맞으며 놀다가 수영풀로 이동했다.
'대단하긴 하네.'
최기석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정설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이는 정설화가 이미 지나갔음에도 뒷모습을 지켜봤으며, 곁에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조차 정설화를 훔쳐보다가 여자친구에게 등짝 스매시를 맞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설화는 병원 내에서도 남자 의사들에게 인기 많은 편이라고 들었다.
하긴 예쁘고 싹싹한 데다가 일까지 잘하니 누가 그녀를 싫어하겠는가.
"내가 먼저 시범 보여 줄게."
수영풀에 도착하자 정설화가 자신 있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정설화는 한 마리의 인어처럼 매끈한 자세로 수영을 했다.
수영을 모르는 최기석이 보기엔 그녀가 수영선수처럼 보였다.
정설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편을 찍고 원위치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오랜만에 하니까 힘드네."
정설화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대박이다. 완전 선수인데?"
"그 정도는 아니야. 수영을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히 했었거든."
"······."
"수영 가르쳐 줄게."
"오케이."
최기석은 정설화와 수영풀로 들어갔다.
정설화가 최기석의 손을 잡아 주었고 최기석은 그 상태에서 몸을 뉘여 발을 첨벙거렸다.
"몸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느낌을 기억해. 고개를 바짝 들고."
정설화의 말에 최기석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정설화가 정면에서 손을 잡아주고 있던 터라 그녀의 가슴 말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최기석은 괜히 부끄러워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석아. 앞을 봐야지. 앞!"
정설화의 재촉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어 매끈한 피부와 풍만한 가슴골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최기석은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정설화가 시키는 대로 수영을 배웠다.
30여 분의 가르침 이후.
홀로서기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상체를 앞으로 쭉 밀면서 몸을 수면 위로 눕혔다.
그 상태에서 양팔을 휘저으며 발을 첨벙첨벙 튕겼다.
"후아!"
몸이 훅 가라앉는 바람에 발로 수영장 바닥을 디뎠다.
정설화가 잡아 주지 않으니 물에 떠 있기 힘들었다.
두 발 자전거를 배울 때 뒤에서 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한 번 더."
"알았어."
최기석은 열 번의 시도 끝에 단 한 번 제대로 물에 떠서 약간의 거리를 이동했다.
보잘 것 없는 성과였지만 정설화는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수영 연습을 끝내고 야외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쨍쨍한 햇빛이 두 사람을 반겼다.
"나, 가 보고 싶은데 있어."
"어딘데?"
"따라와 보면 알아."
정설화의 눈웃음이 왠지 불길했다.
십여 분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대형 슬라이드 앞이다.
"서······ 설마 이걸 타자고?"
최기석은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예전부터 놀이기구를 질색했다.
놀이공원을 가도 범퍼카 정도만 타고 바이킹이나 열차 같은 기구는 타지 않고 구경만 했다.
"응. 재미있을 것 같아."
정설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슬라이드 대기열에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재밌다!"
"야호!"
슬라이드를 타는 사람들이 신나게 비명을 질렀다.
쿵. 쿵. 쿵.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망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상태창을 살폈지만 얼어붙은 심장 패시브가 꺼져 있었다.
폭군의 강림은 근력과 민첩성을 올리는 용도로 일상에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심장은 처치 시나 환자를 살필 때라는 단서가 붙어서인지 적용이 되지 않았다.
"재밌겠다. 그치?"
"그······ 그러게."
최기석은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다.
시간이 흘러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안전요원의 지시에 따라 서로를 마주 보고 튜브에 탑승했다.
"내려갑니다."
안전 요원이 튜브를 밀면서 튜브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최기석은 두 눈을 감은 채 안전 바를 꼭 쥐었다.
사방에서 물이 튀고 튜브가 회전하고 난리가 아니었지만 정설화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첨벙!
물살이 갈라지면서 튜브가 풀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최기석은 수명이 단축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대체 이런 걸 왜 돈까지 줘가면서 타는 거지?
"기석아. 너 이런 거 잘 못 타?"
밖으로 나온 정설화가 물었다.
"못 타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럼 미리 말해 주지. 딴 데 가자."
"이 정도는 괜찮아. 한 번 더 타자."
"이제 재미없어졌어."
정설화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최기석은 그녀가 본인 때문에 슬라이드를 포기했음을 금방 알아챘다.
마음씨도 고와라.
두 사람은 워터파크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깥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두 사람 다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원래 세상이 이런 곳인가?'
최기석은 즐겁게 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일할 때는 늘 전쟁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선배들, 환자들, 간호사들 틈에서 숨 막히게 부대끼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 워터파크는 여유와 평화, 즐거움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전혀 낯선 세계에 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석아."
"응?"
"좀 더 편하게 생각해."
정설화가 최기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넌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혹시 여기서 환자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아?"
정곡을 찔렸기에 최기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오늘만큼은 의사라고 생각하지 말고 피서객이라고 생각하자. 응?"
"알았어."
"그럼 약속."
최기석은 정설화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녀의 말에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후 두 사람은 신나게 놀다가 푸드 존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뭐할래?"
"점심도 먹었으니까 편하게 쉬자. 내가 준비한 거 있어."
정설화가 씽긋 웃었다.
두 사람은 야외 존으로 나가서 선탠 하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뭐해?"
벤치에 누운 최기석이 정설화를 응시했다.
정설화는 작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선탠용 오일이다.
"내가 발라 줄게."
정설화는 오일 뚜껑을 따며 말했다.
선탠 오일 발라 주기는 수영 가르쳐 주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준비한 이벤트 중 하나다.
최기석과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면서 사이를 좀 더 돈독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마음이 통해야 스킨십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킨십을 통해 친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 아니. 됐어. 내가 할게."
"됐기는 뭐가 돼. 이러면 우리가 같이 온 보람이 없잖아."
정설화가 막무가내로 덤비는 바람에 최기석은 결국 강제로 벤치에 누웠다.
스으으으윽.
정설화가 손에 오일을 묻히고 최기석의 팔과 다리, 어깨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정설화의 시선.
비키니로 드러난 아름다운 몸매.
부드럽고 야무진 손길에 야릇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 설화야."
"응? 왜?"
"나. 등도 발라줘야 될 것 같은데."
최기석은 재빠르게 몸을 뒤집었다.
예술적인 타이밍, 조금이라도 행동이 늦었다면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다 됐다. 이제 네 차례야."
"내 차례?"
최기석은 놀란 토끼눈으로 되물었다.
"당연하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정설화는 팔과 다리에 직접 오일을 바른 후 뒤를 돌아보고 누웠다.
"등만 발라 줘."
"어? 어."
최기석은 정설화의 뒤태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시련도 이런 시련이 없었다.
'seizure(발작), pericardium(심막)······.'
의학용어를 속으로 되뇌며 간신히 정설화의 등에 오일을 발라 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서 선탠을 즐겼다.
시간이 훌쩍 지나 오후 일곱 시가 됐다.
두 사람은 파도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로커 쪽으로 향했다.
즐거운 오프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으아아아앙."
어디선가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영풀 앞에서 여섯 살 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우렁차게 울었다. 몇몇 사람들이 아이를 쳐다봤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가 보자."
정설화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숙여서 아이와 눈을 맞췄다.
"왜 그러니?"
"어······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으아아앙."
"괜찮아. 괜찮아."
정설화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고 눈물도 닦아 주었다.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돼?"
"박기찬이요."
"누나가 기찬이 엄마 찾아 줄게."
"진짜요?"
"그럼 진짜지. 기석아. 우리 보호소 들렸다 가자."
정설화의 제안에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세 사람은 표지판을 따라 보호소로 이동했다.
"기찬이는 방학이야?"
"슬라이드는 타 봤니?"
이동 중 정설화는 박기찬에게 말을 걸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방금 막까지 울어 대던 아이가 어느새 미소까지 지었다.
아이를 달래는 정설화의 모습에서 최기석은 묘한 울림을 받았다.
"세상이 최 선생을 버려도 최 선생을 지켜 줄 단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송명진이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심장이 두근거렸고 뱃속에서는 이상야릇한 울렁거림이 생겨났다.
더불어 지금까지 지켜봐 온 정설화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최기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본인에게 마음의 눈을 써 보았다.
그의 심장이 진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최기석은 정설화의 시선을 피했다.
보호소에 도착해서 관계자에게 사정을 말하자 방송이 나갔다. 이십 분쯤 지나자 박기찬의 부모가 헐레벌떡 보호소로 달려왔다.
"기찬아!"
"엄마!"
박기찬이 어머니를 발견하고 달려가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서 워터파크를 떠났다.
박기찬의 부모가 보상하고 싶다는 것을 거절한 채로.
병원에 도착하자 밤 9시가 되었다.
"덕분에 재미있었어."
최기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정설화가 워터파크에 가자고 제안하지 않았다면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평소처럼 내과 공부만 했을 것이다.
오늘 같은 새로운 경험이나 오랜만의 사람다운 여유도 갖지 못했으리라.
"나도 너무 즐거웠어."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자주 나오자. 공부만 하는 것보다 이렇게 바람 쐬는 것도 좋네."
"당연하지. 그런데 말이야."
"······."
"천하의 최기석이 있었는데 오늘 워터파크에 환자가 한 명도 없었네?"
정설화가 최기석을 놀렸다.
"이런 날은 봐줘야지."
"그런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화야. 나 할 말 있어."
"뭔데?"
"음······ 그게······."
최기석은 망설였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는 게 옳은 것인지 몰랐기에.
하지만 일상에 푹 젖었던 오늘이 아니라면, 다시 병원 생활에 치인다면 오늘의 감정들이 묻혀 버릴 것 같았다.
"느낀 대로 솔직하게 말할게."
살짝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지낸지도 꽤 오래됐잖아."
"응."
"특히 최근에는 같이 한의사 선생님도 치료하고 대전에 파견도 나갔고 오늘은 즐겁게 놀기도 했지."
"······."
"그······ 그래서 생각한 건데 난 네가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최기석은 정설화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그녀에게 마음의 눈을 써 볼 여유조차 느끼지 못했다.
여자에게 먼저 고백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마 전에 했던 말도 거짓말 아니야.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봤을 때 너 말고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어."
"······."
"앞으로 내 곁에 있어 줄래?"
최기석은 쿵쾅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정설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의 고백에 정설화는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와락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여린 어깨가 바람에 흔들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설화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너무 늦었잖아. 멍청이."